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루무치 乌鲁木齐
우루무치에서 가볼 곳 1순위는 톈샨(天山)이다.
정확히는 톈산산맥 봉우리 중 하나인 보고다봉(博格达峰) 아래 있는 티엔츠(天池)로, 우루무치 시내 북쪽 60km 지점에 자리했다.
보고다봉은 해발 5445m로 톈산산맥의 최고봉은 아니지만(*최고봉은 중국과 키르기스탄 국경에 있는 7439m의 포베다산) 만년설을 머리에 이고 광활한 천지 뒤에 병풍처럼 둘러선 위용이 자뭇 볼만하다.
유명한 관광지라 우루무치 시내에서 티엔츠를 왕복하는 투어 버스가 꽤 많다.
어쩌다 게으른 동행을 만나 알람 역할을 도맡아버린 샤오장이 나를 깨워 버스에 실었다.
일행은 나와 샤오장, 교주 후배 두 명, 총 4명이었다.
자다 깨다를 반복 하다가 문득 창밖을 보니 차창 오른편으로 톈샨산맥이 보였다.
구름에 가린 설산은 언제 봐도 신비롭다.
탁 트인 도로를 신나게 달린 버스는 1시간 반 만에 티엔츠 입구에 도착했다.
입구에서 티엔츠까지는 다시 셔틀버스를 타야 했다.
주차장에서 산정까지 걸어가면 1시간 거리다.
그러나 당시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지만, 중국 등산로는 아스팔트 길 아니면 계단이다.
샤오쟝은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고, 나도 재미없는 길을 굳이 걷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당시에는 100위안이 넘는 돈을 지출할 때는 벌벌 떠는 신세였지만, 잠시 고민하다가 그냥 케이블카를 탔다.
가끔 그럴 때가 있다.
'꼭 가봐야 할 곳', '추천 1순위'라는데 도무지 구미가 안 당기는 곳.
딱히 가고 싶지는 않지만 언제 또 방문할지 모르니 안 가긴 아까운 곳을 만날 때.
그리고 그런 곳은 꼭 안 좋은 기억으로 남기 마련이다.
티엔츠가 그런 곳이었다.
사진으로 본 아름다운 풍경은 온데간데없었다.
눈앞에 풀쳐지는 풍경이라곤 국경절 천안문 광장처럼 바글대는 사람들과 열 걸음마다 한 번씩 따라붙으며 "말 탈래요?" 묻는 마부들 뿐이었다.
방문객을 먹이로 보는 듯 눈이 벌게져서 달려드는 카자흐족 마부들은 때론 자기들끼리 싸웠다.
먼저 찍은 사람을 가로채려 한다며 시비가 붙은 탓이다.
그 광경을 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육두문자가 튀어나왔다.
샤오쟝도 진절머리를 쳤고, 또다시 '중국은 이래서 안돼...'라고 중얼거렸다.
수라장을 빠져나와 잠시 호숫가에 앉았다.
샤오장과 잠시 구시렁거리고 있는데 마부 하나가 다가왔다.
말을 타고 산을 올라가면 사람 없는 한적한 곳에서 천지의 전경을 볼 수 있다며 꼬드겼다.
거마비는 20위안.
20년 전 중국에서는 가격을 들으면 일단 1/10부터 흥정하는 게 국룰이었다.
최종 타결안은 10위안이었다.
말을 타고 오르는 길은 가팔랐다.
진흙투성이 길을 꾸역꾸역 잘 올라주는 말이 기특하긴 했지만, 바로 앞에 가는 말이 걸음을 뗄 때마다 가스가 뿜어져 나왔다.
'말근육'이란 표현이 괜히 있는 게 아니듯 놈들의 근육은 팽팽했다.
그 팽팽한 근육에 여분은 없었는지 오르막을 오르며 힘을 쓸 때마다 우렁찬 파열음이 들렸다.
가끔 지뢰도 떨어졌다.
내몽골 초원에서 말을 타 본 적은 있었지만, 이렇게 험한 길을 말 타고 간 건 처음이었다.
톈샨의 아름다운 경치를 가린 말 궁둥이와 냄새에 현기증이 났다.
10분 정도 올랐을까?
나무에 가려진 조그만 공터가 나오니 마부가 말을 세운다.
잠시 쉬어가나 싶었는데 마부가 움직일 생각을 않는다.
왜 여기서 섰냐고 물었다.
혈압이 치솟는데 샤오장이 나보다 빨랐다.
까무잡잡한 피부가 붉어질 정도로 흥분한 샤오장이 따지고 들자, 놈들은 중국어를 잘 못 알아듣는 척했다.
여행 다니는 동안 별별 희한한 사기꾼들을 다 만나봤지만, 이날 만난 마부들은 손에 꼽을 정도로 악질이었다.
샤오장과 태그팀을 꾸려 20분 정도 소리를 질러가며 싸우는 와중에 마부 한 놈이 교주의 후배들이 탄 말을 산 위로 보내버렸다.
두 사람은 중국어를 한 마디도 못했다.
이건 또 뭐하는 짓이냐고 따졌더니 두목 격으로 보이는 마부가 빙글빙글 웃으며 말한다.
투루판에서 만났던 친절한 위구르 사람들의 환상은 산산조각 났다.
돈 앞에서는 한없이 간교해지는 속물들을 보고 있자니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그 와중에 티엔츠 뒤편으로 보이는 보고다봉은 웅장했고, 아름다웠다.
그래서 더 화가 났다.
마오쩌둥의 홍군이 이른바 '해방'이라는 명분으로 지역을 점령하기 전까지 신장위구르 자치구와 티베트 자치구는 중국령이 아니었다.
전혀 다른 언어, 문화, 역사를 가진 민족을 한 국가로 묶어놨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는 아프리카와 발칸 반도, 중동의 사례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중국은 압도적인 무력과 '인민 해방'이라는 시대상을 명분으로 내세워 이 두 지역을 성공적으로 병합했다.
그렇게 10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그 사이 공산주의는 몰락했지만 공산당은 남았다.
중국의 기형적인 국가 구조는 공산당 정부의 강력한 통제 아래 유지되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탄압을 해도 모든 목소리를 잠재울 수는 없다.
투루판에서 만난 오스만과 투르크가 그랬듯 현지인들은 한족의, 한족에 의한, 한족을 위한 공산당 정권을 혐오했다.
반대로 중국인이 아닌 외국인에게는 대부분 친절했다.
그래서 내가 착각을 했던 것 같다.
여행을 떠나기 전 소수민족에 대한 환상이 있었다.
'돈만 아는 중국인'의 범주에 속하지 않는 순박한 사람들을 그렸었다.
한족 사회를 벗어나면 순박한 소수민족을 만날 거라 생각했던 나는 어리석었다.
그들은 돈 앞에서는 다른 의미로 '위 아 더 월드'였다.
어차피 뜨내기인 여행객들을 상대하는 이들은 한 번 보면 다시 안 볼 사람들에게 바가지 씌우거나 사기치는 걸 당연하게 여겼다.
그들이 뜯어먹는 대상은 비단 외국 여행자만이 아니었다.
현지인들도 당하는 걸 숱하게 봤는데, 그네들은 대부분 몇 번 툴툴거리고 현실에 순응했다.
이해할 수 없는 행태였다.
요즘은 좀 덜한 것 같은데 당시만 해도 중국은 상식이 통하지 않는, 그야말로 몰상식한 곳이었다.
숙소로 돌아오니 심하게 갈증이 났다.
맥주 한 잔이 간절해 숙소 근처 야시장으로 가 자리를 잡았다.
구걸하는 아이들은 여전히 많았다.
때구정물이 말라붙은 자국이 선명한 꼬마들이 자기 가슴팍 높이의 테이블 사이를 돌아다니며 사람들 허벅지를 붙들고 칭얼거렸다.
눈이 예쁜 꼬마가 나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아이는 주춤주춤 다가와 해바라기씨 한 봉지를 내밀며 손을 벌렸다.
1위안을 주고 봉지를 건네받으니 녀석은 한쪽 눈을 찡긋 감으며 윙크를 날리곤 잽싸게 사라졌다.
문득 슬퍼졌다.
위구르인에 대한 차별정책으로 수많은 사람이 비참하게 살아간다는 오스만의 말이 생각났다.
맥주 한 병을 그대로 들이켰다.
목이 찢어지는 듯했고 눈물이 핑 돌았다.
잠시 후 세상도 돌기 시작했다.
스물다섯 살이었다.
우리 사회가 IMF의 터널에서 막 빠져나오고 있을 때였지만 든든한 부모님 덕분에 내가 경험한 세상은 어렵지 않았다.
뉴스에서 본 세상의 고통은 피상적이었다.
그러나 신장에서 만난 세상은 달랐다.
해바라기 소년과 눈을 맞춘 후 내 세상이 뒤엉켰다.
'난 도대체 무슨 자격으로 이리도 팔자 좋게 유람이나 다니는 걸까?'
'그 녀석은 무슨 이유로 저 어린 나이에 시장바닥에서 구걸을 하며 살아가야 하는 걸까?'
내가 한 학기를 통째로 접고 여행을 떠나겠다고 했을 때, 부모님께선 아무런 질문도 없었다.
난 반년이나 하는 장기여행에 들어가는 목돈을 공으로 얻어 썼다.
이 호사의 근거를 나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사람들 발에 차여가며 우루무치 야시장 바닥을 기어 다니는 거지들을 보며 혼란스러웠다.
왜 난 행복해도 되고 저들은 그렇지 못한가?
스물다섯 살이었다.
질문은 꼬리를 물었지만 답은 못 찾았고, 아직도 못 찾았다.
옆 테이블에 앉은 중국 남자가 만취했는지 마시던 술을 게워내기 시작했다.
일행 하나가 비닐봉지를 구해와서 남자의 귀에 걸었다.
잠시 거슬리는 소리가 이어졌고, 처리를 마친 그는 봉지를 내 뒤쪽으로 던져버렸다.
'퍽~!' 하고 봉지 터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종아리에 미끄럽고 뜨끈한, 그리고 끈적한 감촉이 느껴졌다.
갑자기 우루무치라는 도시 자체가 역겨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