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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집사 김과장 Aug 01. 2022

티베트 입경

알리


어린 시절 '3X3 아이즈'라는 만화를 봤다. 

밀교와 힌두교의 전설을 여기저기 가져다 쓴 판타지였다. 

샹그릴라, 샴바라, 곤륜, 서왕모, 티베트 밀교, 포탈라궁, 웅장한 설산에 자리한 신비로운 선경은 어린 나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그곳에서는 왠지 마법 같은 일들이 벌어질 것만 같았다. 

그때부터 티베트는 나에게 가보지 않은 그리움이었다. 

고립된 세계, 미지에서 오는 기대감. 

부푼 가슴과 10년을 간직한 그리움을 안고 티베트로 향했다. 






당시 중국에서 티베트, 정확히는 '라싸'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통행증(퍼밋)'이 필요했다. 

외국인은 무조건 중국 정부가 발행하는 퍼밋을 발급받고, 운전기사와 차량, 가이드를 대절해야만 티베트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나마 다닐 수 있는 반경은 라싸-시가체 구간뿐이었다. 

이 외의 지역을 출입하다가 적발될 경우 공식적으로는 티베트 자치구에서 추방을 당하는 게 원칙이었다. 

그러나 티베트의 비경을 직접 보고 싶다는 욕망과 중국 공산당의 소수민족 정책의 부당함에 대한 본능적인 거부감의 상승작용으로 여행자들은 '밀입국'을 시도했다. 

당시 중국 공안의 대처는 그야말로 개판이어서 퍼밋의 존재를 모르는 이들도 있었고, 이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는 이도 많았다. 

지금이야 시진핑 집권 이후 소수민족의 독립 요구를 무자비하게 탄압하고 있고, 내부 소식을 알 방법도 거의 없는 상황이지만 당시만 해도 어느 정도 '느슨한' 분위기였다. 

좌우간, 핵심은 일단 라싸까지 들어가면 쫓겨나는 일은 없다는 점이었다. 

따라서 여행객들은 온라인 커뮤니티가 태동하던 당시의 한정된 정보를 바탕으로 히치하이킹을 통한 티베트 입경 루트를 검색하고 공유했다. 






티베트 입경 루트


길은 크게 세 가지였다. 


첫째, 칭짱(靑藏)공로. 

칭하이성 꺼얼무(格爾木)에서 출발해 버스를 타고 라싸까지 들어가는 길이다. 

당시만 해도 철도가 깔리기 전이었다. 

2003년 기준, 공식적으로 라싸로 들어가는 대중교통은 이 구간이 유일했다. 

버스비는 대략 180위안(당시 환율 기준 2만 3000원 정도) 정도로 압도적으로 저렴한 비용이었다. 

중간에 해발 고도 5600m의 탕구라 패스를 넘게 되는데, 이 구간에서 고소 증세로 숨이 꼴딱 넘어간다는 경험담을 종종 들었다. 

그나마 편한 길이라 대다수 여행객들이 이 루트를 통했다. 

어쨌든 대중교통으로 한 번에 이동할 수 있는 유일한 루트였으니까. 

퍼밋 검사는 복불복이었는데, 라싸에서 만난 여행객들 중에는 중간 검문지에서 퍼밋 검사에 걸려서 꺼얼무로 추방당했다가 다시 들어온 사람, 그냥 통과한 사람이 혼재했다. 

공안이 생각나면 검사하고, 귀찮으면 패스했던 것으로 보인다. 


둘째, 동부 티베트. 

쓰촨성 청두에서 랜드크루저를 대절해 라싸까지 치고 들어가는 루트다. 

나는 나중에 티베트에서 나올 때 이 구간을 택했다. 

청두-라싸를 잇는 버스 노선도 있고, 티베트 동부 지역의 곳곳으로 향하는 버스 노선이 제법 많아서 계획만 잘 짜면 버스 환승을 통해 라싸까지 진입이 가능한 루트였다. 

그러나 검문이 삼엄해 버스를 타고 들어가는 건 거의 불가능한 구간이었다. 

물론 이 구간을 뚫고 들어온 여행객들도 없진 않았지만, 그야말로 천운이었을 뿐, 대다수는 꼼꼼한 신분증 검사에서 걸러지곤 했다. 

동부지역은 구간을 끊어가며 시외버스로 이동하는 게 가능하지만, 잊을만하면 공안이 버스에 올라와 통행증을 검사했다. 

티베트를 빠져나갈 때 경험했다. 

나야 거기서 걸려도 어차피 청두로 추방인데, 내가 가려던 목적지가 청두였으니 검문이 의미 없는 상황이었다. 

사막 같은 풍경을 보여주는 서부와 달리 동부는 풍부한 강수량 덕분에 고지대임에도 삼림이 무성하고 계곡이 깊었다. 

신서유기를 통해 더 유명해진 리장, 호도협도 이 끝자락에 달렸다. 

계곡이 깊은 만큼 언제 차가 절벽으로 굴러 떨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길이 험했다. 

이 지역을 가려면 퍼밋을 발급받고 랜드크루저를 대절해야 했다. 

2003년 기준으로 4박 5일 여행하는데 우리 돈 200~300만 원 정도가 들었으니, 가난한 배낭여행자들은 언감생심이었다. 

그래서 이 구간을 통해 라싸로 진입하는 이는 거의 없었다. 


마지막은 서부 티베트.

카슈가르에서 카일리크(예청)를 통해 서부의 관문도시 '알리'로 진입한다. 

이 구간은 알리를 통해 서부 티베트에 물자를 대는 화물 트럭이 줄을 잇는 지역이었다. 

소수의 여행자들이 카일리크에서 화물 트럭을 잡아타고 알리로 향했다. 

서부 티베트는 자연환경이 황량하고 인구밀도가 희박해 치안이 썩 좋지 않았다. 

역설적으로 이게 여행객들에게는 유리했는데, 퍼밋 검사 역시 그만큼 느슨했기 때문이다. 

일단 알리까지 들어가는 데 성공하면 거기서는 내쫓으려 해도 내쫓을 방법이 없으니, '임시 허가증'을 끊어줬다. 

다만 문제는 하루 종일 달려야 10호 남짓한 가구가 있는 마을을 만날까 말까 한 길을 내리 사나흘을 달려야 한다는 점이었다. 

당연히 중간에 식당이나 가게 같은 건 있을 리가 없으니, 알리에 도착할 때까지 필요한 식료품을 바리바리 싸들고 가야 했다. 


나는 서부 티베트 루트를 택했다.

티베트 여정을 함께 했던 교주는 나와 동행하기 1년 전 이미 이 루트를 통해 티베트에 들어갔던 적이 있었는데, 그때 경험을 살려 내 길잡이가 되어 줬다. 








 

알리로 들어가는 트럭을 수배하기 위해 카슈가르를 떠나 카일리크로 향했다. 

카일리크까지 가는 버스는 생각보다 많았다. 

잠시 시내를 달리고 나니 다시 타클라마칸 사막이 펼쳐졌다. 

바람이 제법 부는 날이었고, 메마른 황토가 날아 올랐다. 창밖은 온통 누런색이었다. 

누군가 담배를 피워 물었고, 누군가 창문을 열었다. 

모래먼지가 들이쳤다. 

모래먼지가 싫은 사람과 담배연기가 싫은 사람 간의 신경전이 벌어졌다. 

결국 담배를 문 사람이 이겼다. 

내가 졌다. 



카일리크는 여행자에게 딱히 매력적일 게 없는 삭막한 마을이었다. 

버스에서 내리니 어느새 날이 저물고 있었지만 곧장 트럭 집결소인 '아바'로 향했다. 

굳이 이 재미없는 마을에 머물 생각은 없었다. 

트럭만 구할 수 있으면 다음날 새벽이라도 뜰 생각이었다. 

이미 이 루트를 경험해본 교주를 따라 트럭이 잔뜩 모여있는 공터로 갔다.

한담을 나누는 기사들을 붙잡고 "알리까지 태워줄 수 있나?" 물어봤지만 이상하게 묻는 트럭마다 거절이다.

교주는 '어차피 가는 길, 나름 쏠쏠한 용돈벌이인 터라 굳이 거절할 이유가 없는데...'라며 의아해했다. 

그렇게 허탕을 치던 도중 한 기사가 놀라운 이야기를 해줬다.



"외국인이라도 통행증만 있으면 버스 타고 알리 갈 수 있어. 파출소 가면 30위안에 끊어줄 걸?"



당나귀 마차(*놀랍게도 실제 대중교통 수단이었다)를 잡아타고 파출소로 향했다. 

당직을 서던 순경이 사실이라며 확인해줬다. 



"하지만 여기서는 발급이 안 되고 카일리크 공안국가면 금방 처리할 수 있을 거야."



험한 여정을 이미 들어 알고 있기에 각오를 단단히 하고 갔는데, 일이 너무 수월하게 풀렸다. 

교주와 해랑도 희희낙낙이다. 

청소따위 언제 한 건지 알아보기도 어려울 듯한 호텔 방에서 맥주 한 병씩을 뜯고 기분좋게 잠이 들었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버스를 타고 카일리크로 돌아가 공안국을 찾았다. 



"외국인에게는 알리 들어가는 통행증을 발급할 수 없다."



공안국의 변경 통행증 발급 담당자는 '뭐 이런 정신나간 것들이 다 있나'하는 눈초리로 우리를 노려봤다. 

불길한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다시 아바로 돌아와 트럭 집결소로 갔다. 

거기서 만난 기사 한 사람이 "검문은 '변경순찰대' 소관이고, 공안과는 상관없다"라고 귀띔했다. 


다시 당나귀 마차를 두 번 갈아타고 카일리크의 변경순찰대로 갔더니, 과연 "외국인은 여권만 있으면 통행증 없이 들어갈 수 있다"는 대답을 한다. 

지난한 뺑뺑이에 지쳐갔지만, 담당 공무원의 대답을 들으니 마음이 놓인다.

아바로 돌아와 트럭을 수소문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한 트럭 기사가 자기는 믿을 수 없다며, 함께 변경순찰대로 가보잔다. 

반나절 사이에만 카일리크-아바 구간을 몇 번씩 왕복했더니 짜증이 났다. 

그래도 이 상황만 종료되면 꿈에 그리던 서부티벳 입성이란 생각에 눈 딱 감고 "OK!" 사인을 냈다. 






다시 간 변경순찰대에는 담당자가 바뀌어 있었다. 

이번엔 대답이 달랐다. 

자기들 소관하에선 여권만 있으면 통과지만, 확실히 하려면 공안국을 가보란다. 

불길한 예감은 기가막히게 맞는다. 

공안국에서 나온 대답은 역시나 '不可'. 

애당초 외국인이 알리에 들어가려면 공안국의 퍼밋을 받아야 하는 게 맞았다. 

우리와 만났던 촌사람들은 각자 확실하지 않은 정보를 자신있게 주장했을 따름이었다. 

결국 애초 생각대로 트럭을 히치하이킹하는 수밖에 없다.


정작 문제는 아바에 돌아와서 일어났다. 

트럭 집결소로 가 맥주 한 병을 뜯고 앉아있는데, 공안인 듯한 사람 하나가 오토바이를 타고 공터에 들어섰다. 우리 옆에 오토바이를 세운 남자는 우리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입을 열었다.



"트럭타고 알리 들어갈 생각 마쇼. 그리고 여기 기사들! 이 사람들 태우면 뒷감당은 알아서들 해야 할 거요!"



반나절 사이에 세 번이나 공안국과 변경순찰대를 쑤시고 다녔으니 수상하게 생각하는 게 당연했다. 

아바 전역에 얼굴이 팔렸다. 

티벳으로 들어가지 못하면 왔던 길을 그대로 되돌아가 우루무치로 나가던지, 아니면 타클라마칸 사막 남쪽의 말도 안 되는 길을 타고 칭하이성으로 빠져나가야 했다. 

그보다 여행의 핵심이었던 티벳 일정이 날아가게 되는 게 뼈아팠다.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기울고 있었다. 나, 교주, 해랑은 말이 없었다. 문득 해랑이 입을 열었다. 



"중국인이라고 속이고 탑시다." 



장발에 노란머리의 교주, 봉두난발을 한 나는 그 좁은 촌동네에서 도저히 못 알아볼 수가 없는 외모라 불가능했다. 

하지만 철저하게 현지화한 해랑은 누가봐도 중국 촌사람이었다. 

해랑은 혼자 일어서 나가더니 정말로 한 시간만에 트럭을 한대 수배해서 돌아왔다. 


트럭을 잡아타고 떠나는 해랑. 배낭을 쌀푸대에 넣는 것 만으로 위장 완성. 



교주와 나는 고민에 빠졌다.

현실적인 대안은 칭하이성으로 나가 꺼얼무 루트를 타는 것이었다. 

하지만 꺼얼무까지는 이동에만 2박 3일 이상이 걸릴 터였다. 

시간도 시간이지만 이미 지나왔던 길을 그대로 돌아가는 게 싫었다.

그렇다고 타클라마칸 사막 아래쪽 천산남로를 택하자니, 호탄을 제외하고는 가고 싶은 곳도 없었다.


문득, 전날 저녁에 잠깐 만났던 헤이처(黑車, 불법 택시) 기사 장(張) 씨가 생각이 났다.

그는 자기를 전직 공안으로 소개했다. 

공안 생활이 싫어서 퇴직한 후, 10인승 콘보이로 알리를 오가며 승객을 실어나른다고 했다. 

공안국에 줄이 있으니 자기와 함께 가면 통행증 검사도 필요없다며, 두당 1500위안(약 23만원)을 요구했다. 

트럭을 히치할 경우 보통 150위안 정도가 나오던 시기였다.

해랑은 180위안에 잡았다.

10배에 달하는 돈을 주고 갈 생각은 없었기에 대꾸도 안 했던 터였다. 

그러나 상황은 바뀌었고, 녹아내릴 시간과 비용을 생각하면 차라리 장 씨의 차를 타는 게 나았다. 

교주와 나는 다시 그를 찾아가 흥정을 시도했다. 


협상은 결렬됐다. 

장 씨는 1500위안에서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거기까지 한 번 움직이는 데 들어가는 기본 비용이 있다. 너희 둘만 타고 들어갈 상황이니, 두 사람이 부담해야지."



라는 게 그의 논리였다. 



"그러면 사람만 더 모으면 되는 거지?"


장 씨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그렇다고 답했다.

해가 지고 있었다. 

일단 철수하고 다음 날 다시 알아보기로 했다. 

아바에서는 이미 우리를 모르는 사람이 없으므로 배낭을 싸매고 일부러 사람들이 많이 모여있는 주차장으로 와서 "카슈가르로 돌아간다"라고 거짓 정보를 흘린 후 카일리크고 들어가 방을 잡았다. 





하루 종일 알리 갈 사람을 수소문해봤지만 소득이 없다. 

해랑은 정오경에 트럭을 타고 먼저 떠나버렸다. 

교주와 나, 둘만 간다면 1인당 1,100위안은 내야 된다는 기사를 어르고 달랬더니, 마지막으로 아바를 한 번만 더 돌며 사람을 모아보겠다고 한다. 

한 시간 정도 후에 돌아온 장 씨는 희색이 만연했다. 

알리에 가려는 중국 부자 4명이 자기 차를 5,000위안에 빌렸단다. 

장 씨는 그 사람들과 이야기가 잘 되면 우리도 싼 값에 끼어 갈 수 있을 거라며 호탕하게 웃었다. 

역시 죽으란 법은 없다. 

다시 가격 협상을 해서 1인당 900위안에 합의를 봤다.

비록 200위안에 히치 하는 트럭이나 꺼얼무에서 들어가는 300~500위안의 비용보다는 비싸지만, 이제는 '얼마나 싸게 가느냐'가 아니라 '알리에 갈 수 있느냐'가 관건이었다. 



출발 시간을 기다리며 어슬렁거리며 동네를 돌아다니다가 주차장으로 돌아오니, 장 씨 얼굴이 벌레 씹은 모양새다. 

중국인들이 갑자기 안 가겠다고 말을 바꿨단다. 

징그럽게 꼬인다. 

정말 서부 티베트는 인연이 아닌 듯하여 낙심한 찰나, 장 씨가 비장한 얼굴로 외쳤다. 


"좋아! 이번엔 돈 못 벌어도 좋으니까 그냥 가자!"


순간 장 씨 뒤쪽으로 천사들이 강림하며 '알렐루야'를 소리 높여 합창하는 환상이 보였다. 






장 씨의 차를 타고 달렸던 서부 티베트의 도....로?



일행은 총 6명이었다.

교주와 나, 기사인 장 씨, 기사의 여자친구라는 새침한 아가씨, 알리에서 일하는 남편 만나러 가는 새댁. 

마지막으로 무서운 얼굴에 무서운 화장을 하고 무서운 목소리로 무서운 말들을 마구 뱉어대는 여자가 한 명 있었다.

이 무서운 여자는 흡사 키스(KISS)의 베이시스트 진 시몬스를 보는 듯했다. 

봉두난발에 시대를 앞서간 스모키 화장을 했고, 목소리는 로니 제임스 디오의 재림이었다. 

시몬스는 무서운 기세로 혼잣말을 내뱉으며 누군가를 욕했다. 

새댁과 기사의 여자친구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와중에도 그녀의 날 선 목소리에 이따금 대답을 해주곤 했다.

중국사람들이 낯선 이들과 대화에 거리낌이 없다는 건 알았지만, 이들의 내공은 보통이 아니었다.  

나중 이야기지만 시몬스는 다들 고산병에 쓰러져 사경을 헤매는 와중에도 홀로 에너지가 충만해 미친 듯이 샤우팅 이어가며 내 머리를 쪼개 놓았다. 



대충 이렇게 생겼다



오후 8시가 되어 드디어 차가 출발했다. 

짐칸이 따로 없어 비좁은 차량의 복도에다가 짐을 쌓으니, 뒷자리에 앉은 사람은 밖으로 나가지도 못한다. 

출발에 앞서 좌석을 점검하던 장 씨가 한 마디 한다. 


"원래 이 차에는 10명을 꽉꽉 채워야 되는데, 이번엔 7명밖에 못 태우니 차가 불쌍하다."


나도 모르게 "지랄한다" 소리가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아바를 떠난 밴은 10분 만에 타클라마칸 사막에 들어섰다. 

강한 모래바람이 시야를 뿌옇게 흐려놓는 동시에 잘 닦인 아스팔트를 쓸어 그림을 그려대고 있었다. 




한 시간 정도 달렸을까?? 

어느새 사막은 끝나고 순식간에 산길로 접어들었다. 

장 씨는 "이제부터 계속 올라간다"며 씩 웃어 보였다. 

파미르 고원의 끝자락, 톈샨산맥을 타고 히말라야 산맥으로 진입하는 험로에 진입한 것이다. 

풀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황량한 황무지에 들쭉날쭉한 돌산이 이어졌다. 

도로라고 부를 수도 없는 시골길 위를 달리는 밴은 쉴 새 없이 덜컹거렸다. 

해가 떨어져 어두운 와중에 덜컹거리는 차 안에 쪼그리고 앉아있자니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어느 정도 산을 오른 후 창밖을 내다보니, 반대편 길로 내려가는 트럭들의 헤드라이트가 긴 줄을 이루고 있다. 

장 씨는 알리와 카일리크를 잇는 관문이 열흘에 한 번 열린다고 했다. 

검문 때문이라고 했는데, 공산당이 주장하는 '하나의 중국' 안에서 외국 국경 넘는 경험을 하게 될 줄은 몰랐다. 

덕분에 물류 트럭들은 저렇게 날짜를 맞춰 집결했다가 한 번에 대규모로 이동한다.

꾸불텅 거리는 길의 진동에 시야가 흐려질 때쯤, 헤드라이트 행렬이 부옇게 번지며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밴은 쉴 새 없이 덜컹댔다. 

잠이 든 건지 깬 건지 구분을 못하는 상태가 지루하게 이어졌다. 

새벽 3시 정도쯤 되었을까? 갑자기 장 씨가 사람들을 깨웠다.

어느새 첫 번째 검문소인 쿠디(Kudi)에 닿은 것이다. 



사전에 커뮤니티를 통해 얻은 정보로는 검문소에 닿기 전 차에서 내려 도보로 검문소를 우회, 통과한 후 다시 트럭을 잡아타거나, 짐칸 구석에 숨어 검문소를 통과하는 방식이 일반적이었다. 

처음에는 이해가 안 되는 상황이었으나, 직접 그 길을 지나 보니 이해가 됐다.

하루에도 몇 번씩 검문소를 지났지만 대부분은 경비도 없었다. 

검문소에 늘어져있던 군인이 기사와 눈인사만 하고 통과시킨 경우도 있었다.

간혹 차를 세우고 기사와 잡담을 하거나, 검문하는 시늉을 하는 곳도 있었지만, 대체로 '당나라 군대'의 전형을 볼 수 있었다. 



쿠디는 조금 달랐다. 

차에서 내려 검문소를 우회해 갈 수도 없는 협로인 데다가, 검문도 제법 엄격했다.

차량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내려 신상 기록을 남겨야 했다.

그 사이 공안 하나가 차 안을 둘러보고 뒤에 선 트럭은 짐칸까지 꼼꼼하게 검사했다. 

그걸 보니 카일리크에서 트럭 기사들이 외국인을 기피했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나는 장 씨가 있으니 당당하게(?) 여권을 들고 검문소 안으로 들어갔다.

검문소 경비를 서던 군인이 나와 교주를 보더니 장 씨에게 짜증을 냈다. 

하지만 장 씨가 웃으며 몇 마디 하자 이내 잠잠해졌다. 

결국 짜고 치는 고스톱이다. 

형식적인 검문이 끝나고 밴은 또다시 어두운 산길을 달렸다. 



'저 양반은 밤새 운전할 생각인가? 잠은 어디서 자려는 거지?'



하는 생각이 이어지던 찰나, 장 씨가 차를 세웠다.



"잠깐 쉬었다 가자. 힘들어서 안 되겠어."



노숙이었다. 

차 안에서 쪼그린 채 새우잠을 청했다. 

황량한 고원의 사막에는 벌레 소리조차도 들리지 않았다.

휘영청 밝은 달은 시리게 흰 빛을 뿜었다. 

그림자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고원은 달빛을 받아 대낮처럼 밝았다. 

아련하게 멀리 떨어진 산등성이의 곡선이 눈을 홀렸다.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 순간, 갑자기 시동 거는 소리가 잠을 깨웠다. 

시계를 보니 세 시간쯤 잔 듯했다. 

굽어있는 허리를 펼 새도 없이 장 씨는 곧바로 차를 몰았다. 

어느새 동이 텄고, 차창 밖으로는 흙먼지가 날아올랐다.

해발고도 3000m를 넘었지만 고산증세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배고픔과 불편한 자리 때문에 온몸이 근질거렸다. 






처음 티베트 하늘을 봤을 때의 감동은 지금도 생생하다. 비록 호숫가는 쓰레기장이었지만...



네댓 시간을 더 달려 도착한 첫 번째 휴식처는 마자르(Mazar)라는 곳이었다. 

마을이라고도 할 수 없는, 구멍가게를 겸한 식당 두어 개와 타이어 수리하는 곳, 초대소 한 군데가 전부인 작은 기지 같은 곳이었다. 

지난밤 사이 터져나간 타이어를 고치고 차를 정비하느라 한 동안 마자르에 머물러야 했다.

장 씨는 이곳에서 밥을 먹고 간다고 하더니, 차량 옆에 붙어 엔지니어와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아직은 신장 지역이라 그런지 사람들의 행색은 위구르 족 전통복장이었다. 

동네를 둘러싼 산은 척박했고, 흑갈색 그림자가 드리워 을씨년스러웠다.

하늘을 가늘게 가로지르는 까마귀가 간간히 적막함을 깨뜨렸다.

하지만 그놈이 땅에 내려앉았을 때, 적막함은 공포로 바뀌었다. 

내가 알던 까마귀는 참새였다. 

놈들의 날개 길이는 내 키에 필적했다. 

이건 독수리인지 까마귀인지 당최 구분이 되지 않았다. 



장 씨와 엔지니어의 수다 때문인지, 기술의 문제인지 알 수 없으나 정비 시간은 점점 길어졌다. 

차에서 육포로 대충 때운 끼니가 부실해 식당을 찾았다. 

얼핏 들여다본 메뉴판에 적힌 음식값은 산 아래의 세 배 정도였다. 

수중에 있던 현금은 200위안. 분실 위험 때문에 현금은 가능한 쓸 만큼만 지니고 있었다. 

필요한 돈은 라싸에 들어가서 찾을 생각이었다. 

서부 티베트의 교통 상황과 불확실한 일정(*히치하이크로 다녀야 했다) 때문에 무조건 돈을 아껴야 했다. 

당시 환율로도 불과 몇 천 원에 불과한 돈이었지만, 평소 지출의 두세 배가 한 끼 식사에 날아간다는 생각에 등골이 서늘했다. 

(* 이것이 서부 티베트에서의 결정적인 판단 착오였다. 아무리 비싸도 배를 채워둬야 체력이 보존이 될 텐데, 젊은 혈기만 믿고 영양섭취를 소홀하게 했더니 고소 적응이 되질 않았다. 라싸에 도착하기까지 약 보름간 길에서 시간을 보냈는데, 그 사이 13kg 가까이 체중이 줄면서 소위 말하는 '골병'이 들었다)



음식 하나, 밥 두 개를 시켜서 교주와 함께 먹고 있는데, 시몬스가 들어왔다. 

우리를 본 그녀는 빙그레 웃더니, 묻지도 않고 우리 식탁에 앉아 음식을 주문했다. 

혼자서 음식 세 개를 시킨 그녀는 신들린 듯한 젓가락질을 보여주며 특유의 샤우팅을 들려줬다.

놀랍게도 음식은 튀지 않았는데, 덕분에 그녀와 대화가 가능했다. 

이야기가 오가는 와중에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됐다. 

진 시몬스는 장 씨의 전 애인이고, 알리에 살고 있었다. 

밥을 먹다가 그대로 얼어붙었다. 

나와 교주는 장 씨와 애인, 그리고 전 애인이 동행하는 차에 올라탄 것이었다. 

막장 드라마를 현실에서 보는 느낌이랄까?

스물다섯 살의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하지만 일행은 멘탈이 터진 나와는 다른 세상에 있는 듯했다.

시몬스와 장 씨의 애인은 차를 수리하는 동안 둘이 마주 앉아 깔깔거리며 웃고 떠들었다. 

그런 두 사람을 보는 장 씨는 사람 좋은 웃음을 짓고 있었다. 






수리를 마친 밴은 다시 덜컹거리는 산길에 올랐다.

몇 시간을 더 달리니 어느 순간 머리가 빠개질 듯 아파오고 숨쉬기가 힘들었다. 

가슴을 쥐어짜는 듯 답답했고, 수시로 욕지기가 치밀어 올랐다. 

고산증이었다. 

주위를 보니 대부분 자유분방하게 널브러져서 신음을 흘리는 와중에, 시몬스만 멀쩡해서 목청껏 떠들어대고 있었다. 



'저 입을 재갈로 틀어막아 버리고 싶다.'



시몬스가 소리 지를 때마다 뒤통수 어디쯤에서 종소리가 들렸다. 






4,000m 고지를 넘다가 타이어가 터졌다. 

수리를 하려고 차를 길가에 댔다.

바람을 쐬기 위해 짐들을 타 넘어 차 문을 열고 내리는 데, 그 잠깐 사이에 숨이 턱턱 막혔다. 

차에서 내리니 사방에서 가쁜 숨소리가 들려온다. 

주위에는 그림 같은 산들이 둘러서 있지만 느낄 여유가 없다.

손가락 하나만 까딱해도 토할 듯했다. 

그 와중에 장 씨는 수리를 마쳤고 사람들은 시체처럼 차에 올랐다. 



저녁 무렵이 되어 차는 '악사이 친' 지역에 진입했다. 

티베트 고원에 있는 인도-중국 국경 분쟁 지역 두 군데 중 한 곳이다. 

중국은 카슈가르 시 카일리크 현 부속으로 주장하고, 인도는 라다크 연방 직할지로 주장한다. 

20세기 초 영국은 청조 말엽의 혼란을 틈타 식민지였던 인도 북부에 이른바 '맥마흔 라인'을 선포하고 이 지역을 편입했다. 

이후 1950년 중화인민공화국군이 티베트를 강제 편입하면서 맥마흔 라인을 무효로 선포, 이 지역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며 초소를 세우고 도로를 까는 등 실질적인 점유권 행사에 나섰다. 

당연히 인도 측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고, 초소를 증설하고 병력을 증강하는 등 맞대응했다. 

일촉즉발의 상황이 이어지던 1962년, 중국의 공격으로 결국 전쟁이 벌어졌다.  

1만 2000명의 인도군과 8만 명의 중국군이 붙은 이 전쟁은 중국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났고, 중국이 실질적인 지배력을 펼치게 된다.

그러나 인도 측은 여전히 중국이 이 지역을 불법 점유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경비대를 파견하고 있다. 

지난 2020년 양국 군대가 '짱돌'과 몽둥이로 치고받고 싸워 수십 명의 사상자를 낸 '갈완 계곡'이 바로 이 지역에 있다. 


대충 저렇게 진입

 


마자르를 지난 후부터는 길이 제법 잘 닦여 있어 차가 있는 대로 속력을 내면서 달렸다. 

어느 순간 장 씨가 갑자기 차를 세웠다. 



"여기가 1962년에 중국과 인도가 한판 붙은 곳이야. 아마 너희가 여기 와본 첫 번째 한국인일걸?"



장 씨가 가리킨 곳에는 중국군의 기지였던 건물의 폐허가 보였다. 

건물의 반대쪽에는 중국 측에서 세운 위령비가 솟아있었다. 


중-인 국경분쟁 전사자 위령비




인간은 참으로 대단한 존재다.

두어 발자국만 내딛으면 심장이 터질 것 같은 이곳에서 무슨 수로 전쟁을 할 수 있었을까?

다시 핑핑 도는 머리와 메스꺼운 속을 달래며 차에 올랐다. 

오후 11시경,  어느 포인트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 곳에서 차가 멈췄다. 


"자고 간다"


라는 장 씨의 말에 마을에 하나밖에 없는 여관으로 기어들어갔다. 

퀴퀴한 냄새가 나는 철제 침대에 쓰러져 쿵쾅거리는 심장소리를 자장가 삼아 억지로 잠을 청했다.     








새벽 5시에 일어나 차가 출발하길 기다렸다. 

장 씨는 분명 방으로 기어들어가는 내 뒤통수를 향해 "5시에 출발할 거야"라고 했건만, 로비에는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요의가 느껴져 밖으로 나갔다. 

화장실 따위는 없었고, 사방의 노지가 화장실이었다. 

건물이 무너진 폐허에 남은 담벼락 뒤로 돌아가니 지뢰밭이다. 

방법이 없다. 고개를 쳐든 채 눈을 질끈 감고 깊게 숨을 들이쉰 후 눈을 떴다.

순간 나도 모르게 '컥'하고 숨 막힌 비명을 내뱉었다.  

하늘에 별을 한 바가지 뿌려놓은 듯했다.

별이 너무 많아 하늘이 온통 우윳빛이었다. 

똥밭에 우두커니 서서 하염없이 하늘을 바라봤다. 

어린 시절 봤던 매직 아이를 보듯, 갑자기 현기증이 났다. 

말도 안 되는 하늘이었다. 


5시 반이 되니 사람들이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어둠 속을 달리는 차에서 몸은 점점 늘어져갔다. 

머리가 아프다고 툴툴거리던 장 씨는 뜬금없이 VCD를 풀 볼륨으로 틀었다. 

시몬스는 그 노래에 맞춰 노래인지 비명인지 모를 소리를 고래고래 외쳐댔다. 

장엄한 티베트의 하늘에 감동했다가, 고산증으로 인한 두통에 시달리다가, 시몬스의 사자후를 듣고 있자니 천국에서 지옥으로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정오쯤 되어 차는 숨지(Sumzhi)라는 곳에 도착했다. 

가이드북에는 짧게 '검문소'라고만 나와있었다. 

장 씨는 이곳에서 주유한 후 점심을 먹고 출발한다 했다. 

생각해보니 이 허허벌판에 식당이 있다는 게 이상했다.

도대체 누가 여기까지 밥을 먹으러 온다는 말인가.


대충 끼니를 때우고 식당 밖으로 나와 걸었다. 

진통제도 너무 자주 먹으면 내성이 생긴대서 참았는데, 이 때는 약 없이는 버틸 수 없는 지경이었다. 

게보린 한 알이 마치 무협지에 나오는 비전의 영약인 듯 두통을 잠재웠다.

비록 미봉책이었지만 숨을 돌리고 체력을 회복할 시간은 벌었다. 

그제야 마을(이라고 해도 건물 다섯 채가 전부였다) 뒤편으로 보이는 설산은 그림인양 아름다웠다. 





숨지를 떠나 다음 포인트인 도르마(Dormar)까지 가는 길은 환상적이었다.  

끝없이 뻗은 설산 아래 작은 호수들이 끊어졌다 나타나길 반복했다. 

하늘은 눈이 시리도록 푸르렀고, 그 아래 나지막한 구릉들은 "내가 생긴 건 이래도 정수리가 해발 4000m를 찌르고 있다"라고 웅변하듯 구름을 덮어쓰고 있었다. 

산 중턱에는 야크들이 풀을 뜯고 있고, 티베트 영양이 차 바로 옆을 지나쳐 달렸다. 



풍경에 취해, 두통에 지쳐 넋을 놓고 창밖만 쳐다보고 있는데 갑자기 차가 섰다. 

고산증과 불편한 자리에 계속 짜증 내는 여자친구를 달래주기 위해 장 씨가 차에서 내렸다. 

장 씨는 갑자기 슬리퍼를 벗어던지더니 황무지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는 마못을 잡으려 들었다. 

본인 스스로도 고산증 때문에 헐떡이며 운전하던 사람이 무모하기 짝이 없다. 

아니나 다를까 몇 발자국 못 가 가슴을 부여잡더니 그대로 쓰러졌다. 


하마터면 우리의 발을 묶어버릴 뻔 한 문제의 쥐새끼


기절한 장 씨. 어이가 없다

   




한동안 숨을 몰아쉬던 장 씨는 도저히 안 되겠다고 판단했는지, 교주에게 핸들을 맡겼다.



"나 장롱 면허인데?"


라며 황당해하는 교주에게 장 씨는 염려 말라며 씩 웃었다.



"걱정 마, 여기선 네가 죽자고 밟아도 들이받을 나무도 없고, 떨어져 죽으려고 해도 떨어질 계곡도 없어."



설득력이 있었다. 

교주는 처음에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차는 비실거리며 힘들게 나아갔고, 승객들은 놀이공원 코끼리 열차에 탄 기분을 느꼈다.  

10분쯤 지나 운전이 익숙해진 교주가 모는 차는 제법 자동차같이 달리기 시작했다. 

장 씨는 1시간가량 죽은 듯이 쓰러져있다가 일어났고, 차는 다시 질주했다. 

긴장된 시간을 지나서인지 승객들의 컨디션은 엉망이었다. 

모두가 미간을 찡그리고 고개를 처박고 있는 와중에 시몬스만이 여전히 샤우팅을 이어갔다.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장 씨는 밤 9시가 돼서야 '루톡'이라는 곳에 차를 세웠다. 

팔공초(Palgon-tso)라는 호숫가에 자리한 마을로 검문소가 하나 있었으나, 군인들은 뭔가를 만들고 있을 뿐 통과하는 차량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장 씨가 손을 한번 가볍게 흔들어주는 걸로 끝. 무사통과했다. 



루톡에서 저녁을 먹은 후 차는 다시 출발했고, 장 씨는 새벽 2시 전에는 알리에 도착한다며 속도를 올릴 예정이라고 했다. 

나나 교주나 몸 상태는 이미 한계였다. 

기절하듯 잠에 빠졌다가 "곧 도착한다"는 장 씨의 말에 눈을 떴다. 

온몸이 푸들푸들 떨리고 경련이 일었다. 

아무 생각도 할 수 없고, 단지 빨리 차에서 내리고 싶다는 생각만이 머리를 채우고 있었다.

알리 진입로에 있는 마지막 검문소는 장 씨의 전화 한 통으로 검문도 받지 않고 통과했다. 

드디어 알리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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