둔황 敦煌
베이징에서 공부할 때 짬을 내 내몽고에 다녀온 적이 있다.
처음 초원을 봤을 때의 감동은 아직도 생생하다.
'지평선'을 처음 봤을 때는 눈물이 핑 돌았다.
끝이 보이지 않는 저 선을 넘으면 새로운 세상이 열릴 것 같았다.
내가 안주하고 있는 현실에서 벗어나 저 선 너머로 나아가고 싶었다.
지평선 너머에는 단조로운 일상이 아니라 새로운 세상이 있을 거란 환상에 사로잡혔다.
'미지에 대한 동경'은 내 여행의 동력이었다.
남들이 가보지 않은 곳을 가고 싶었고, 자연의 아름다움에 취하고 싶었다.
몽골 초원에 벼락비가 내리는 장면을 보고 얼어붙은 후에는 내 눈으로 세상의 아름다운 모습을 모두 보고 싶다는 욕망에 사로잡혔다.
그즈음에 한비야 씨의 <바람의 딸> 시리즈를 읽었던 것 같다.
10년 전쯤에는 허풍과 과장, 사실과 다른 이야기들로 어린아이들 머릿속에 위험한 바람을 불어넣었다는 비판을 받았지만, 당시에는 수많은 사람이 그 책을 읽고 배낭을 쌌다.
나 역시 그중 하나였다.
실크로드를 동경하기 시작한 것도 그즈음이었다.
지금이야 사막길, 바닷길, 산길 등 다양한 동서 교역로가 존재했다는 걸 알지만, 당시만 해도 나는 실크로드를 끝없는 사막을 가로지르는 모험과 낭만의 길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니 대당 제국 교역로의 첫 관문인 둔황에서 실크로드의 '냄새'라도 맡아보려는 기대에 얼마나 할딱거렸는지는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을 듯하다.
가욕관을 떠나 둔황으로 가는 길은 가도 가도 끝없는 사막이다.
버스는 작렬하는 태양 아래 실처럼 뻗은 한 줄기 길을 힘겹게 달렸다.
미지근한 에어컨에 더해 나를 더 힘들게 했던 건 버스에서 틀어놓은 DVD였다.
이름도 잊히지 않는 '탕구라'라는 밴드의 뮤직 비디오였는데, 나이트클럽에서 나올 법한 댄스 음악에 맞춰 편곡한 티베트와 몽골의 민요로 추정되는 음악이 끊기지 않고 고막을 때렸다.
심지어 노랫말의 후렴구는 '옴 마니 파드메 홈(나무아미타불)'이었다.
괴상망측한 컬처 쇼크와 5시간 내내 비포장 도로를 달리며 불규칙 바운드를 반복하는 버스에 시달리다 보니 정신이 나갔었나 보다.
둔황 터미널에 내려 비천빈관 도미토리에 방을 잡고 들어섰는데, 침대에 늘어져 있던 여행자가 나를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보통 배낭여행자들은 큰 짐을 때려 넣은 큰 배낭을 등에 메고, 평상시 돌아다닐 때 쓰는 작은 배낭을 앞으로 메고 다닌다.
남자의 말에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작은 배낭을 등에 메고 마실 나온 모양새로 도미토리 입구에 서있었다.
행색은 배낭여행자가 분명한데, 짐이 심하게 단출했으니 이상하게 여긴 남자가 인사도 하기 전에 물어본 거였다.
순간 온몸에 피가 싹 빠지는 듯했다.
문을 박차고 나가 터미널까지 한달음에 달렸다.
천만다행으로 버스는 아직 그 자리에 있었다.
배낭여행에 이골이 나면 있을 수 없는 실수지만, 여행을 떠난 지 1주일이 갓 지났을 당시라 아직 몸이 배낭을 기억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하마터면 여행 시작하자마자 접을 뻔했다.
배낭을 챙겨준 여행자는 '교주'였다.
이미 1년 전에 중국을 일주하고 티베트, 네팔을 지나 이란까지 넘어갔던 여행자였다.
교주, 그리고 나중에 합류한 동갑내기 친구 '해랑'과는 티베트 라싸까지 일정이 같아 거의 석 달간 함께 여행하게 된다.
둔황은 고비사막의 경계선에 있다.
7월의 햇살은 뙤약볕이라는 표현이 가소로울 정도로 살벌했다.
그 와중에 이런 소란을 겪고 나니 지치는 게 당연지사. 저녁에 마신 맥주 한 잔에 몸이 풀렸고, 둔황의 첫날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둔황을 찾는 목적은 뭐니 뭐니 해도 '막고굴(莫高窟)'이다.
세계사 시간에 '둔황 석굴'이라 배운 거기다.
막고굴은 전진(前秦) 시대부터 원(元)나라 때까지 약 1000년의 시간을 두고 만들어졌다.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일반적으로 366년 전진의 승려 낙준(樂僔)이 굴을 파고 불상을 조각한 것이 시초라고 추정한다.
이후 승려들이 수도를 목적으로 이곳에 굴을 파고 생활하면서 불상을 조각하고 불화를 그렸다.
지금이야 찬란한 역사적 가치를 자랑하는 막고굴이지만, 초창기의 막고굴은 종교적으로 대단한 가치가 있는 곳은 아니었지 싶다.
상식적으로 불교의 위세가 대단했다면 장안 같은 대도시에 사원을 지었을 터, 사막 한가운데 굴을 파고 불상을 조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막고굴의 전성기는 수당(隋唐) 시기였다.
수나라가 중국을 다시 통일하기 전, 남북조 시대는 중국 역사에서 불교가 본격적으로 세를 떨치기 시작한 시기였다.
오랜 전란의 시기를 거치면서 유교는 국가 통치 이념 및 사상의 근간으로서 지녔던 지위를 상실했다.
후한 말기 전래된 불교는 이런 시대적 배경을 바탕으로 귀족들의 비호를 받으면서 발전했다.
그리고 수나라가 등장해 후한(後漢) 시대부터 삼국시대를 거쳐 위진남북조 시기까지 약 400년 간 이어진 전란의 시대를 끝냈다.
중국 역사상 손에 꼽히는 성군이었던 문제(文帝)의 통치에 거대한 대륙의 생산력이 만나 수나라는 급속도로 성장했다.
국경이 안정되자 경제력은 무섭게 커졌다.
자연스럽게 문학과 예술이 발전했고, 불교 미술의 발전도 같은 맥락에서 이뤄졌다.
비록 문제의 아들 양제가 고구려 원정 및 갖가지 실정을 거듭한 끝에 나라를 말아먹었지만, 이 시기에 닦아놓은 통일 왕조의 기반은 당나라가 그대로 계승했고 짧은 혼란기는 곧 수습됐다.
당나라는 중국 역사상 가장 열린 제국이었다.
당시 귀족들은 '서역'의 물건이라면 환장을 했다.
1970~1980년대 우리나라 사람들이 '미제'라면 눈이 돌아갔던 그런 느낌이랄까?
덕분에 서역에서 건너온 불교는 극도로 융성했다.
귀족들의 후원을 받아 불교 미술은 점점 정교하고 화려해졌다.
둔황은 장안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수백 년 동안 조성된 석굴이 있는 곳에 한 획을 더하기 위해 더 많은 승려와 예술가들이 줄을 이었다.
막고굴 전체에 약 490여 개의 석굴이 있는데, 그중 225개가 당나라 때 조성된 걸로 추정한다.
그러나 화려한 시절은 짧았다.
당나라가 망하고 간쑤성 회랑지대가 서하(西夏)의 세력권에 들어가면서 막고굴은 세간의 관심에서 멀어졌다.
칭기즈칸이 아시아와 유럽 동부를 휩쓸고 원(元) 나라를 세운 후에도 만들어진 석굴도 있지만 극소수였다.
이후 원나라가 멸망하고 실크로드 무역이 쇠퇴하면서 막고굴은 완전히 잊히게 됐다.
세월이 흘러 청(淸) 나라 강희제 때 영토를 확장하면서 다시 존재가 드러났고, '천불동(千佛洞)'이라 불렸다.
방치됐던 막고굴은 1900년 '장경동(藏經洞)' 발견으로 일대 전환점을 맞이한다.
막고굴에 굴 파고 살고 있던 도사 '왕원록(王圓籙)'이 새로 도관을 지으려고 청소하다가 우연히 석굴을 하나 발견했다.
작은 쪽문을 열자 약 3㎥ 정도 되는 작은 방이 드러났는데, 그 안에서 무려 5만 여 점에 달하는 불경과 각종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유물의 양이 어찌나 방대했는지, 장경동에서 나온 유물을 연구하는 '돈황학(敦煌學)'이라는 학문이 생길 정도였다.
그리고 잘 알려진 대로 1907년에는 스타인이 유물 7000여 점을 사들여 대영박물관에 옮겨놨고, 1908년에는 펠리오가 또 한 번 쓸어다가 프랑스로 가져갔다.
그 유명한 혜초의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이 바로 여기서 발견됐다.
막고굴에 가기 위해서는 지역 여행사의 투어에 참가해야 했다.
새벽 6시부터 시작되는 일정 탓에 아침잠 많은 나는 내내 괴로웠다.
흔들리는 버스에서 내려서 본 막고굴은 장관이었다.
그 규모와 사람들의 정성을 생각하면 종교적인 경건함이 가득해야 하겠지만, 역시나 무시무시한 인파 때문에 정신이 날아가기 직전이었다.
가이드를 따라 막고굴 투어를 시작했다.
지금은 말라붙었지만 이전에는 유량이 풍부한 강이 흘렀다는 오아시스의 한쪽 벽면을 따라 벌집처럼 굴이 뚫려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1997년에 발견되어 2001에야 보수가 끝나 일반에 공개됐다는 대불을 보니 입이 딱 벌어졌다.
밖에서 보면 산의 벽면을 타고 9층 높이로 새워진 건물이다.
안으로 들어가면 내부는 텅 비어있고, 그 거대한 공간 안에 대불이 앉아 있다.
중국에서 세 번째로 거대한 대불이다.
가이드의 이야기인즉슨, 천불동에는 약 1000여 개의 동굴이 있으며 그중 400~500개 정도가 발굴되었는데, 아직 발굴되지 않은 동굴도 부지기수란다.
둔황의 유적과 유물만 연구하는 '돈황학'이란 새로운 학문을 탄생시킬 정도의 엄청난 유적이다.
보고 있자니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장소를 옮기니 또 다른 대불이 나타났다.
9층대불 보다는 작지만, 건축 양식이 독특하다.
굴을 만들 때 바닥을 넓게 하고 천장을 좁게 만들어서 굴에 들어가서 불상을 올려다보면 실제보다 훨씬 더 커 보인다.
특이한 건 바닥이다.
당대부터 청대에 이르기까지 보수를 거듭했다.
그 결과 바닥의 벽돌을 들어낼 때마다 이전 시대의 바닥돌이 드러난다.
실제로 굴의 한쪽 구석에 바닥돌을 한층씩 들어내서 비교해 볼 수 있게 만든 곳이 있다.
왜 그렇게 했냐고 물어보니, 지금이야 천불동 앞의 하천이 말라버렸지만, 이전에는 상당히 수량이 풍부한 강이었단다.
하여 하천이 범람할 것을 두려워한 사람들이 시대마다 바닥을 새로 깔고 높이를 높여 이런 상태가 됐다고 한다.
막고굴은 규모도 규모지만 일반에 공개한 지역이 제한적이다.
때문에 모든 유적을 본 건 아니라 말하기가 조심스럽다.
다만, 이곳에서 본 불상과 탱화들은 역사적 가치는 따지기 어려울지 몰라도, 예술적인 아름다움은 크게 와닿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국가 차원의 역사가 아닌 개인이 굴을 파고 만든 결과물들의 집합이다 보니 동원할 수 있는 예술적 역량에는 한계가 있었을 테다.
그래서 느낀 건 우리나라의 불상이 정말 정교하고 아름답다는 것이었다.
쉽게 볼 수 있어 오히려 그 아름다움을 못 느낀 것일까?
왜 경주 석굴암의 본존불이 그렇게 격찬을 받는지, 반가사유상이 세계적인 보물이 됐는지, 서산 마애삼존불의 미소를 보고 사람들이 매혹되는지 이제 이해가 됐다.
막고굴 투어를 마치고 잠시 쉬었다가 명사산으로 향했다.
고운 모래가 끝없이 펼쳐진 사막으로, 사구 위에 오르면 바람이 우는 소리가 난다고 해서, 울 명(鳴), 모래 사(沙) 자를 써서 명사산(鳴沙山)이다.
야트막한 사구 하나를 끼고 생성된 초승달 모양의 오아시스 '월아천(月牙川)'이 랜드마크다.
모래턱을 도는 순간 나타나는 월아천의 자태는 고혹적이다.
과거 사막을 오가던 대상이 들러 목을 축이고 쉬었을 것 같은 오아시스가 바로 이렇게 생겼을 것 같은 모습이다.
물론, 주변을 새까맣게 메운 사람들을 지워낼 수 있는 상상력이 필요하다.
둔황 시내에서 멀지 않다는 말에 자전거를 대여해 끌고 나섰다.
실제로 멀지 않은 거리인데, 내가 갔을 당시는 매표소 전방 300m 구간 도로를 포장 작업하는 중이었다.
덕분에 꽤 먼 거리를 우회해야 했는데, 길이 비포장 도롱에 온통 자갈밭이었다.
흙먼지를 뒤집어쓰며 악전고투 끝에 명사산에 다달았다.
당시 여행 커뮤니티에는 명사산에 공짜로 입장할 수 있는 '개구멍'에 대한 정보가 넘쳐났다.
그도 그럴 것이 사방이 끝없는 사막인 곳에 무슨 수로 경계를 만들고 입장료를 받겠는가?
궁여지책으로 일부 구간을 철조망으로 둘러놨는데, 유지 보수가 안 돼서 허물어진 곳이 꽤 많다는 경험담이 줄을 이었다.
그러니 그리로 들어가서 사람들과 섞이면 상황 종료였다.
커뮤니티 정보대로 명사산 입구에서 외곽으로 조금 돌아나갔더니 먼저 도착한 중국인 가족이 나보다 앞서 잠입을 시도하고 있었다.
정보와 달리 허물어진 곳이 없어서 꼬마들이 철조망 아래 모래를 파고 진짜 '개구멍'을 만들어놓은 상태였다.
그렇게 명사산에 들어섰다.
모래가 일렁이는 듯했다.
높낮이가 제각각인 사구가 끝도 없이 펼쳐져있었다.
명사산이 있는 지역은 사시사철 강풍이 분다.
밤 사이 불어닥친 폭풍은 매일 이 산의 모래를 퍼다 저 산으로 나르고, 저 산을 깎아 이 산을 높인다.
급격하게 쌓아 올린 모래산은 칼 같은 능선을 타고 흐른다.
경사면은 쏟아질 듯 각도가 가파르다.
사구 하나를 찍어 정상에 올랐다.
남들은 신비한 사막의 오아시스 월아천과 명사산의 일몰을 입에 침이 마르게 칭찬했지만, 이상하게 별 감흥이 없다.
명사산을 찾기 전에 사진으로 봤던 월아천은 새파란 하늘 밑에 맑게 빛나는 샘물이었다.
하지만 보이느니 사막을 까맣게 덮은 관광객들이고, 들리느니 일행을 불러대는 시끄러운 중국말이다.
사막으로 들어가 좀 더 높은 산으로 올라가면 더 넓은 사막을 볼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어 계속 안쪽으로 발을 옮겼다.
발이 푹푹 빠지는 급경사의 모래산을 쉬지도 않고 걸으니 몸이 모래 속으로 빨려 드는 느낌이다.
월아천 뒤쪽 언덕에서 시작해서 모래산을 하나 넘으니 그 뒤로 높은 언덕이 하나 더 있다.
30분 정도 걸어 겨우 500m 정도 전진해 산 정상에 올랐더니, 그 뒤로 방금 올라온 산보다 두배는 높아 보이는 산이 있다.
말 그대로 첩첩산중이다.
허파가 터질 것 같아 산 꼭대기에 주저앉았다.
모래산 꼭대기는 그야말로 칼날이다.
거기에 양쪽 엉덩이를 나눠 걸터앉아 육포 두어 조각과 물로 허기진 배를 속였다.
다시 일어나 앞에 있는 산을 향해 전진했다.
한 시간 넘게 발이 푹푹 빠지는 급경사의 모래 언덕을 탔더니 체력 소모가 심하다.
뜨거운 햇볕에 달궈진 머리 또한 제정신이 아니다.
산의 경사면은 엄지손가락 만한 도마뱀들의 마을이다.
내 발 옆을 이리 뛰고 저리 나르는 도마뱀을 피해 다시 걸음을 옮겼다.
모래가 어찌나 곱고 부드러운지, 급경사에서는 한 발이라도 잘못 내딛으면 저 위쪽으로부터 모래가 부서져 흘러내려 내 몸을 모래산 밑으로 끌어내린다.
내딛는 한 발 한 발에 온 신경을 집중시키고 보폭을 반보 이상 가져가지 못하니 중노동도 이런 중노동이 없다.
그렇게 다시 30분 정도를 올랐을까?
머리를 들어보니 손을 뻗으면 닿을 만한 곳에 정상이 보인다.
갑자기 힘이 솟구쳤다.
악을 쓰고 내달려 정상에 다다른 순간 저절로 감탄사가 튀어나왔다.
시선이 닿는 곳까지 모래산이 펼쳐져 있고, 지평선이 나타나야 할 즈음에선 아지랑이처럼 모래가 피어올랐다.
사방의 모래산들은 바람에 쓸릴 때마다 모양을 달리했다.
점점 기우는 햇빛을 받은 사면은 시시각각 색을 바꿨다.
이런 장관은 전혀 기대하지 못했던 것이기에 잠시 멍하니 아무 말도 않고, 아무 생각도 않고 황홀경에 빠졌다.
해가 거의 넘어가면서 발 밑의 모래가 식어가는 게 느껴졌다.
기운을 차릴 때쯤 갑자기 귀에서 휘파람 소리가 들리며 강한 바람이 몰아쳤다.
이 휘파람 소리 때문에 사막 이름이 울음 명, 모래 사, 명사산이다.
잠시 감상에 젖으려는 순간 어마어마한 모래바람이 내 뒤통수를 때렸고 난 그대로 모래 언덕에 엎어졌다.
고개를 들고 뒤를 돌아보다 몰아치는 모래바람에 바로 눈을 감아버렸다.
실눈을 뜨고 바라 보니, 햇빛 반대쪽 사면의 식어버린 공기가 산등성이를 타고 올라와 산꼭대기에서 크게 한 번 모래를 휘감아 올린 후, 그 기세를 그대로 살려 회오리바람을 만들며 반대편 산등성이를 타고 내려갔다.
산봉우리에서 바람이 휘감길 때 쳐올리는 모래 먼지가 무시무시했다.
모래바람은 점점 내가 있는 쪽으로 세를 넓히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여기까지인 듯했다. 찬 바람을 느끼며 산을 굴러내려 와 월아천으로 돌아갔다.
두 시간 반 동안 죽자 사자 오른 곳을 20분 만에 미끄러져 내려오니 허무한 생각도 들지만, 산 꼭대기에서 본 장관은 그 고생을 충분히 보상하고도 남았다.
여행 당시 중국 여행 커뮤니티에는 이른바 '개구멍'에 대한 정보가 넘쳐났다.
입장료를 지불해야 하는 관광지에 몰래 숨어 들어가는 루트에 대한 정보였다.
당연히 돈을 아끼려는 게 목적이었었는데, 문제는 이런 행동들을 일종의 '전리품'처럼 여기는 분위기가 팽배했다는 점이다.
커뮤니티에 '어디 어디에 몰래 입장했다', '이렇게 하면 된다' 등의 후기와 정보가 올라오면 댓글이 주르륵 달렸고, 엄지척을 날리곤 했다.
당연히 잘못된 행위고 비판받아 마땅한데, 반론도 존재했다.
이런 행위가 이뤄지는 지역은 대부분 신장 위구르족 자치구와 시장 티베트 자치구였다.
잘 알려진 대로 이 지역은 최근까지도 독립운동이 일어나 유혈사태로 번진 곳이다.
공산당은 국공내전과 태평양 전쟁에서 승리한 1945년 이후 중화인민공화국을 건국했다.
이 과정에서 기존에는 별개의 국가로 여겨졌던 지역을 강제로 합병하면서 심각한 민족 갈등이 불거졌다.
공산당의 논리는 '자본가에게 수탈당하는 인민을 해방했다'는 건데, 현재는 중국 정부가 한족 우대정책을 펼치면서 소수민족을 수탈하는 사례가 빈번하게 발생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다.
따라서 이에 반발하는 소수 민족(특히 신장과 시장 지역)의 봉기가 끊이지 않았지만, 강력한 공산당 통제 하에서 모두 유야무야 잊혔다.
'개구멍' 옹호론의 논리는 여기서 출발한다.
공식적으로 신장과 티베트는 중국의 영토지만, 중국 외부에서 민족자결주의의 관점으로 바라보면 침략이며, 이 지역의 관광 자원을 통해 벌어들인 수익이 중국 정부로 흘러들어 가는 것 또한 수탈이라는 시각이다.
따라서 중국 정부의 행태에 반감을 가진 사람들은 당당하게(?) 개구멍을 통해 저항한다는 입장이었다.
물론 논리적인 허점은 수두룩하다.
이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갖고 깊게 연구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여행 커뮤니티에서 뜬금없이 달라이 라마의 다람살라 망명 정부의 활동에 대해 토론하는가 하면, 중국 현대사에 대한 토론이 일어나곤 했다.
내가 보건대 대부분은 그냥 일탈이 주는 쾌감을 맛보기 위해 개구멍을 파고들었다.
그 와중에 소수민족 문제는 좋은 핑곗거리였을 뿐이다.
그러나 이 글에서 다룰 내용은 아니니 논외로 한다.
솔직하게 말하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린 시절의 치기였고, 관심병의 연장이었다.
일련의 경험을 커뮤니티에 공유하면서 사람들과 웃고 떠드는 게 재미있었고, 남들은 해보지 못한 경험을 했다는 이상한 우월감에 도취되기도 했다.
부끄럽지만 솔직하게 밝히지 않으면 안 될 부분이다.
개구멍에 대한 내용은 이후 자주 등장할 것이기에 미리 밝혀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