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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고는 쓰레기다. 그런데 그게 정답이다

초고의 목적은 완성이 아니라 존재다

by 윤채

많은 사람들은 글을 쓰기 전부터 완벽한 결과를 상상한다. 첫 문장부터 문체를 다듬고, 단어 하나에도 신중을 기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그 완벽주의가 글쓰기를 가로막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글을 잘 쓰는 사람은 처음부터 잘 쓰는 사람이 아니라, 일단 쓰는 사람이다.



초고는 반드시 쓰레기여도 된다. 왜냐하면 쓰레기 초고 없이는 고칠 문장조차 없기 때문이다.



초고의 목적은 완성이 아니라 존재다

초고의 진짜 역할은 생각의 흔적을 남기는 것이다. 머릿속에서만 맴도는 생각은 아무 의미가 없다. 문장으로 적히는 순간, 그것은 비로소 존재하게 된다.



글쓰기의 첫 단계는 '잘 쓰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게 하는 것'이다. 초고는 표현의 정확성을 위한 단계가 아니라, 생각을 외부로 끌어내는 실험이자 사유의 흔적을 남기는 시도다.



한 문장이라도 써야 한다. 그래야 이건 아니다는 판단이라도 할 수 있다. 아무것도 쓰지 않으면 이건 아니다조차 알 수 없다.



글은 쓰는 도중에만 방향을 찾는다

많은 사람들이 초고를 쓸 때 지나치게 오래 고민한다.



"이 문장이 완벽해질 때까지 기다려야 해."



그러나 진실은 반대다. 글은 쓰는 도중에만 방향을 찾는다. 한 줄의 문장을 써야 그다음 문장이 보이고, 그 문장이 이어져야 비로소 문단이 생긴다. 머릿속에서 아무리 훌륭한 문장을 떠올려도, 손끝으로 옮기지 않으면 그것은 글이 아니라 상상에 머문다.



예를 들어보자. 당신이 "어제 비가 왔다"라고 쓰면, 갑자기 "그 비 때문에 약속을 취소했다"라는 문장이 떠오른다. 이어서 "사실 취소하고 싶었다"라는 속마음까지 덩달아 튀어나온다.



이렇게 문장은 문장을 부른다. 머릿속에서만 고민했다면 결코 도달하지 못했을 문장들이다. 글쓰기의 세계에서는 ‘쓴 문장’만이 현실이다.



완벽주의는 두려움의 다른 이름이다

사람들이 초고를 두려워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완벽주의 때문이다. 완벽하게 쓰고 싶다는 욕망은 겉보기엔 성실해 보이지만, 실은 두려움의 다른 이름이다. 틀리고 싶지 않다는 불안, 실패하고 싶지 않다는 자의식이 글을 가둔다.



"이건 너무 유치하지 않을까?"

"이런 문장은 독자가 싫어하겠지."



이런 생각들이 손끝을 묶는다. 그러나 초고 단계에서 그런 판단은 아무 의미가 없다. 글을 쓸 때는 생각보다 손이 앞서야 하고, 고칠 때는 손보다 생각이 앞서야 한다. 쓰는 사람과 고치는 사람을 분리하지 못하면, 글은 한 줄도 나아가지 못한다.



초고는 속도가 생명이다

많은 작가들은 이렇게 말한다.



"초고는 그냥 질러라."



초고의 목표는 완성이 아니라 속도다. 초고를 쓸 때는 거칠게, 빠르게, 그리고 무심하게 써야 한다. 문장 하나하나에 집착하면 리듬이 깨지고, 리듬이 깨지면 생각의 흐름이 끊긴다.



글은 생각의 강물이다. 물이 흐르지 않으면 썩는다. 초고는 그 흐름을 되살리는 유일한 통로다.



타이핑하다 오타가 나도 그냥 넘어가라. 단어가 어색해도 일단 쓰고 넘어가라. 문장이 이상하다고 느껴져도 멈추지 마라.



그 모든 것은 나중에 고치면 된다. 지금은 오직 '흐름'만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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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고는 원석이다

헤밍웨이가 초고는 쓰레기라고 말하면서, 그 말을 부끄러워했을까? 오히려 그것이 글쓰기의 원칙임을 강조했다. 그가 말한 '쓰레기'란 가치가 없는 것이 아니라,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원석이라는 의미이다.



글은 초고 단계에서 비로소 숨을 쉰다. 다듬기 전의 문장은 투박하지만 그 안에는 살아 있는 재료가 있다. 생각의 결, 감정의 떨림, 리듬의 패턴이 그 안에 녹아 있다.



완성된 글은 초고의 흔적 위에 세워진다. 고칠 수 없는 글은 단 하나뿐이다. 바로, 쓰지 않은 글이다.



불완전함을 견디는 연습

초고를 쓴다는 것은 결국 불완전함을 견디는 연습이다. 나도 처음 블로그를 시작했을 때, 한 글자 쓰는 데 30분이 걸렸다. 문장 하나 쓰고는 지우고, 다시 쓰고 또 지웠다. 그러다 깨달았다. 이렇게는 평생 한 편도 못 쓰겠구나.



그래서 규칙을 정했다.



"일단 30분 동안 무조건 쓴다. 절대 지우지 않는다."



처음엔 정말 쓰레기 같은 문장들이 쏟아졌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30분이 지나고 나면 그 안에서 쓸 만한 문장이 몇 개씩 보였다. 그 문장들을 살리고 나머지를 버리니, 어느새 글 한 편이 완성되어 있었다.



완벽하지 않은 문장을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는 글을 쓸 수 있다. 초고는 실패의 결과물이 아니라 완성의 시작점이다. 글은 처음부터 잘 써야 하는 게 아니라, 끝까지 써야 완성된다.



글을 잘 쓰는 유일한 방법

글을 잘 쓰는 사람과 못 쓰는 사람의 차이는 재능이 아니다. 초고를 쓸 수 있느냐 아니면 머릿속에서만 글을 쓰느냐의 차이다. 처음부터 잘 쓰려는 사람은 결코 완성하지 못한다. 끝까지 쓰는 사람만이 진짜 작가다.



결국 글을 잘 쓰는 유일한 방법은 못 쓰는 글을 끝까지 쓰는 것이다. 초고는 당신이 글을 시작했다는 증거이자 다시 쓸 수 있는 용기의 흔적이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 초고를 썼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당신을 글 쓰는 사람으로 만들었다.



지금 당장 30분만 시간을 내라. 그리고 무엇이든 써라. 지우지 말고, 고치지 말고, 멈추지 마라. 30분 뒤, 당신 앞에는 쓰레기 같은 초고가 남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게 바로 당신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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