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집사 김과장 Feb 15. 2024

시바의 땅에서

카일라스 산


다르첸은 카일라스 코라의 기점이자 종착점이다. 

티베트 사람들은 성지를 중심으로 시계방향으로 도는 순례길을 걷는데, 이를 '코라'라고 한다. 

카일라스 코라는 약 42km 구간으로 보통 1박 2일에서 2박 3일 코스를 잡는다. 


수많은 사람이 카일라스 산을 '영산(靈山)'이라 부른다.

삼대 종교의 성지라는 위명에 각종 전설과 서사를 품었고, 황량한 풍경과 접근이 쉽지 않은 지리적 요소는 이 산을 신비로운 산으로 치장하기에 충분했다.

그래서 서부 티베트에 가면 누구나 카일라스 코라를 돈다 했다. 

아니, 이 산에 오르기 위해 서부 티베트를 찾는다 했다. 






미로 같은 다르첸 마을. 좁은 골목 사이사이에는 송아지 만한 개들이 터줏대감처럼 자리 잡고 앉아있다.



남루의 가게 아낙이 길 가는 트럭을 수배해 준 덕에 다르첸까지의 여정은 수월했다. 

그래도 오후 늦게 도착한지라, 일단은 천막으로 만든 초대소에 짐을 풀고 밥을 먹은 후 이내 곯아떨어졌다. 

다르첸은 제법 추웠다. 

천막 사이로 어슴푸레 햇살이 밀려들어 눈을 떠보니 오전 8시 반이었다. 


본격적인 순례길에 오르기 전 다르첸 마을을 돌아다니다 보니 익숙한 얼굴이 있다.

1주 전, 알리 공안국에서 데끼의 옆을 지키던 장족 공안이었다. 

며칠 전 이곳으로 한 달간 파견근무 나왔단다.

이것도 인연이라고 여기서 다시 만나니 서로 반가움을 금할 길이 없다.

초대소 주인은 우리가 도착한 날 오전에 한국 스님 네 분이 이미 코라길에 올랐다고 알려줬다. 

주인은 "스님들이 2박 3일 일정으로 출발했으니, 1박 2일 일정인 우리와는 '디라푹' 사원에서 만날 수 있을 거다"라고 귀띔했다. 

다르첸에서 한국인의 흔적을 발견하게 될 줄은 몰랐기에 놀랍기도 하고, 반갑기도 했다. 






카일라스 코라의 시작



죽과 만두로 간단하게 아침을 해결하고 코라에 올랐다.

시작은 평탄한 길이 이어졌다. 

하지만 기점인 다르첸의 해발 고도는 이미 4800m다. 

숨이 들고 날 때마다 허파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났다. 

100m 정도 전진하고 나면 2~3분씩 숨을 골라야 했다. 

평지를 걷는데도 땅밑에서 누군가 내 다리를 잡아끄는 느낌이었다. 

고된 히치하이크 여정에 몸뚱이가 축이난 건 생각 않고, 내 체력의 비루함에 절망했다.

골초였던 교주와 해랑은 오히려 죽죽 앞으로 치고 나갔고, 나만 뒤에 떨어져 힘겹게 그들의 발자국을 따라갔다. 


다르첸 맞은 편의 마나사로바 호수와 산... 이름이 기억나질 않는다


얼마나 걸었을까? 

인도 순례팀을 따라가던 포터 한 사람이 죽을 듯 숨을 몰아쉬는 나를 보며 '사원까지 얼마 안 남았으니 힘내라'며 격려했다. 

그가 말한 사원은 디라푹 사원이었다.

코라에 오르는 이들은 보통 이 사원에서 하루를 묵어갔다.






카일라스의 서면을 지나며 그 웅장한 자태에 감탄하고 있을 즈음, 화창하던 날씨가 갑자기 어두워졌다. 

발아래를 내려다보니 산의 경사면을 타고 비구름이 미친 듯이 달려들고 있었다.

급하게 우산을 꺼내 썼지만 몸을 날려버릴 듯한 강풍에 우산살이 부러져 나갔다.

우박은 바람을 타고 옆으로 날아 온몸을 마구 두들겨댔다.

땀을 뻘뻘 흘리며 오르던 길이 순식간에 냉동창고로 바뀌었다.

우박을 피해 쉬어가고 싶지만, 몸을 숨길 바위도 하나 없이 허허벌판이다.

재킷의 후드를 뒤집어쓰고, 몸을 잔뜩 웅크린 채 꾸역꾸역 앞으로 나가야 했다.

숨을 쉴 때마다 계속 풍선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났다. 

산소가 부족한 탓이었는지, 나중에는 시야가 흐려지고 현기증이 나 계속 눈을 비비면서 올라야 했다.


그렇게 10분쯤을 걸었을까?

눈앞에 작은 텐트가 보였다.

죽기 살기로 달려 천막 안으로 굴러들어가 밭은기침을 토해내고, 곧 죽기 직전의 늙은 개처럼 거친 숨을 내뿜으니 천막 안의 사람들이 모두 쳐다본다. 

체면이고 나발이고 흙바닥을 뒹굴고 있으니 먼저 와있던 장족 포터가 씩 웃으며 따뜻한 차를 건넨다. 

차를 마시며 숨을 돌리고 나니 거짓말처럼 날이 개이고 카일라스가 다시 그 얼굴을 드러냈다.

사방에 지옥도를 그려냈던 비구름은 어느새 산 너머로 도망가버렸다. 

다시 길을 나서기 전, 차를 건네준 포터가 나를 잡아 세웠다. 



"숨 쉴 때는 천천히 깊게 들이마시고, 내쉴 대는 세 번씩 나눠서 뱉어봐요. 절대 빨리 걷지 말고 호흡을 느끼면서 천천히 걸으세요."



친절한 배려 덕분에 여유를 찾은 탓일까? 

아니면 어느새 해발 5000m의 고도에 조금이나마 적응을 한 탓일까? 

이후의 길은 조금이나마 편했던 듯하다. 

그래봐야 쉬는 시간이 조금 줄어들었을 뿐, 심장과 허파를 한꺼번에 잡아 찢는 듯한 고통은 그대로였다.




거짓말처럼 개인 하늘






디라푹 사원에 굴러들어가니 먼저 도착한 교주와 해랑이 나를 반겼다. 

우박과 비에 흠뻑 젖은 옷은 사원까지 오는 동안 강렬한 햇살에 거짓말같이 말랐지만, 신발과 양말은 엉망이다.

사원 내에 설치한 텐트 안에서 난로가에 쭈그리고 앉아 양말과 신발을 말렸다.

때마침 아침에 이야기 들었던 한국 스님들이 텐트로 들어왔다. 

그중 가이드 격인 젊은 스님이 난로가에 앉길래 인사를 한 후 평소 궁금했던 티베트 불교에 대해 물어봤다. 



"우선 한국의 불교를 보자면, 고려조까지 융성했던 불교가 조선조에 들면서 선종과 교종으로 통합되며 수많은 종파들이 명맥을 잃고 대부분의 고급불교들이 유실되고 맙니다. 조선조의 억불정책 때문이지요. 하지만 티베트에는 인도 후기 대승불교와 밀교의 전통이 그대로 남아 모두 같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9세기 경 인도에 이슬람정권이 들어서면서, 승려들이 박해를 피해 미얀마나 스리랑카, 혹은 히말라야 북부로 옮겨오게 되지요. 그러면서 티베트에 인도 불교의 각 종파가 그대로 유입되게 됩니다. 수많은 종파와 교리가 모두 공존하며 발전하던 티베트불교지만, 사원의 세력이 점차 강성해지자 서로 간의 세력다툼이 일어나게 됩니다. 5대 달라이 라마가 정권을 잡아 겔룩파 정권이 들어서기까지 물고 물리는 싸움이 이어지고, 정권도 이리저리로 넘나들게 되지요. 그러다가 5대 달라이라마 이후 겔룩파(황모파)가 정권을 잡아 현재에 이르게 됩니다. 권력을 잡은 종파는 세속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는 한편 교리를 함께 발전시키고, 그렇지 못한 종파들은 교리 쪽으로 더 깊이 파고들게 되고요."



스님의 강의를 듣던 중 인도 순례객들이 떠들썩한 소리와 함께 사원으로 들어섰다. 

그중 디라푹 사원에서 도움을 받았던 장족 포터가 보였다. 

이 친구도 신발을 말리러 난로가를 찾아들었고, 다시 이야기보따리를 풀었다. 


"내 고향은 이 동네가 아니야. 봄부터 가을까지는 다르첸으로 와서 순례객들의 짐꾼으로 일하고, 겨울에는 고향으로 돌아가서 쉬어"


"중국어가 유창하네?"


"군대에서 배웠어, 껄껄껄. 시골 사람들은 할 일도 마땅찮고, 입은 줄여야겠어서 군대에 많이 가. 근데 여기서 입대하면 보통 양을 치거나 말을 키우고, 가끔 티베트 고원의 길을 닦는 공사에 동원되곤 해"



문득 총보다 삽을 더 많이 드는 우리네 보병의 현실이 겹쳐 보인 건 나뿐만은 아니었을 거다. 

옆에서 듣던 교주와 해랑의 입꼬리에 걸린 미소가 증거였다. 

낄낄거리며 웃는 우리가 재미있어 보였는지, 순례객들 몇이 대화에 끼었다. 

난로에 던져 넣은 장작은 조용히 타닥거렸고, 사원의 밤도 그렇게 깊어갔다. 






5,000m 고지의 새벽은 매서웠다.

난로가 꺼지니 사원의 대청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코라를 돌기 위해 짐은 최대한 줄인 터, 사원에서 숙박할 테니 침낭도 필요 없으리라 생각해 두고 온 게 화근이었다. 

고어텍스 재킷까지 껴입고 담요를 뒤집어쓴 채 잠들었더니, 증발하지 못 한 습기가 옷 안에 그대로 남아 한기를 뼛속 깊이까지 배달했다. 

일어나니 추위도 추위지만 습기 때문에 기분 나쁘기 그지없다. 

아침을 먹어야 하는데, 사원에서 운영하는 매점 주인이 일찌감치 코라 길에 올랐다고 영업을 안 한다. 

끓인 물도 찾을 수 없어서 배낭에 넣어 온 라면을 하나 부숴 먹고, 남아있던 물 한 모금으로 목을 축인 후 다시 길을 나섰다. 




고소 증세와 허기로 얼굴이 팅팅 부었다


둘째 날은 5,600m 고지인 드롤마라 패스를 넘고 32km를 주파해야 했다. 

디라푹 사원에서부터 드롤마라 패스까지 가는 5~6km 구간은 내내 가파른 오르막길이다.

고개를 하나 넘으면 또 다른 고개가 나타났고, 이 과정이 끝없이 반복됐다. 

소모하는 에너지는 엄청난데, 먹은 게 없으니 몸이 고장 나는 게 느껴졌다. 

허기가 느껴지는 단계는 지났고, 간간히 욕지기가 치밀어 올랐다. 

납 주머니를 찬 듯한 다리는 만근이었다.

두뇌와 다리를 연결한 신경이 끊어진 듯했다.

다리는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움직이는 듯했지만, 어쨌거나 앞으로 나아가긴 했다. 

디라푹 사원을 지난 후부터 옆으로 펼쳐진 카일라스의 북면이 경이롭긴 하지만, 그 장엄한 풍경을 감상할 여유조차 없었다. 

걷는 시간보다 주저앉아 쉬는 시간이 더 길었다. 

이정표에 기대어 거칠게 숨을 내뱉었다. 

누군가 버리고 간 거울에 비춰보니 얼굴은 새하얗게 질렸고, 입술이 모조리 부르텄다. 

이대로 두고 가면 송장을 치를 것 같았는지, 코라를 돌던 장족 순례객들이 손을 내밀었다. 



"가방 나한테 맡겨요. 꼭대기까지라도 내가 들어줄게요"



몸은 이미 한계를 넘은 듯했는데, 알량한 자존심이 발동했다.

남들 다 넘는 고개를 혼자 힘으로 못 넘는다는 상황이 비참했다. 



"아뇨, 괜찮아요. 조금 쉬고 다시 가면 됩니다"



힘들게 웃어 보이며 괜찮으니 먼저 가라고 한 후 이를 악 물고 걸음을 옮겼다. 

꾸역꾸역 걷는 와중에도 코라 길을 따라 늘어선 무시무시한 규모의 타르초(*불경을 써넣은 깃발, 티베트 사람들은 타르초가 바람에 나부낄 때마다 경전을 한 번 읽은 것과 같다고 믿는다)가 눈에 들어왔다. 

신심을 담아 자신의 신체 일부(주로 머리카락이나 옷가지)를 묶어 매달은 타르초는 나름 장관이면서 동시에 기괴했다. 



드롤마라 패스 넘는 길




결국 남들은 1~2시간이면 넘는다는 드롤마라 패스를 5시간이 걸려 넘었다.

패스에서 쉬고 있던 장족 아가씨가 하나가 생긋 웃었다.

"여기가 드롤마라 패스"라며 아가씨는 허기와 고산증으로 눈이 풀려있는 내게 포도당 캡슐을 내밀었다.

살짝 미소 지은 얼굴에 후광이 비칠 정도로 고마웠다.

캡슐 하나로 채운 에너지는 미미했지만 정신을 차릴 정도는 됐다. 

이후로는 한동안 내리막이 이어졌다. 

무릎이 상할까 조심해 가며 걷다 보니 간이매점인 듯한 천막이 하나 나타났다. 

천만다행으로 매점에서 물을 구할 수 있었고, 순식간에 물 한 병을 비워냈더니 그제야 숨이 돌아왔다. 

다시 생각해도 미친 짓이었는데, 코라길에 오르면서 왜 식량을 안 챙겼는지 이유를 모르겠다.

돌이켜보면 사고 안 나고 무사히 돌아온 것만도 기적이었다. 


하산길도 역시나 쉽지는 않았다. 

코라길 중간에 퍼질러 앉아있었더니, 거대한 배낭을 메고 순례 중이던 장족 청년 하나가 자기에게 가방을 맡기고 같이 가자고 권했다.

다시 한번 자존심이 무너지는 순간이었지만, 이 친구를 그냥 보냈다간 두 번째 포인트인 주툴푹(Zutul-puk)사원에 닿기도 전에 해가 넘어가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염치불고하고 가방을 맡긴 후 다시 길을 나섰다.


"나이는 서른이고, 의사입니다. 이번이 열세 번째 카일라스 산 순례예요"


자기 배낭 위에 내 배낭까지 얹고 걷는데도 걸음이 어찌나 빠른지 맨몸으로도 따라가기 벅찼다. 

덕분에 드롤마라 패스에서 까먹은 시간을 상당히 만회할 수 있었다.


이 친구와 같이 코라를 도는 동안 계속해서 등에 포대를 맨 장족 아이들을 만났다.

도대체 무엇하는 아이들인지 궁금해서 물어보니, 코라를 돌면서 사람들이 버려놓은 쓰레기를 수거하는 학생들이란다.


"힘들지 않아?"


"안 힘들어요. 이렇게 쓰레기를 주우면서 코라를 돌면 보람도 있고, 공덕을 쌓는 일이니까요."


기껏해야 열서너 살 남짓한 아이들이 자기 덩치만 한 포대자루를 무거운 쓰레기로 가득 채워 코라를 돌고 있었다. 

비록 며칠을 씻지 못 한 건지 알아볼 수도 없을 정도로 때가 꼬질꼬질한 얼굴들이었지만, 눈은 티 없이 맑았고, 미소는 싱그러웠다.

수줍게 '힘들지 않아요'라고 말하는 목소리는 아이답지 않게 차분했고, 되려 '아저씨는 괜찮아요?'라고 묻는 배려심에 뒤통수가 얼얼했다. (절대로 아저씨란 말에 충격을 받아서 그런 게 아니다)

내 눈에는 그 아이들이 성자(聖者)로 보였다. 






티베트 여행을 하면서 시도 때도 없이 내 가슴을 때려댔던 건, 삶의 원칙이 철저하게 신앙에 맞춰진 그들의 생활방식이었다. 

적어도 겉으로 보이는 그들의 삶은 완벽하게 종교와 일치해 있었다. 

혹자는 이를 종교에 예속된 수동적이고 무의미한 삶이라고 평가할지도 모르겠다.

공상과학영화에서 보던 시대에 반쯤 발을 걸치고 살아가는 21세기에, 시대를 역행하는 그들의 삶의 자세는 일견 답답해 보일 수도 있다.

달라이 라마 역시 시대의 변화에 따라 세속과 종교의 경계를 구분하고, 티베트 사람들이 새로운 삶의 기준을 정해야 한다는 뉘앙스의 담화를 여러 차례 발표했다. 

하지만 적어도, 그것이 종교든 신념이든 자신의 삶의 원칙을 정해놓고 수도하는 자세로 살아가는 이의 신실함을 폄하할 수는 없다. 

그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관찰하면 '숭고함'이라는 단어가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그리고 그 숭고함을 마주하면, 자연스럽게 '과연 나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라고 자문할 수밖에 없다. 

어린 시절 세게 뇌리를 때렸던 충격은 여전히 가슴 안쪽에 남아있다.

그래서였을까? 

친구들이, 주변 사람들이 세월의 흐름에 순응해 살며, 소위 나이와 경력에 따른 사회적 지위와 체면을 고민할 때, 나는 다른 곳을 보고 있었던 것 같다. 

그 결과 재산도, 명예도 갖지 못했지만 스스로 만족할 만한 삶을 살아온 것 같긴 하다. 





두 번째 숙박지인 주툴푹 사원이 멀리 보일 때쯤, 갑자기 장대비가 쏟아졌다. 

이미 전날 난데없는 우박과 소나기에 우산을 날려먹은 상황이라 꼼짝없이 쏟아지는 비를 다 맞아야 했다. 

조금이라도 비를 피하고자 잰걸음으로 뛰듯이 사원에 뛰어들어갔더니, 여기가 황천인지 사원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시간은 이미 저녁 7시였고, 해가 뉘엿뉘엿 서산을 넘어가고 있었다. 

일찌감치 도착해서 휴식을 취하고 있던 스님들은 교주와 해랑이 이미 3~4시간 전에 차례로 이곳을 지났다고 알려줬다. 

순간 또 눈에 쌍심지가 켜졌다. 

길을 가다 쓰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일단 다르첸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가면 중간에 해 떨어진다고 사람들이 말렸지만, 이미 분기탱천한 지라 아무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불자는 아니지만, 코라를 돌면서 내면의 평화를 찾아보겠다던 애초의 다짐은 공염불이었다. 


다행히 사원을 벗어나자 곧 비가 그치고 해가 났다.

고소도 적응이 된 건지, 아니면 조금이나마 고도를 내려온 게 도움이 된 건지 숨이 차지도 않았다. 

다르첸까지 남은 거리는 12km 남짓이었다.

해가 넘어가면 큰일이라는 생각에 미친 듯이 걸었지만, 결국 다르첸이 얼마 안 남은 지점에서 해가 넘어갔다.

(* 베이징표준시를 적용할 경우 서부 티베트는 약 4시간의 시차가 발생한다. 즉, 표준시로 밤 9시면, 실제 체감 시간은 오후 5시 정도라는 뜻이다)



저 코너만 돌면 다르첸인데...


별 수 없이 랜턴을 켜고 산길을 걸었다.  

객기를 부릴 때의 패기는 온데간데없었고, 랜턴이 없으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깜깜한 길을 걷자니 등골이 서늘했다. 

어느 순간 저 멀리 마을의 불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긴장이 풀리고 걸음이 느려지는데 난데없이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유목민들의 개인가? 왜 저렇게 짖는 거지?'


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개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순간 본능적으로 내가 그 놈들의 영역을 침범했다는 걸 깨달았다. 

늑대 만한 크기의 티베탄 마스티프들은 해가 떠있을 때는 순한 양이지만, 달이 뜨면 야수로 변한다.



이렇게 생긴 애들이다



혹시나 싶어 길가에 널린 돌멩이들을 들어 주머니에 쑤셔 넣고 조심스레 걸음을 옮겼다.

어느 순간 개 짖는 소리가 들리지 않고 섬뜩한 느낌에 소름이 돋았다.

고개를 돌려보니 송아지만 한 개 두 마리가 내 뒤를 따라 걷고 있었다. 


최대한 놈들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조심했지만, 녀석들에게는 의미가 없었나 보다.

한 마리가 이빨을 드러내고 나에게 돌진했다.

반사적으로 집어던진 돌이 놈의 미간에 명중했고, '깨갱' 소리와 함께 놈이 나가떨어졌다.

하지만 놈들은 도망가기는커녕 독이 올라 다시 나에게 달려들었다. 

나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며 달려드는 놈을 걷어차내고, 뒤에서 덤비는 놈의 머리통을 랜턴으로 찍어 내렸다. 

놈들은 바로 다시 덤벼들지는 못 하고 내 주위를 빙빙 돌며 미친 듯이 짖어댔다.


'X됐다... 여기서 개밥 되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고, '주마등'이라는 단어가 무슨 뜻이지 알 수 있었다. 

공포에 떨고 있던 순간 갑자기 "훠이~!" 하는 소리와 함께 어디선가 한 남자가 달려왔다. 

남자를 본 개들은 꼬리를 말고 도망쳤다. 

혼이 빠져있는 나를 본 남자는 괜찮냐고 물었고, 외지 사람이 여기서 밤중에 혼자 다니는 건 정신 나간 짓이라며 나를 나무랐다.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니 저 멀리 언덕배기에 하얀 천막 하나가 보였다. 

남자는 거기서 야크를 지키고 있다가 내 비명 소리를 듣고 달려왔다 했다. 

손발을 벌벌 떨고 있는 나를 본 남자는 다르첸 입구까지 나를 데려다줬다. 


닿을 듯 닿을 듯 닿지 않는 길을 걷고 또 걸어, 겨우 숙소에 들어오니 어느새 10시 반이었다.

주툴푹 사원에서 자고 올 줄 알았다며 놀라는 교주와 해랑의 걱정스러운 목소리를 뒤로하고 그대로 침대에 쓰러져 정신을 잃었다. 




이전 15화 聖山, 카일라스로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