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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집사 김과장 Jul 01. 2022

앵벌이

이닝 伊宁, 쿠처 库车


천막을 뚫고 들어온 아침햇살에 눈을 떴다. 

사림호를 떠나 쿠처로 향한다.

쿠처는 타클라마칸 사막을 가로지르는 실크로드 중 천산북로 중심에 자리한 교통의 요지다. 

북으로는 카자흐스탄과 통하고, 남으로는 사막을 가로질러 허톈(和田, 호탄)으로 향한다. 

동서로는 투루판과 카스(喀什, 카슈가르)를 잇는다. 

사림호에서 쿠처까지 한번에 가는 교통편이 없기에 먼저 이닝으로 가서 하루 묵고, 다시 쿠처로 향하는 버스를 탄다. 



본격 지루해 죽는 루트




왕정이 챙겨준 쟁반만 한 난으로 아침을 때우고 이닝으로 가는 버스를 잡기 위해 길을 나섰다. 

사림호에 버스터미널 따위는 없었지만, 우루무치에서 이닝으로 향하는 버스가 하루에 여러 대 지나다녔다.

호숫가를 따라 달리는 길이 외길이라, 이 길가에서 시간을 맞춰 기다리다가 버스를 히치하이크해서 이닝으로 나간 뒤 다시 진로를 정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당시에는 지역에 따라 시외버스라도 이런 식으로 중간에 잡아탈 수 있었다. 

버스비는 기사가 적당히 챙기는 듯했다. 


내 몰골은 몽골 초원 깊숙한 곳에서 갓 걸어 나온 듯했지만, 왕정네 가족들이 보기엔 영 미덥지 않았나 보다. 

왕정과 매형이 차도까지 따라 나와서 차를 잡아줬다. 

차에 오르기 전 왕정이 신신당부를 했다. 


"이닝 가는 중간에 차를 한 번 갈아타야 하는데, 이 차 기사한테 20元만 주면 갈아타는 차는 차비 줄 필요 없어. 자기들이 알아서 나눠가질 거야. 기사 양반, 이 친구한테 사기 치지 말아요!"


우루무치에서 마부들에게 호되게 당한 기억이 채 가시기 전이었다. 

왕정이 보여준 친절에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졌다. 



이닝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두어 시간 덜컹이는 길을 타고 달리니 어느새 도심으로 들어섰다. 

먼저 매표소에 들러 다음날 쿠처로 가는 버스표를 수배했다. 

쿠처까지는 18시간 걸리는 좌석버스 밖에 없다. 

딱딱한 좌석에 앉아 오프로드를 달려야 했다. 

앞이 노래지는 기분이었지만 일단 표를 끊었다. 


호텔에 들어가 그간 못한 빨래를 해결하고 샤워까지 하고 나니 정신이 들었다. 

사림호에 있는 이틀 동안 양치는커녕 세수도 한번 못 했더니 날아갈 듯한 기분이었다. 

저녁을 먹으러 나가본 시내는 삭막한 중국 도시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문득 사림호의 아름다운 하늘이 그리워졌다. 

날이 어둑해지자 호텔 앞 거리에 노점이 가득 들어섰다. 

번잡하지 않지만 활기찼다. 

맥주가 고파 거리로 나섰다. 

적당한 자리에 주저앉아 맥주와 양꼬치를 시켰다. 

혼자 마시는 술이라 그런지 금세 취기가 올랐다. 

맥주 한 병이 거의 비어갈 때쯤 좌판 사이를 헤집고 다니는 앵벌이 아이 하나가 눈에 띄었다. 

맥주를 홀짝거리며 지켜봤다. 

중국 사람 하나가 그 아이를 붙들고 한참을 놀려 먹더니 꺼지라며 낄낄댔다. 

나도 모르게 눈썹이 꿈틀 했다. 

아이는 분이 뻗친 얼굴로 돌아섰다.

알아들을 수 없는 욕을 내뱉으며 살벌한 눈빛을 흘리던 꼬마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금세 생글거리는 다가왔다. 



"아저씨(叔叔), 껌 사세요."



스물다섯 살에 처음으로 '아저씨'라는 호칭을 들었다. 

당시에는 거울을 거의 안 보고 살았다. 

내 잘못이다. 


잠시 아이의 얼굴을 쳐다봤다. 

날카롭게 째진 눈 속으로 깊이를 알 수 없는 눈동자가 보였다. 

무엇이 이 아이의 눈을 이렇게 만들었을까? 

이건 내가 알고 있는 어린아이의 눈이 아니었다. 

술기운은 아닐 텐데 아이를 그냥 보낼 수가 없었다. 

아이가 들고 있던 부채를 2元에 받아 들고 "加油(기운 내)"라고 한 마디 했다.

아이는 놀란 눈으로 나를 잠시 나를 쳐다보더니 "谢谢(감사합니다)"라고 꾸벅 고개를 숙이곤 사라졌다. 

술이 고파졌다. 









오전 10시 50분 차를 탔지만 버스는 2시가 넘도록 시동도 켜지 않고 있었다. 

1시간 정도는 '중국이니까.'하고 넘겼지만, 두 시간이 지나자 견디기 어려워졌다.

승객들은 이미 다 탑승해 표검사까지 마쳤지만 버스는 요지부동이었다.

버스 안은 사우나보다 뜨거웠고 사람들은 연신 욕을 내뱉으며 안팎을 드나들었다. 

옆 자리의 중국인이 해바라기씨를 까먹는 소리가 날카롭게 신경을 긁어댔다. 

버스는 결국 두 시 반에 출발했다. 



나라티(那拉提) 초원 오프로드.



나라티 초원에 들어서면서부턴 차도가 없다. 

공사 중인지 막아놓은 건진 모르겠지만 도로 한 복판에 흙무더기가 쌓여 있었다. 

기사는 툴툴거리더니 이내 핸들을 돌려 도로 옆 강이 말라붙은 자리로 들어서서는 울퉁불퉁한 자갈길을 힘겹게 지나기 시작했다. 

내가 앉은자리 바로 아래는 고물버스의 엔진룸이다. 

달리는 내내 엔진 소리에 골이 울렸다. 

길이 조금 깊이 파인 곳으로 들어서면 차체가 오뚝이처럼 좌우로 흔들렸다. 

기사는 금방이라도 넘어갈 것 같은 버스를 잘도 조절해 가며 조금씩 조금씩 나아갔다. 

그렇게 힘들게 5시간여를 달려 겨우 30km 정도에 불과한 나라티 초원지대를 빠져나오니 창밖으론 노을이 지고 있었다. 

타는 듯한 노을에 취해 잠시 지친 몸을 달랬다. 



어느새 해가 넘어갔고 버스는 톈샨산맥의 깊은 계곡 속으로 들어섰다. 

달빛이 어찌나 밝은지 가로등 하나 없는 산길이 훤하게 다 보였다. 

옆으로는 천 길 낭떠러지였다. 

엔진을 그르렁거리며 굽이진 길을 한참 동안 돌던 버스가 산꼭대기 하나를 넘었다. 

그 순간 눈앞에 무시무시한 크기의 보름달이 나타났다. 

해발고도는 2000m를 넘었고 하늘에는 구름 하나 없었다. 

쿠처에서 본 뉴스에선 이 날이 가장 큰 달을 볼 수 있는 날이라고 했다. 

밤이 늦어 승객들은 대부분 곯아떨어진 상황이었다. 

버스 안에 이 경치를 보고 감동하는 여행객은 나 하나였다. 

고물 엔진의 굉음은 어느새 귓가에서 멀어졌다. 

덜컹이는 버스는 리듬을 타는 듯했다. 

달빛에 취했거나 홀렸거나 둘 중 하나였다. 

새하얀 달빛을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어느샌가 스르르 눈을 감았다. 







베이징 표준시 오전 7시 30분, 엔진 소리에 잠이 깼다. 

먼지에 덮여 머리도 수세미고 온몸이 찐득찐득하지만 따가운 눈을 비벼가며 창밖을 바라보니 어느새 톈샨산맥의 거대한 협곡 사이를 달리고 있다. 

큼직한 단층의 무늬와 거친 돌산의 결이 그랜드 캐년을 연상케했다.

졸린 눈을 부릅뜨고 바라보지만 어느샌가 나도 모르게 다시 잠에 빠졌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버스는 어느새 쿠처 시내에 진입하고 있었다.


창 밖으로 보이는 하늘은 온통 누런색이다. 

타클라마칸 사막의 모래를 감아올린 바람이 하늘을 뒤덮었다. 

숨 쉴 때마다 콧구멍으로, 목으로 까칠한 모래가 느껴졌다. 

교통빈관에 숙소를 정하고 배낭을 풀었는데 배낭 밑이 흠뻑 젖어 있다.

지난밤 계곡을 건너는 동안 버스 짐칸이 물에 잠겼었나 보다. 

다행히 배낭 밑에 깔아 뒀던 우비 덕분에 짐은 무사했다. 

몽롱한 정신을 추슬러 두꺼운 재킷과 우비를 빨아서 방안에 널었다. 

샤워를 하고 싶지만 창 밖의 모래바람을 보니 씻어봐야 의미가 없을 것 같았다. 

호텔 근처 노점에서 국수 한 그릇으로 저녁을 때우고 카슈가르 가는 기차표를 예매하기 위해 버스를 기다렸다. 



버스가 있긴 있다는데 30분이 지나도록 감감무소식이라 택시를 탔다. 

호텔 프런트에서 기차역까지 5元이면 간다고 들었다.

역에서 내리려 하니 10元을 달란다.

미리 요금 확인하고 탔어야 하는데 실수였다. 

당시 중국에서는 외국인을 등쳐먹는 게 일상다반사였다. 

기사에게 10元을 던져주니 옆에 정차 중이던 다른 택시기사에게 지원사격을 부탁한다. 

초록은 동색이랬다. 


"10위안 맞아"


택시기사는 징그럽게 웃었다. 

돈 앞에 징그러워지는 건 국경과 인종을 초월하여 똑같은 현상이다.

5元(당시 한화 750원)이 큰돈은 아니지만 이런 일이 반복되다 보면 기분이 좋을 리가 없다. 

계속 사기를 당하다 보면 내가 호구가 된 기분이 들고 자존감에 상처가 난다. 

애써 무시하려 해도 가슴속에 쌓인 앙금은 쉬이 사라지지 않는다. 

짧게 다녀올 여행이면 해프닝으로 치부하면 되겠지만, 장기 여행에서 계속 통수를 맞다 보면 스트레스가 적잖이 쌓인다. 


애써 화를 누르고 매표소로 가니 모레 기차표는 내일 와서 사란다. 

또 시작이다. 

중국 기차표는 3일 전부터 예매가 가능한 게 아니냐고 따졌더니 무조건 내일 오란다. 

창구 직원은 귀찮은 기색이 역력했다. 

2003년의 중국에는 서비스 정신이라는 게 없었다. 

공산주의의 잔재가 참 질기게도 남아있었다. 

표 파는 창구가 하나라 어찌할 도리가 없다. 

역 밖으로 나오니 택시기사들이 차를 타라고 손을 흔든다. 

그 가운데에는 아까 나를 태우고 온 기사도 있다.

징그럽게 웃으며 "안 타, 병신들아"라고 한국말로 대답했다. 

그 말을 내뱉으면서도 내가 유치하다고 느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체력은 바닥이 났고, 이성은 마비된 상황이었다.  

버스 정류장으로 가니 버스 두 대가 서있고 기사들은 야외 당구대에 붙어서 당구를 치고 있다.



"기사 어딨어요?" 



한번 흘끗 돌아보고는 다시 당구대에 엎드린다. 



"기사 어딨냐고!" 



나도 모르게 고성이 튀어나왔다. 

소리를 질렀더니 그중 한놈이 쓱 돌아보고는 손가락을 들어 한 방향을 가리켰다.

사막이었다. 

어이없는 내 표정을 본 놈들은 일제히 가가대소했다. 

순간 속에서 불같은 게 확 치밀어 오르면서 눈에 핏발이 섰다. 

저 앞에 있는 큐를 뺏어 머리통을 돌려놓고 싶다는 욕망이 끓어 올랐다. 

극도로 흥분하니 몸이 푸들푸들 떨리고 시야가 흔들렸다. 

처음 겪는 증상이었다. 

왜 사서 고생인가 의문이 들었다. 


시내까지 그냥 걷기로 했다. 

지도 상으로는 5km 정도 떨어진 듯했다. 

모래먼지가 날리는 황량한 길 끝에는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사막 한가운데 놓인 그늘 한 점 없는 아스팔트 길을 따라 한 시간가량 걸으며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중국에 발 붙인 지 이미 1년이 지났을 때였지만 이런 꼴을 볼 때마다 피가 거꾸로 솟았다. 

이런 사례들로 '중국인은'이라며 도매금으로 넘기는 건 위험한 사고방식이다. 

알지만 나도 모르게 '중국놈들은'이라는 단어가 튀어나온다. 

적어도 당시만큼은 중국놈들은 인간이 안 된 것들이란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중국에 있는 동안 가끔씩 아무렇지 않게 길에 쓰레기를 버리고, 무단횡단을 하는 날 보며 "적응 잘했네"하고 농담하던 스스로의 모습이 부끄러워졌다. 

나까지 그런 수준으로 떨어져선 안 되는 거였다. 






쿠처를 떠나기 전 할 일은 딱 하나, 금요시장을 구경하는 거였다. 

우리네 5일장처럼 매월 보름에 장이 선다. 

쿠처는 실크로드 천산북로에서 가장 중요한 교차로다. 

쿠처를 중심으로 동으로는 투루판, 서로는 카슈가르, 북으로는 이닝, 남으로는 타클라마칸 사막을 가로질러 호탄으로 이어진다. 

때문에 과거에는 이곳에 장이 서는 날에는 사방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위구르족의 향토색이 물씬 풍기는 재래시장을 기대했지만 생각만큼 대단한 볼거리는 아니었다. 

분위기는 더하고 뺄 것도 없이 구례 오일장 같은 느낌이었다. 

시장 한편에는 수확한 곡식을 수레에 끌고 와 난전을 벌인 사람들이 몰려있었다. 

사람들의 얼굴에 가득한 웃음과 여유가 시장바닥 특유의 시끄러움과 어우러져 무척 정겨웠다.

사람들은 카메라를 들이대면 활짝 웃으면서 자세를 취해줬다. 

초상권 따위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시장 골목을 빠져나오니 대로변에도 가축시장이 섰다. 

비둘기와 닭이 압도적으로 많았고 토끼, 닭, 개도 있었다. 

다리를 묶인 닭 한 마리가 홰를 치며 날아올랐다가 길가에 처박혀 날개를 퍼덕였다. 

닭을 팔던 아낙은 한숨을 쉬더니 닭다리에 묶인 끈을 잡아 들어 허리춤에 대롱대롱 매달고 돌아갔다. 

거꾸로 매달린 와중에도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닭의 모습이 우스웠다. 


가장 인상 깊은 풍경은 개 시장이었다. 

오지라면 오지인 이곳에서 달마티안, 그레이트데인, 마스티프를 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족보까지는 몰라도 품종견을 이런 데서 거래한다는 게 내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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