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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집사 김과장 Jan 28. 2024

千年王國(천년왕국)

챠파랑(구게왕국 유적)


척박한 고원의 사막. 

풀 한 포기 자라지 않을 것 같은 이곳에, 천년 전 화려한 불교미술을 꽃피웠던 전설의 왕국이 있었다.

... 라고 뻥을 좀 쳐봤다.


폐허가 된 차파랑에 쓸쓸히 자리한 왕궁 유적


하지만 대부분 사실이다.

구게왕국은 10세기 초 세워져 서부 티베트의 역사를 좌지우지했다. 

역사상 가장 강력한 무력이었던 몽골 제국의 침략으로 한때 분열했으나, 원나라 쇠퇴 이후 다시 티베트 서부를 통일했다.

이후 히말라야 서부를 건너 인도, 중앙아시아와 대륙을 연결하는 교역로를 틀어쥐고 지리적 이점을 활용해 지역의 패자로 군림했으며, 찬란한 불교 미술을 발전시켰다.


<천공의 성 라퓨타>가 연상되는 기괴하고 복잡한 도시 구조



그랬던 구게왕국은 17세기 중반, 같은 티베트 계열 국가인 라다크 왕국에게 멸망했는데, 이때 수도인 차파랑(현재의 구게왕국 유적)이 완전히 파괴된 채 오늘날에 이르렀다. 

천년 간 찬란한 문화를 발전시켜 온 왕국이 하루아침에 폐허가 됐다는 사실, 그리고 그 폐허에 남아있는 불교 미술이 놀랍도록 수준 높고 아름답다는 사실은 호사가들의 흥미를 자극했고, 구게왕국에 각종 서사를 갖다 붙였다. 

특히 밀교에서 유래한 기괴하고 섹슈얼한 불화들은 이런 스토리텔링에 더없이 좋은 소재가 됐다.


20년 전의 차파랑은 전혀 관리가 되고 있지 않았다. 문화대혁명 때 박살 난 사원 유적은 방치돼 있었고, 보존이 된 미술품들은 관람이 금지돼 있었다. 


티베트 밀교는 비슷한 밀교 계열 불교가 자리 잡은 일본에서 특히 큰 관심을 끌었는데, 1980년대에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던 <공작왕>, <3X3아이즈> 같은 작품에 이 요소가 그대로 드러난다.

특히 <3X3아이즈>는 작품 속 배경과 작화에 티베트의 환경을 자주 차용했는데, 삼지안 파이의 기억 속 샴발라는 구게왕국의 폐허를 보자마자 떠오를 정도로 유사하다. 

그러니 10대 초반 <3X3아이즈>를 보며 하앍거렸던 내가 구게왕국을 답사하기로 한 이후 얼마나 흥분했을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듯하다. 



아아.. 빵형...



이 지역과 얽힌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나 더 해보자.

브래드 피트의 화려한 미모와 마초스러운 모습을 한번에 볼 수 있는 영화 <티베트에서의 7년>은 오스트리아의 산악인 하인리히 하러의 실제 수기인 <Seven years in Tibet>를 토대로 만들어진 영화다.

하러는 히말라야 산맥의 낭가파르밧 등반을 나섰다가 실패하고 돌아가던 중, 2차 대전 발발로 인해 영국군의 포로로 잡힌다.

극적으로 수용소를 탈출한 그는 히말라야 산맥으로 숨어들어 도망치다가 티베트 사람들의 마을로 피신하고 승려들의 도움을 받게 되는데, 거기가 바로 쟈다현에 있는 '퇼링 사원'이다. 

영국군에게 잡혔는데 왜 히말라야인고 하면, 인도를 식민지로 삼았던 대영제국이 제멋대로 그어놓은 국경선 '맥마흔 라인'이 바로 이 지역 아래를 지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전편에 소개한 바 있다. 

(링크: https://brunch.co.kr/@902/19)



구글지도는 티베트 지역의 지리 정보를 제공하지 못한다. 이유는 다들 아시리라...





자다에 들어오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시간이 없다.

알리에서 일주일을 허비했기에 가능한 한 빨리 서부 티베트 일정을 마치고 라싸로 넘어가야 했다.

사실 기한을 두고 떠난 여행이 아니었기에 급할 건 없었지만 버려지는 시간이 아까웠다. 

더 많은 곳을 보고, 경험할 수 있는 기회가 사라지고 있었다. 

자다 역시 '탈출'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니 서둘러야 했다. 

 

밤새 말도 못 할 고생을 한 후 랜드크루져 기사와 드잡이까지 한 터라 몸과 멘탈이 탈탈 털린 상태였지만, 4시간 정도 쪽잠을 잔 후 이를 갈며 일어났다. 

일어나자마자 세수도 양치도 생략하고 차를 알아보러 나섰다.

크지 않은 자다를 30분 정도 돌아다닌 후, 2~3일 안에 라싸로 가는 차량 두 대를 찾아냈다.

그중 한 대의 기사를 꼬셨다.


"어차피 내일 모레까지는 차 세워두고 놀 거 아냐? 우리 태우고 챠파랑(구게왕국 유적) 다녀오면 부수입도 생기고 좋잖아?"


기사의 입이 헤벌쭉 벌어졌다. 




캄캄한 밤중에 지옥도를 달려오느라 몰랐는데, 트럭이 자다현을 벗어나는 순간 입이 떡 벌어졌다. 

<론니 플래닛>에는 '끝없이 펼쳐진 협곡, 그랜드 캐년을 연상케 한다'라고 묘사했다. 

 울퉁불퉁한 단층의 황토계곡이 끝없이 펼쳐져 있고. 그 위로는 푸른 하늘이 뻗어있다.

차파랑까지 향하는 동안 만나는 계곡의 벽면에는, 이곳이 옛 왕국의 폐허임을 증명이라도 하듯, 건축물의 폐허와 동굴들이 오랜 세월을 지나며 풍화되고 흘러내린 흙에 덮여있어 옛 영화를 짐작케 했다.


이러고 다녔다


황량한 풍경에서 오는 비장미와 우수 어린 감상은 잠시, 짐칸에 타고 달렸더니 트럭이 감아올린 먼지를 그대로 다 뒤집어썼다. 

차파랑에 내려보니 검은 옷이 누렇게 변해있고, 온몸에 분을 뒤집어쓴 듯하다.

목이 깔깔했지만 스물다섯의 몸뚱이는 다행히 아무렇지도 않았다. 







돌산을 깎고 굴을 파서 만든 구게왕국의 유적을 올랐다.

가파른 경사를 오르느라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구게왕국 유적에 입장하려면 무조건 가이드를 대동해야 한다는 중국 정부의 지침은 유명무실했다.

초로의 현지인 가이드가 한 명 따라붙었으나, 이 사람이 할 줄 아는 영어는 "This is ###" 한마디가 전부였다.

설상가상으로 가이드는 유적 중턱에서 고산병으로 퍼져버렸고, 돌더미에 주저앉아 알아서 다녀오라고 손을 내젓는 기가 막힌 상황을 보여줘 우리를 웃겼다. 

고산병에 걸린 티베트사람이라니... 



정신이 가출한 가이드(좌)와 힘들어하는 해랑(우)



유적은 전혀 관리가 되지 않고 있었다. 

전등은커녕 촛불도 하나 없어서 무너진 벽이나 돌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햇볕에 의지해 어두운 공간을 뚫어져라 쳐다봐야 했다. 

설명이나 해설을 해놓은 자료도 전혀 없었다.

내가 있는 곳이 어디인지도 모르겠고 벽화와 불상은 어두워서 잘 보이지도 않았다

불교와 불교미술에는 문외한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따라서 내가 보고 느낄 수 있는 감상은 한정적일 수밖에 없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렴풋이나마 보이는 벽화의 수준은 둔황에서 봤던 것보다 훨씬 정교하고 아름다웠다.  

구게 왕국이 인도와의 교통로 번성했다던데, 과연 그 흔적을 엿볼 수 있다.




정작 내가 구게왕국 유적에 흥미를 느낀 건 다른 포인트였다.

전체적인 유적의 느낌은 롤플레잉 게임의 던젼을 보는 듯했다.

좁고 구불구불 이어진 길을 따라가면 연이어 작은 문을 지나 방으로 들어가게 됐다.  

'겨울 궁'이라 이름 붙은 방에 들어가는 길은 90도에 가까운 경사로가 이어진 계단이었는데, 쇠줄을 붙잡고 내려가 허리를 숙이고 기어 다녀야 방을 돌아볼 수 있었다. 

시커먼 공간을 더듬어 가다가 문득 으스스한 불화라도 마주칠 때면, 밤길에 도깨비라도 만난 양 흠칫 놀라곤 했다. 

유적의 마지막, 정상에 위치한 방에 올랐더니 구게왕국 유적의 복원도를 하나 걸어놨다. 

집 위에 집이 있고, 기묘한 각도로 배치된 건물들이 교차하는, 지브리 애니메이션에서 종종 봤던 퍼즐 같은 마을이었다. 



삼지안이 살던 샴발라는 분명히 이 그림 보고 그렸을 거다



두 시간 남짓 헤매고 나와서 올려다본 유적의 모습은 경이로웠다.

황량한 협곡 사이에 서서 풍화되어 가는 토사를 흩날리고 있는 거대한 유적은, 전쟁을 마치고 숨을 거둬가는 갑옷입은 장수를 보는 듯했다. 

요즘 같으면 메모리카드가 가득 찰 때까지 사진을 찍느라 정신없었겠지만, 그때는 24컷짜리 필름 한통 한통을 아껴가며 찍을 때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름 두 통이 순식간에 날아갔다. 

유적을 떠나면서 "꼭 다시 와야겠다"라고 다짐한 순간이 어느새 20년이 지났다. 

신장 위구르 자치구와 시장 티베트 자치구에 대한 중국 정부의 봉쇄정책은 아마 변하지 않을 듯하다.

문득 '내 생전에 다시 가 볼 수 있을까?'싶은 생각이 들며 우울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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