두 번째 작품을 끝내고 나서 나는 또다시 서류를 준비해서 번역원에도 보내보고 대산재단에도 보내봤지만 매번 채택되는 행운을 누릴 수가 없었다. 연간 지원 건수가 제한되어 있고 후보자는 많고…… 그리고 사실 1년에 한 작품씩 지원받는다고 해도 이걸 직업으로 삼아 생활하기는 역부족이었는데, 하물며 2년 또는 3년에 한 작품을, 그것도 지원받을까 말까 한 상황이니 나는 또다시 나의 직업적 진로에 대해 회의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이 일이 마음에 든다고 해도 이걸 전업으로 삼을 수 있는 가능성이 희박한 상황에서 이 길을 계속 고집해야 할 것인지 아니면 모든 걸 접고 완전히 다른 길을 찾아야 할 것인지를 두고 고민했다. 번역을 놓지 않고 파트타임으로 일할수 있는 직장을 찾아봤지만 그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내게는 돌봐야 하는 어린 딸아이가 있었다.
만일 내가 그 괴짜 귀인을 만나지 못했다면 어쩌면 나는 지금 마음에도 없는, 단지 생활 수단으로써만의 어떤 일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를 만난 건 한 후배의 박사학위 논문 발표에서였다. 나를 처음 보는데도 그는 마치 우리가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처럼 많은 말을 쏟아냈다. 그는 연변에서 온 조선족이라고 자기를 소개했고 할아버지의 어깨너머로 배운 한의학으로 파리의 한인들 및 프랑스인들을 치료해주고 있다고 했다. 특히 고치기 어려운 만성병들을 기마사지와 중국에서 가지고 온 한약재로 치료해준다고 하면서 주변에 그런 분들이 있으면 소개해 달라고 했다. 그의 말에는 약간의 허풍도 섞여 있었지만 실제로도 아는 것이 많아 꽤 박식해 보였다. 한마디로 말해 꼭 괴짜 도사처럼 행동했다.
내가 사는 건물의 위층에 나에게 아주 친절히 대해주는 한 노부부가 있었는데 그 부인이 오래전부터 당뇨병으로 고생을 하고 있었다. 그 괴짜 귀인이 만성병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을 소개해 달라고 했을 때, 왠지 모르게 나는 그 노부인을 떠올리면서 당뇨병도 치료 가능하냐고 물었다. 그는 물론 호언장담을 했고, 그렇게 해서 나는 그를 그 노부부에게 소개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여러 차례 노부부를 방문했는데, 그가 불어 소통을 못하는 관계로 내가 매번 통역을 도와주었다. 친절하고 마음이 너그러운 노부부는 매우 만족해하며 올 때마다 진료비를 넉넉하게 챙겨 주었다. 마지막으로 오는 날, 그는 내게 통역을 도와줘서 정말 고맙다며 내게도 건강이나 기타 문제가 있으면 말해보라고 했다. 나는 그를 우리 집으로 안내해서 차 한잔을 대접하며 당시에 고심하고 있던 나의 직업적 진로의 막막함과 이로 인해 더욱 가중된 내 고질적인 불면증 문제를 털어놓았다. 내가 계속 번역의 길로 가야 할지 아니면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 할지 망설이고 있다고 했다.
그는 한참 동안 나를 지그시 꿰뚫어 보더니만 자신은 주역도 좀 공부했다면서 나의 생년월일과 나의 한자 이름을 먼저 물었다. 그리고 내게 주사위 세 개를 주면서 내가 원하는 소원을 머릿속으로 기원하면서 주사위를 세 번 던져 보라고 했다. 나는 별생각 없이 시키는 대로 했다. 그는 나의 괘를 보더니만 바로 결론부터 말했다.« 가던 길을 계속 가세요. 반드시 빛을 볼 날이 올 거요. » 이어지는 그의 설명에 따르면, 나의 괘에서 큰 호랑이 한 마리가 깊은 웅덩이에 빠져 있는 것을 보는데, 이 호랑이가 거기서 빠져나오지 못하면 길을 바꾸라고 충고하겠는데 언젠가 이 호랑이가 웅덩이에서 나와 크게 포효하는 것이 보인다고. 그러니 나더러 계속 번역가의 길을 가면 언젠가는 삶의 매듭이 풀릴 날이 올 것이라고 했다.
나의 불면증과 관련해서 그는 나의 생년월일과 내 한자 이름을 풀이해 보더니, 양쪽 다 에너지가 너무 강해서 불균형을 이루니 이 중 하나의 에너지를 낮추어서 조화를 이루면 좀 나아질 거라고 했다. 내 생년월일은 어차피 바꾸지 못하니 이름을 바꾸어야 한다는 이야기인데, 내 이름은 수풀 림에 꽃부리 영자와 빛날 희자, 즉 « 숲 속의 빛나는 꽃 »이라는 의미로 내가 봐도 너무 좋고 강하긴 했다. 그래서 그와 나는 머리를 맞대고 좀 더 소박하고 겸손하며 한자 부수도 가장 적은 이름 두 자를 짜내었다. 그것이 바로 « 소이 », 즉 작을 ‘소’ 자와 두 ‘이’ 자였다. 내가 우리 형제 중 둘째이니 굳이 해석하자면 ‘두 번째 작은 아이’ 정도 되겠다. 나의 행정 이름은 어차피 바꿀 수가 없으니 나 스스로 내 이름은 임소이다라고 반복해서 쓰고 부르고 또 모든 친구들이나 주변인들에게 그렇게 부르게 하면 그 에너지가 내게로 모아진다고 했다.
그는 이런 주역 괘는 아무에게나 함부로 해주지 않는다면서 자신이 봐서 주로 인복이 있는 사람들에게 한해서 봐준다고 했다. 그의 눈에 나는 타인들로 하여금 나를 도와주고 싶어 하는 마음이 생기게 하는 뭔가가 있다고 했다. 첫눈에 그것을 감지했다고. 그래서였던가? 나를 처음 보자마자 마치 오랜 지인이었던 것처럼 많은 말을 쏟아내었던 것은?
그의 말대로 나는 인복이 많은 사람이었다. 내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마다 늘 도움의 손길을 주었던 사람들, 그들이 없었다면 나의 오늘이 있겠는가? 그 괴짜 도사의 형형한 눈빛은 확실히 사람을 꿰뚫어 보는 마력을 지니고 있었다.
솔직히 말해, 이성적 사고가 강하게 박힌 나는 평소에 이런 신비주의적인 세계를 하나의 미신으로 치부해버리곤 했는데, 당시의 나는 앞날에 대한 절망과 불면증으로 인한 고통이 너무 심해서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의 말을 믿기로 결심했다. 그의 말을 나의 삶을 획기적으로 바꾸는 계기로 삼기로 결심했다. 더 이상 직업적 진로에 대해 회의하지 않고 꾸준히 밀고 나가기로. 그리고 나의 모든 주변 사람들에게 나를 영희가 아닌 소이로 불러 달라고 했다. 어차피 모든 게 마음가짐에 달렸고 그것이 진리냐 아니냐의 여부와 상관없이 강하게 믿으면 나의 뇌에도 영향을 미치리라 생각되었다. 지금도 몇몇 직업적 관계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를 소이라고 부르고 있고 나는 왠지 이렇게 불리는 게 더 기분 좋게 느껴진다.
불면증 치료를 위해 이름을 바꾸는 것 이외에도 그 귀인은 3주분의 탄약을 내게 주었고, 그의 지시대로 그것을 정성스럽게 달여서 먹었는데, 이상하게도 그 이후 잠이 잘 오고 불면증이 사라진 것 같기도 했다. 적어도 캐나다로 가족 여행을 떠나기 전의 3개월간은 그랬다. 캐나다에 가서 시차로 인해 잠 시간이 바뀌면서 다시 불면의 고통이 찾아왔고, 여행을 마치고 파리로 돌아와서도 불면은 여전히 내게서 떠나지 않았다. 점점 더 견디기 힘들어진 나는 그 괴짜 도사를 다시 찾았고, 그는 내게 다시 3주분의 탄약을 지어주면서 잘 듣지 않으면 언제라도 다시 연락하라고 했다.
그 탄약과 개명의 효과 덕분인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암튼 그 이후로 내 불면증 증세는 많이 약화되어가는 것 같기도 했다. 여전히 주기적으로 찾아오긴 했지만 3주간 이어서 잠 못 자는 현상은 사라졌다. 2, 3일간 잠 못 이루는 밤들은 견딜만했고, 그러한 밤들을 일상화하는데 그럭저럭 익숙해져 갔다.
그로부터 약 10년이 지난 어느 날, 나는 그 괴짜 도사의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솔직히 말해, 나는 그동안 그를 깡그리 잊고 있었기에 미안하기도 하고 반갑기도 했다. 그는 3년 전부터 쓰기 시작한 책을 얼마 전에 완성했는데, 그 작품에 대해 내 의견을 듣고 싶다면서 나를 식당에 초대하겠다고 했다. 그렇게 해서 나는 10년 만에 파리의 한 한국 식당에서 그와 다시 마주하게 되었다.
나는 자리에 앉자마자 그에게 크게 감사한다는 말부터 전했다. 10년 전 그의 조언 덕분에 나는 미래가 불투명한 번역가의 길을 흔들리지 않고 꾸준히 걸어갈 수 있었고, 몇 년 전부터 그의 예언대로 빛이 보이기 시작한다고 이야기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의 나는 프랑스 필립 피키에 출판사 한국문학 컬렉션 기획을 담당하면서 아동 및 성인문학 작품들을 꾸준히 소개 번역해오고 있었고, 다른 프랑스 출판사들의 번역 의뢰도 틈틈이 받는 등 소위 말해 전업 번역가의 길을 탄탄히 굳혀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내가 직접 쓴 텍스트를 프랑스 출판사에 출간하는 행운을 얻어 나의 오랜 염원이자 꿈이었던 아동문학 작가의 길도 동시에 걷고 있었던 것이었다.
말로만 감사하는 것이 충분치 않다고 생각되어 나는 그분을 우리 집에 초대해서 정성껏 준비한 식사 대접도 해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