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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집사 김과장 Jan 09. 2024

웨이칸(围看)

알리




길도 아닌 길을 따라 알리로 꾸역꾸역 들어간 이유는 서부 티베트의 비경을 보기 위해서였다.

서부티베트는 불교 전승의 '수미산(須彌山)'이라는 성산(聖山) 카일라스(Mt. Kailash)가 있는 곳이자 신비의 고대 왕국, '구게 왕국'이 자리한 곳이다. 

'스탄'으로 시작하는 땅덩이들과 인접한 지역답게, 황량하고 거친 사막이 넓게 펼쳐졌다. 

그리고 그 안에 마치 전설처럼 구게왕국의 유적이 자리하고 있다. 







카일리크(예청)에서 출발해 알리까지 들어가는데 54시간이 걸렸다. 

54시간 동안 잠을 제대로 자 본 기억이 없다.

몸은 항상 구겨져있었고, 호흡은 가빴다.

입맛이 없지만 살기 위해 억지로 음식을 목구멍에 밀어 넣었다.

그래서였을까?

긴장이 풀리니 몸살이 들었다. 

고산증이 채 가시지 않은 상황에 감기몸살로 드러누우니 생지옥이 펼쳐졌다.

밥 먹으러 나갈 힘도 없지만, 동행한 교주를 봐서라도 억지로 몸을 일으켜야 했다. 



"알리에 들어가면 일단 공안을 찾아가야 해. 가서 '데끼'를 찾아서 '나 들어오긴 했는데 퍼밋이 없다'라고 하면 퍼밋을 끊어줄 거야"


데끼는 알리에서 유일하게 영어를 할 줄 아는 공무원이라고 했다.


공안국은 동네 파출소 같았다. 

하지만 작은 규모와 달리 알리의 공안국은 광활한 서부 티베트 전체를 관할하는 지청이었다.

데끼는 제법 지위가 있는 듯 사무실 안쪽 구석에 앉아 있었다. 

작지만 다부진 체격, 눈이 유난히 초롱초롱한 30대 여자였다. 

우리를 본 그는 씩 웃더니 별 말 안 하고 퍼밋을 발급해줬다. 

이제 라싸까지 가는 길이 열렸다.






티베트에는 '대중교통'이라는 개념이 없었다. 

어디론가 가려면 차를 대절하거나 히치하이크를 해야 했다. 

개별여행자들은 보통 물류 트럭을 수배해 이 지역에서 저 지역으로 넘어 다니곤 했다. 

나와 교주, 해랑도 마찬가지여서 매일 트럭 터미널(이라긴 미안하고 그냥 집결소 정도였다)로 가서 자다(구게왕국 유적)로 가는 차를 찾았다. 

닷새를 연이어 허탕을 치고 나니 맥이 빠졌다. 

한 기사는 "내일 자다 갈 거야. 이따가 전화할게"라고 내 전화번호를 적어가 놓고는 그냥 잠수를 타버렸다. 

황량한 사막에서, 아무것도 할 것이 없는 곳에서 닷새를 뻐기고 있자니 정신이 나갈 지경이었다. 


결국 마지막 수단으로 우체국 트럭을 알아보기로 했다. 

데끼가 "차 못 찾으면 공안국 와, 우체국 트럭 소개해줄게"라고 했었다. 

데끼는 황송하게도 우릴 경찰차에 태워서 우체국까지 데려다줬다. 


"1인당 500위안"


우체국 트럭 기사는 눈을 까불며 배짱을 부렸다. 

공무원이 대놓고 부업을 하는 현장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이상하지만, 공안인 데끼는 그저 우리에게 미안해할 뿐 공무원의 일탈을 못 본 체했다. 



공안국으로 돌아왔더니, 정문 옆에 트럭이 한 대 서있다.  

무심코 "혹시 자다 가나?"라고 물었더니, 간단다. 

셋 다 눈이 돌았다. 

1인당 50위안, 1시간 후 출발로 약속하고 부리나케 호텔로 돌아와 짐을 챙겨 체크아웃했다. 

들뜬 마음으로 약속장소에 도착했더니 트럭이 안 왔다. 

약속 시간 좀 늦는 건 애교로 봐줄 수 있었다. 

일단 알리에서 빠져나가야 했다. 

그러나 두 시간이 지나도록 트럭이 오질 않아 전화를 걸었다. 


"세 명 합해서 2,000위안. 싫으면 말고"


뒷골이 근질거렸다. 

징그러운 놈들.

다시 호텔로 돌아가는 길에 트럭 몇 대가 모여있다. 

우리가 온 동네를 쑤시고 다니는 걸 본 구멍가게 아낙이 말을 걸었다.


"트럭 한 대가 잠시 후에 자다로 갈 거야. 1인당 50위안에 데려다준대"


롤러코스터를 탄 기분이었다. 

별로 기대는 되지 않지만, 어쨌거나 차가 있다니 배낭을 깔고 앉아 기다렸다. 


다시 두 시간이 지나 나타난 트럭은 어마어마했다. 

사이즈는 '두돈반'인데, 짐칸은 통나무로 가득 찼다. 

좌석은 트럭 기사와 조수가 차지했고, 우리는 짐칸에 앉아서 가란다. 

방수포도 없이 노출된 짐칸 위에서 통나무에 매미처럼 달라붙어 가란 얘기다. 

잠시 미쳤던 게 분명한데, 어쨌거나 알리에서 나가야겠다는 생각에 그렇게라도 가겠다고 했다. 


배낭을 짐칸에 던져 넣었더니 갑자기 기사가 소리를 지른다. 


"야, 아직 짐 덜 실었어"


기사는 아직 못 다 실은 짐을 실으러 어디론가 가버렸고,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도대체 이네들의 사고 구조와 행동 양식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애당초 생각도 없었는데 왜 태운다고 한 것인지, 아니면 중간에 마음이 바뀐 것인지 모르겠지만, 하루에 몇 번이나 엿을 먹는지 모르겠다. 

티베트도 장족도 지긋지긋했다. 

말 바꾸기는 예사고, 사람 엿 먹이는 건 옵션이다.

교주, 해랑과 함께 "돈만 아는 중국 놈들, 빌어먹을 중국 놈들"을 저주하며 다시 숙소를 잡았다. 


몸도 마음도 엉망인 상태였지만, 여행 카페에서 정보를 얻을 수 있을까 싶어 PC방에 들어섰다. 

(*놀랍게도 그 오지에 PC방이 있긴 있었다. 포털 사이트에 로그인하려고 계정, 비번 넣고 라면하나 끓여 먹고 나면 로그인이 되는 사양이었지만)

열두어 살 정도 돼 보이는 장족 아이들은 그 열악한 환경에서 담배를 피워가며 게임에 열중하고 있었다. 

로그인이 됐고 검색을 시작하려는데, 갑자기 뒤쪽에서 '우당탕'하는 소리가 났다. 

돌아보니 뒷자리에 앉아있던 꼬마가 땅바닥에 쓰러져 부들부들 떨고 있다. 

눈이 돌아가고 입에서는 거품이 부글거리는 것이 간질발작이었다. 

혀를 깨물까 봐 다급히 옆에 있던 걸레인지 행주인지 알 수 없는 무언가를 입에 물렸다. 

아이는 놀라운 힘으로 행주와 내 손가락을 함께 깨물었다.

손가락이 잘려나갈 것 같았다. 

깜짝 놀라 아이의 상악과 하악을 잡아 벌렸지만 요지부동이다. 

손가락이 잘릴지, 아이의 숨이 넘어갈지 모르는 정신없는 시간이 지나갔고, 다행히 발작이 잦아들었다. 

그제야 주위가 눈에 들어왔다.

멍청한 눈으로 입을 헤~벌린 사람들이 내 주위를 둘러싸고 구경(웨이칸, 圍看) 중이었다. 

어처구니가 없어하는 나를 본 사람들은 슬금슬금 자리로 돌아가 다시 게임에 열중했다. 

말로만 듣던 웨이칸을 직접 경험하고 나니 혐오스러운 감정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19세기 루쉰의 소설에 등장했던 '짱개'들은 여전히 존재했다. 



웨이칸 
'둘러싸고 구경하다'는 뜻이다. 중국인의 극단적인 개인주의, 혹은 이기주의 성향을 나타내는 단어다. 지금이야 많이 '문명화(文明化)'되어 사라져가고 있다지만, 과거에는 실재했던 경향이다. 중국인들은 자기와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면 불의, 타인의 불행에 둔감했다. 사람이 죽던 말던 그저 방관하고 지켜봤다. 19세기 중국의 대표적인 지식인, 소설가 루쉰(鲁迅)은 이런 중국인의 비도덕적이고 반사회적인 경향을 소설을 통해 통렬하게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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