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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집사 김과장 Apr 27. 2022

홍콩 사람

투루판 吐魯番


도미토리에 홍콩에서 온 아가씨가 들어왔다. 

깡마른 체구에 툭 튀어나온 이마, 까무잡잡한 피부의 아가씨였다. 

길을 지나다 한 번쯤 봤을 듯한 평범한 얼굴이었는데, 눈빛이 유별나게 초롱초롱했던 기억이 난다. 

나이 34세, 이름은 안 밝혔고, 쟝(江)씨니까 '샤오쟝'이라고 부르란다. 

나보다 열 살이 많으니 '따지에(누나)'라고 부르겠다고 했다가 등짝을 얻어맞았다.



"누가 봐도 액면가는 네가 나보다 오래비다. 그러니 너는 마땅히 나를 '샤오(小)'로 불러야 한다."



라는 게 그의 논리였다. 



샤오장은 온화하고 배려심이 몸에 밴 사람이었다. 

항상 차분한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자기 생각을 얘기했지만, 농담할 때는 한마디도 지는 법이 없는 유쾌한 사람이었다. 

4년 간 열애 끝에 결혼한 남편을 홀로 집에다 버려두고 혼자 여행을 떠날 만큼 당찬 아가씨였다. 

매일 저녁 휴대전화로 남편과 통화할 때는 10대 소녀 같은 싱그러움이 묻어났다. 

샤오쟝은 잘나가는 기업의 회장 비서로 10년 간 일하다가, 문득 여행을 하고 싶어서 직장 때려치우고 홀홀 단신으로 떠나왔단다.

원래 계획은 청두에서 천장공로(청두-라싸)를 타고 동부 티베트를 관통해 라싸로 들어가는 거라고 했다. 

그러나 하필 그 당시에 쓰촨성에 홍수가 난 지라 티베트로 들어가는 교통이 전면 통제되어 어쩔 수 없이 꺼얼무에서 버스를 타고 라싸 들어갔다가 다시 꺼얼무로 돌아 나와 신장(新疆) 루트에 올랐다고 했다. 

7월 초 티베트 입경이 풀린 후부터는 체온 검사만 할 뿐 청장공로(꺼얼무-라싸) 중간에서 퍼밋 검사하는 공안 하나도 못 봤다면서, 중국인 행세하고 한 번 통과해 보라며 나를 부추겼다.   






샤오쟝과 함께 다니는 동안 "어디서 왔어요?"란 질문을 많이 받았다. 

우루무치에서 샤오쟝과 함께 저녁을 먹으러 갔을 때의 일이다.

혼자 갔을 때 나를 환대해 준 국숫집 사람들의 표정이 그녀를 본 순간 싸늘해졌다.

'중국 것들'이라며 대놓고 비아냥 거리는 소리가 구석구석에서 들렸다. 

아연해진 내 표정을 본 샤오쟝은 "이곳 사람들(위구르족)은 한족을 싫어해서 다니기가 힘들다"라고 쓴웃음을 지었다.

투루판에서 만났던 오스만에게 한족에 대한 위구르족의 뿌리 깊은 증오심을 들었기에 놀랍지는 않았지만,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누군가에게 미움을 받는다는 건 등골에서 뱀이 스멀거리듯 기분 나쁜 일이다. 

하물며 그 이유가 자신의 잘못이 아닌 타고난 원죄라면 어떤 기분이었을까?


중국 정부가 외치는 '하나의 중국'은 그들 속에 들어가 보기 전엔 꽤나 그럴싸하다. 

하지만 실상은 아니다.

샤오쟝은 항상 광동이나 광주에서 왔다고 할 뿐 홍콩에서 왔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본토인들은 "홍콩에서 왔다"라고 하면 색안경을 끼고 보고, '홍콩 사람'이라고 하면 "그럼 넌 중국인 아니냐?"하고 화를 낸단다. 

심지어 함께 다니는 동안 어떤 사람은 그녀의 면전에서 "중국사람인데 중국말 잘 못하네"라며 비아냥 거리는 모습도 직접 봤다. 

당시는 2003년, 홍콩이 중국 정부에 반환된 지 5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우루무치에서 천산 천지에 갔을 때 샤오쟝이 표를 끊기 위해 줄을 섰다.

아비규환인 매표소에서 무사 귀환한 그녀가 무안한 얼굴로 물었다.

"한국에서도 이렇게 줄 안 서니?"


"글쎄... 좀 시끄럽고 무질서하긴 해도 줄은 서는데? 이 정도는 아니야."


그랬더니 더 멋쩍은 얼굴로 "중국인은 이래서 안돼..."라고 한다.

비단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당시에는 중국 어디를 가도 "중국인은 이래서 안돼", "중국은 이래서 안돼"라는 소리를 중국사람들로부터 종종 들었다.

막 후진국 티를 벗고 비상하기 시작하던 20년 전의 중국인들은 자신감이 결여된 모습이었다. 

찬란했던 제국의 후예라는 자부심은 마음 깊은 곳에 여전히 갖고 있었지만, 현실의 초라한 모습에 위축된 탓이었으리라. 

하지만 미국과 더불어 세계의 패권을 다투는 요즘, 중국인들은 더 이상 본심을 숨기지 않는다.





교주와 교주의 후배, 그리고 샤오장


샤오장과 함께 현지 여행사의 투루판 투어에 참여했다. 

당시만 해도 투루판은 대중교통 인프라가 없었다. 

중요한 유적과 명소들은 도심을 중심으로 중구난방으로 흩어져있기 때문에 택시를 빌리지 않는 한 현지 여행사의 투어에 참여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투어라고 해도 가이드가 붙는 게 아니라 각 지점에 참가자들을 일정 시간 동안 풀어놨다가 다시 다음 장소로 옮겨다 주기만 하는 호핑 투어(Hopping tour)였다. 

투어는 12시간 동안 투루판의 명소 여덟 곳을 숨 가쁘게 돌아다니는 일정이었다. 



투루판은 한나라 때부터 중국과 중앙아시아의 경계선으로 숱하게 땅의 주인이 바뀐 곳이다. 

한나라 때는 중국에 귀속되어 둔전을 운영했고, 한나라가 멸망한 후에는 중앙아시아의 소그드인들이 차지했다.

당나라 때 다시 중국의 영토로 편입됐으나 돌궐, 토번(티베트)과 영토 분쟁이 치열하게 이어졌다. 

이후에는 위구르족의 왕조가 여럿 들어섰으나 칭기즈칸 앞에서 꼬리를 말았고, 원나라 멸망 후에는 다시 위구르족의 영토에 들어갔다. 

천불동 유적이 말해주듯 이 지역은 원래 불교 문화권이었으나, 15세기를 전후해 위구르족이 이슬람 화하면서 불교 유적에 대한 대대적인 반달리즘이 벌어졌다. 

이후 준가르 칸국의 통치를 거쳐 청나라 때 다시 중국의 통치를 받게 된다. 

그러나 청나라 말엽 세계열강들이 중국을 놓고 땅따먹기를 할 때 위구르족의 국가로 독립을 시도했으나 실패, 공산혁명이 일어난 후 중화인민공화국의 실질적인 지배를 받게 된다. 


투루판은 짧게 정리해도 숨 막힐 정도로 복잡한 역사를 지닌 땅인 만큼 이야기가 넘쳐나는 곳이다. 

고대 중국의 흔적과 이슬람 문화가 혼재했으며, 위구르족이 대다수긴 하지만 한족도 얽혀 살고 있어 독특한 풍경을 자아낸다. 

투어에 참가해 사방에 흩어진 유적을 따라다니다 보면 내가 지금 도대체 어디, 어느 시대를 보고 있는 건가 혼란스러울 정도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아침은 먹어야 하는 중국 사람인 샤오장 덕분에 새벽같이 일어나 식전 댓바람부터 부산을 떨었다. 

요우티아오(꽈배기)와 또우쟝(콩국)으로 아침을 때우고 차에 오르니 좌석은 대부분 비어있고, 중국 관광객 그룹 몇이 먼저 자리를 잡고 있었다. 

투어 코스는 '화염산-베제클리크 천불동-아스타나고분군-포도구-카레즈-교하고성-소공탑'으로 이어졌다. 

사실 투루판에서 꼭 가봐야 할 곳은 고창고성이지만 아쉽게도 당시에는 내부 수리 중이라 들어갈 수가 없었다. 


첫 번째 목적지는 화염산이었다. 

화염산의 유명세는 상당 부분 서유기 때문이다. 

서역으로 향하던 삼장법사 일행은 활활 타오르는 화염산에 가로막혀 발이 묶인다. 

화염산의 불을 끄기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우마왕의 처인 나찰녀의 보물 파초선이었고, 손오공이 우마왕과 한판 승부를 벌인 후에 파초선을 얻어 화염산의 불을 끈 후에야 여정을 계속할 수 있었다. 

버스는 출발한 지 30분 정도 지나서 위구르족 토기 공예품 전시관에 우리를 내려줬다. 

'이렇게 과감하게 사기를 치는 건가?' 싶어서 매표소 직원에게 "화염산이 어디요?"라고 물었다. 

그러자 매표소 아가씨는 잠시 나를 멀뚱멀뚱 쳐다보더니 '뭐 이런 병X이 다 있지?' 하는 듯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니가 서 있는 곳이 화염산인데요."



차에서 내리니 대충 사방이 이런 풍경


당황스러웠다. 

보통 '관광'을 하게 되면 그곳이 가장 잘 보이는 뷰포인트를 찾게 마련이다. 

황당한 표정의 나를 본 중국 사람 하나가 "가이드북에 나온 사진은 아스타나 고분군에서 포도구 가는 길에 볼 수 있어요"라고 귀띔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화염산은 투루판 인근을 동서로 100km나 가로지르는 거대한 산맥을 칭한다. 



중국에서 가장 더운 지역인 투루판은 분지지형이라 열을 기가 막히게 모은다. 

여름철 평균 기온은 40도에 육박하며, 수은주가 50도를 넘기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강수량은 부족하고 일조량은 어마어마하니 지표면의 온도는 최고 80도에 육박한다. 

이때는 길바닥에 계란을 깨뜨리면 그대로 프라이가 된다. 

지표면의 수분은 말라붙어 바스락거리는데, 타는 듯한 적토는 아지랑이를 받아 일렁인다. 

아지랑이에 실려 춤을 추는 산의 실루엣은 어디를 보나 이글거리는 화염이다. 

현재는 인근이 개발돼 사람의 흔적이 먼저 보이니 느끼기 어렵지만, 먼 옛날 사막을 가로지르던 사람들은 그야말로 불구덩이 한복판에 들어온 느낌이었을 거다. 



천불동 가는 길


정신을 차리고 천불동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천불동은 이름(千佛洞)이 말해주듯 둔황 막고굴에 버금가는 불교 유적이다. 

대부분 토굴 사원은 도굴꾼들이 쓸고 간 뒤 이슬람 점령 시기에 훼손된 터라 볼 게 거의 없다. 

그러니 굳이 유적지에 들어가 볼 생각은 없었다. 

대신 천불동 뒤로 나있는 산에 올라봤다. 

10분쯤 터덜터덜 걸어 꼭대기에 오르니, 맞은편으로는 제법 희한한 모양의 바위산이 있고, 그 뒤로는 한줄기 강이 흐르는 광활한 초원이 펼쳐졌다. 

초원의 지평선 위로는 만년설을 머리에 인 천산산맥의 줄기가 달린다. 

고개를 뒤로 돌리니 화염산 자락이다. 

이곳의 흙은 모조리 타는 듯한 적토다. 

거칠게 마모된 산의 옆면이 지그재그로 흐르고 있어, 강한 햇빛 아래선 충분히 불꽃 모양으로 보일만 하다.



화염산. 아찔하다.



천불동에서 허락된 시간이 끝나고 투어 버스는 아스타나 고분군으로 이동했다. 

기원전 3세기부터 8세기까지의 고분이 모여있는 지역으로 고대의 문서와 미라가 다량 출토되어 유명해졌다. 

그러나 출토된 물품은 대부분 우루무치의 박물관으로 옮겨갔으며, 여기는 남아있는 게 거의 없다. 

다녀온 사람들은 '괜히 다녀왔다'며 투덜대는 경우가 많다. 


이런 상황을 이미 들어서 알고 있었거니와, 아스타나 고분군에 도착했을 때는 정말이지 너무나도 더워서 꼼짝도 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투어 버스 기사에게 물어보니 여기 관광 끝나면 점심시간까지 이어지는터라 두어 시간을 아스타나 고분군에 머물 예정이라고 했다. 

입장료를 안 내면 주차장에도 못 들어가게 하는지라 땡볕에서 구워지다가 내가 미라가 될 판이었다.

다행히 아스타나 고분군은 시내 인근이었고, 버스 노선이 들어오는 곳이었다. 

날름 버스 잡아타고 투루판 시내로 들어와 국수 한 그릇 먹고 돌아와 다음 행선지인 포도구로 향했다. 


아스타나 고분군을 비롯해 투루판의 유적은 우리나라와 재미있는, 어쩌면 안타까운 인연이 있다. 우리나라 중앙박물관에는 '오타니 컬렉션'이라고 부르는 수장품이 있는데, 이 유물들은 모두 일본 귀족 '오타니 고즈이'가 투루판, 쿠챠 지역을 탐사한다는 명목으로 약탈해온 문화재들이다. 오타니는 복잡한 이유로 이 유물 중 일부를 조선총독부에 남기게 되는데, 그 유물들이 지금 그대로 국립중앙박물관에 남아있는 것이다. 오타니 컬렉션은 대부분 천불동에서 뜯어온 벽화들인데, 부피가 커 이동이 여의치 않아 일제 패망 후 그대로 우리나라에 남겨졌다고 한다. 자세한 내용은 이기환 경향신문 선임기자의 기사에서 볼 수 있다. 일제가 우리나라의 문화재를 약탈해간 지난 역사를 생각하면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포도구를 지나면서부터 기온이 불구덩이를 연상케 할 정도로 뜨거워졌다. 일기예보에선 최고 기온이 38도라고 했는데 거짓말이다. 호텔 프런트 직원의 말이 인상적이었다. 



"40도를 넘으면 관공서는 일을 멈추고 학교는 휴교령이 떨어진다. 그런데 40도 넘는 일이 비일비재하니 지역 경제가 툭하면 멈춰버린다. 그래서 정부에서는 일기예보를 할 때 아무리 더워도 38도에 맞춰서 예보를 내보낸다. 그래서 투루판의 여름 평균기온은 정확히 38도다"



포도구는 말 그대로 포도를 대량으로 재배하는 지역이다. 

기후는 악랄하지만, 포도 재배에는 최적이다. 

강수량은 적고 일조량이 풍부한 탓에 여기서 난 포도는 기가 막히게 맛있다. 

그래서 이 지역의 포도는 예로부터 알아주는 특산품이었다. 

중국의 와인 산업도 이 지역에 기대고 있다. 


포도구 역시 입장권을 끊고 들어간다. 

웹 상에서 검색해본 이미지로는 딱히 감흥이 없었기에 역시 주차장 그늘에 늘어져 잠을 청했다. 

더위가 어느 선을 넘으면 정신과 육체가 따로 놀기 시작하는데, 당시는 그 선 언저리에서 줄타기를 하는 기분이었다. 

기절하듯 쓰러져있었는데 포도구를 다녀온 샤오장이 나를 깨웠다. 

버스는 길바닥의 먼지를 휘감아 올리며 출발했다. 

지나는 길에 본 화염산은 아지랑이를 타고 정말로 불타고 있었다. 

붉은색마저 바래 보이게 만드는 더위에 이가 박박 갈렸다. 



카레즈는 건너뛰었다. 

더위를 먹은 듯했다. 

한 발짝만 더 움직이면 토할 것 같았다. 

카레즈는 천산의 눈 녹은 물을 끌어들여 농업 용수로 대기 위한 지하 관개수로다. 

총길이 5,000km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규모를 자랑한다. 

가이드 없이 들어갔다가 길을 잃으면 유골도 못 찾을 가능성이 있다고 뻥을 친다. 

관광객이 카레즈 입장권을 끊고 들어서면 10평 남짓한 공간의 관람실을 둘러보게 된다. 

관람실에는 카레즈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어떻게 생겼는지를 재현해 놓은 모형이 있다. 

샤오장은 카레즈에 들어갔다 나와서 욕을 했다. 

당시 입장료가 20위안이었는데, 난 그날 하루 20위안어치의 물을 마셨다. 


"네가 쓴 20위안이 훨씬 가치가 있을 거야"


샤오장은 카레즈를 떠날 때까지 계속 툴툴거렸다. 



교하고성



투어의 마지막은 교하고성이었다. 

공식적인 마지막 행선지인 소공탑은 전혀 관심이 없던 터라 버스 기사에게 나를 기다리지 말고 먼저 출발하라고 했다.

당시 시간이 베이징 표준시로 오후 4시 반 경이었으니 신장 시간으론 2:30이었다. 

하루 중 가장 더울 시간이었다. 

100m 정도 걷다가 나도 모르게 "이 미친 동네 날씨는 도대체 왜 이 모양이냐!"라고 비명을 지르고 매표소로 후퇴했다. 

해가 진 후 움직일 요량으로 매표소 의자에 앉아있었더니 혼자 오토바이 택시를 잡아타고 온 교주가 휘적거리며 나타났다. 



"투루판에서는 저녁을 먹은 후 일과를 시작해야 하지"



작년에 이미 이 지역을 다녀간 교주는 축 늘어진 나와 샤오장을 보며 웃었다. 

오후 6시 반이 넘었지만 아직도 해는 중천에 걸려있다.

날씨와 상관없이 베이징 표준시에 일과를 맞춰놓은 중국 정부의 행정 원칙 탓에 더 늦기 전에 들어서야 했다. 

잔인하게 더운 날씨 탓에 고성에 들어서는 입장객은 우리뿐이었고, 혀를 한 자씩 빼물고 열에 들떠 벌게진 눈을 굴리며 돌아 나오는 사람들은 우리를 보고 돌아가라며 만류했다. 

덕택에 오르는 내내 한적한 고성을 거닐며, 이미 폐허가 된 옛 영화의 현장으로 빠져들 수 있었다.

한때는 성벽이었을 토담, 마을이 있던 자리에 을씨년스럽게 남아있는 벽의 잔해,  좁은 성벽 틈으로 불어오는 더운 바람과 칼날 같은 바람소리가 누렇게 죽어버린 도시의 색깔과 어울려 신비로운 적막감을 자아냈다. 



교하고성



미로 같은 성터를 누비고 다니다가 고성의 가운데 위치한 사찰터에서 노년의 배낭객 세 명을 만났다.

개미새끼 한 마리 찾아보기 힘든 황량한 벌판이라 사람이 반가웠나 보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각각 캐나다, 독일, 프랑스에서 온 이들로 여행하다가 만나서 같이 다니고 있다했다. 

깊게 파인 주름을 타고 젊음이 흘러넘쳤다. 

투루판의 더위를 잊어버릴 만큼 시원한 미소가 인상적이었다. 



"영감, 이리 와. 네 평생에 언제 이런 미인이랑 사진 찍어 보겠냐?"



라고 농담을 던지는 독일 노파의 목소리는 까랑까랑했다. 

파란색 실크 두건, 살짝 붙는 조끼풍의 민소매 상의, 터키 스타일의 빌로드 재질의 품 넓은 바지를 입은 할머니에게서 젊음이 느껴졌다. 

배낭여행은 20대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당시의 나에게는 충격적인 경험이었다. 

나도 저 나이가 되어 혈혈단신 배낭 하나 메고 다시 떠날 수 있을까??


성루에 도착해 무너진 담벼락 밑에서 일몰을 기다렸다. 

열사의 더운 바람에 계속 숨이 막혔지만, 한 조각 그늘 밑에서 쉴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했다. 

경비원이 고성 중간 담벼락 밑에 앉아 사람들이 성터로 들어가는 걸 감시하지만, 그 구간만 지나면 그네들도 더워서 움직이질 못하는지라 아무 데나 들어가 볼 수 있었다. 

느긋하게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상상에 빠졌다.  

100m에 달하는 협곡을 천혜의 방어벽으로 삼아, 한때는 엄청난 규모로 영화를 누렸을 이곳이 이제는 폐허만 남아있다. 

해가 넘어가면서 석양을 받은 고성의 그림자는 절로 사람을 숙연하게 만들었다. 




돌아오는 길에 버스정류장에 있는 국숫집에 들러 늦은 저녁을 먹었는데, 굉장히 낯이 익은 아가씨가 서빙을 하고 있다. 


"혹시 어디서 만난 적 있지 않나요??"


종업원이 깔깔거리고 웃었다.

다시 보니 내가 묵는 호텔의 프런트 직원이다. 

자기는 진작에 알아봤는데, 내가 못 알아보는 게 우스웠단다. 

국숫집은 어머니 가게라 비번일 때는 항상 와서 이렇게 일을 돕는단다. 

마침 오늘 야간 근무조라 두 시간 정도 후에 출근한다며 이따가 보자며 국수를 곱배기로 담아준다. 

길에서 마주친 작은 우연에 즐거운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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