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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집사 김과장 Jul 08. 2022

후지오카

카슈가르 喀什

사막 횡단 열차



카슈가르에 가면 교주와 해랑을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설렜는지 잠을 설쳤다.

기차 시간은 5시 20분이었다.

새벽 4시에 몸을 일으켜 길을 나섰다.

택시에서 내려 역에 들어가니 사람이 없다.

고요한 평화는 잠시, 발차 시간이 임박해 시작된 검표 과정은 역시나 아수라장이다.

악다구니를 벌이는 사람들 사이를 헤집고 다니던 승무원 하나가 목소리를 높였다.

 


"줄 서요! 여기 외국 사람들도 있는데, 창피하지도 않아요?"



중년 여인의 사자후가 먹혔다.

중국 생활을 시작한 지 1년 만에 사람들이 줄 서는 걸 보게 됐다.






기차표는 좌석지정이 안 된 우쭈어(無座)라 승차한 순간부터 전쟁이다.

객차 내엔 이미 두 자리, 세 자리씩 차지하고 자빠져 자는 중국인들로 즐비했지만 아무도 일어나지 않았다.

'나만 아니면 돼'라는 인식이 팽배한 이기적인 중국인의 모습이 다시 나타났다.

내가 선 곳 앞자리에 누워있던 중국 여자아이 하나가 부스스 일어났다.

쿠처에서 만나 카슈가르까지 동행하게 된 최 선생이 "앉아도 될까요?"하고 점잖게 물어보니 "흥!" 하는 콧방귀와 함께 다시 자빠진다.

그걸 본 나는 또 혈압이 솟구친다.

다음 역에서 자리가 나 앉았지만, 기분이 더러운 건 여전하다.

통로 맞은편 자리에는 위구르족 아이 둘이 엉켜 자고 있었다.

5~6살 정도 돼 보이는 꼬마들인데, 그로테스크한 각도로 몸이 꼬여있어도 정말 달게 잔다.

어느샌가 잠이 깬 싸가지가  "저 꼬마들 낮에는 미쳐 날뛰더니 밤엔 저렇게 달게 자네..."하고 푸념한다.

피로 앞에 장사 없다.

불편한 자리에 앉아서도 어느 틈엔가 잠이 들었다.

일어나 보니 해는 중천이고, 퍼져서 자던 남매가 활동을 시작했는데 모양새가 가관이다.

누나는 그나마 얌전히 있는데, 작은놈은 그 좁은 기차 안에서 이리 뛰고 저리 뛰는 꼴이 스파이더맨 실사판이었다.

풍선을 불어 통로를 왕복하며 드리블을 하더니, 급기야는 자리에 앉아있는 사람을 샌드백삼아 권투까지 한다. 그러나 아무도 아이를 제지하지 않았다.

그래. 나만 아니면 된다.






기차 안에서 우루무치에서 같은 방에 묵었던 후지오카 씨를 만났다.

우루무치를 떠나며 가볍게 눈인사만 주고받았는데, 기차 안에서 다시 만나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다.

이것도 인연이라고 둘 다 아침, 점심도 거른 채 기차에서 파는 맥주 한 병으로 끼니를 대신하며 대화를 나눴다.



돌이켜보건대 나는 진지충이었다.

유머 감각은 후졌고 남들 얘기를 경청해야 착한 사람이라는 어릴 적 교육의 효과 덕분에 재미없는 이야기라도 티 내지 않고 열심히 들었다.

그래서일까? 여행을 다니면서 낯선 사람을 수도 없이 만났지만 대화가 어렵지는 않았다.

그런데 그날 만난 후지오카 씨는 나보다 더한 진지충이었다.



"일본의 정치, 경제는 더 악화될 수 없을 만큼 형편없는 상태야"



맥주병을 뜯자마자 대뜸 한다는 소리가 이거였다.

내가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라고 대꾸했더니, 그는 "그래도 한국은 아직 변화의 여지가 보이지만, 일본은 이미 아무런 변화도 없어. 끝없는 불경기야. 일본은 절대로 변할 수 없을 거야"라며 술을 들이켰다.  

당시 가끔씩 뉴스를 통해 전해 듣던 국내 상황은 '더는 악화될 수 없는 최악', '건국이래 최악', 'IMF 때 보다 형편없는'이라는 수식어로 점철되어 있었다.

당시 난 어렸고 시사에는 문외한이었다.

정말 우리나라가 망할 것만 같았던 그때, 후지오카 씨의 말은 나에게 한줄기 희망 같았다.

맥주 한 병을 다 비운 후지오카는 다음 병을 뜯으며 말을 이었다.



"자유롭게 여행하며 살고 싶은데, 그러려면 돈이 있어야 해. 결국 인생의 열쇠는 돈이야."






카슈카르에 도착하니 찌는 듯 더웠다.

호텔에서 마중 나온 버스를 타고 들어가 짐을 푼 후 노천카페에 앉아있었더니, 마침 교주가 지나간다.

1주일 만에 다시 본 얼굴인데 씨게 반가웠다.

해가 진 후 맥주 한 잔 하러 시장으로 나서는 길에 본 카슈가르는 여느 중국 도시와 다를 게 없었다.



"1년 만에 너무 많이 바뀌었는데... 카스도 이제 죽었구나"



교주가 한숨을 내쉬었다.




 


카슈가르는 뭔가 답답했다.

실크로드 교통의 요지로 천여 년 전부터 교역로로 번성했던 도시라는 영광은 옛이야기였다.

그 유명한 일요시장은 그냥 시끄럽고 붐비는 동네 시장일 뿐이었다.

모스크 구경이나 유적지 구경도 시들하고, 그렇다고 투루판이나 둔황처럼 특색이 있는 것도 아니다.

이대로 떠나면 나중에 후회할 것도 같지만 그렇다고 더 머물고 싶지도 않았다.

티베트로 떠나기로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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