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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집사 김과장 Apr 07. 2022

중국인의 사고는 자기중심적이다.

가욕관 嘉峪關

Prologue


코로나19는 여느 전염병처럼 오래지 않아 잡힐 거라 생각했다. 

2003년 사스처럼 심각하긴 해도 오래 가지는 않을 줄 알았다. 

심적으로 지쳐가는 건 모두가 마찬가지다. 모두가 힘들고 지친다.

역마살이 낀 사람들은 특히 죽을 맛이다. 



하지만 방법이 없다.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가치 판단의 최우선 순위에 놓지만, 때로는 공동체의 안위를 위해 구성원의 의무를 다 해야 한다. 

이 상황에 할 수 있는 건 예전의 기록을 훑어보며 잠시나마 위안을 찾는 것 뿐이다.

그렇게 몇 년 만에 20여년 전의 기록을 꺼냈다. 

코로나19 때문에 갇혀 지내는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은 상황이었다. 신기했다.



당시 선택은 두 가지였다. 

귀국하거나, 학교에서 버티거나.

12월 중순에 홍콩에서 사스가 시작됐고,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아 중국 전역의 학교에 봉쇄령이 내려졌다. 

유학생들은 귀국하거나 기숙사에 갇혀 지내야 했다. 

귀국하면 3월 학기에 맞춰 복학할 수 있었다. 

하지만 3학년 1학기에 복학하면 다시 휴학하고 어학연수를 떠날 수 있다는 보장이 없었다. 

어영부영 시간을 보내다가 졸업반이 되면 '나이롱'이 될 것 같았다. 

겨우 귀가 열리고 말문이 트이던 시기였다. 

조금만 더 하면 어학 때문에 불안하지는 않을 듯했다. 

그래서 그냥 남기로 했다. 

당시 내가 다니던 학교의 유학생들 절반 이상은 귀국했다. 

남은 사람들은 대부분 현지 학교에 재학 중인 본과생이었다.



3월 학기가 시작됐고, 몇 명 남지 않은 수업 분위기는 개판이었다. 

기숙사 생활은 숨이 막혔다. 

수업이 끝나고 나면 남는 시간은 기숙사 방에 갇혀 지내야 했다. 

건물을 나갈 수 있는 건 일 주일에 한번, 생필품을 사기 위해 학교 교직원의 감시하에 인근 마트에 다녀오는 날 뿐이었다.



학생들의 일탈이 시작됐다. 

한밤중에 몰래 학교 담을 넘어 술집으로 향하는 일이 속출했다. 

그런 상황에서 마음을 다잡고 공부하는 사람은 극소수였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처음에는 수업 진도를 따라가려고 노력했지만, 몇 주가 지나자 정신이 나가버렸다. 

담을 넘지는 않았지만, 기숙사 방에 틀어박혀 수업을 빼먹기 일쑤였다. 

이따금 수업에 들어가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 알아듣기 어려웠다. 

5월이 지나고 6월이 되면서 난 한 학기를 날렸다는 걸 깨달았다. 

전환점이 필요했다.



6월 중순에 봉쇄령이 풀렸다. 

학교 교무과 직원을 찾아 상담했고, 2학기 등록을 취소했다. 

돌려받은 등록금과 기숙사비를 여비로 배낭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계획은 6개월. 

북경을 기점으로 반 시계방향으로 중국 국경선을 따라 한바퀴 도는 일정을 짰다. 

폴 서로우의 <중국기행>을 읽고 여행의 밑그림을 그렸다. 

등록금과 기숙사비를 환불받으니 약 400만원 정도가 나왔다. 

당시 중국 물가와 환율(1.25元=100원)로 따지면 6개월 정도는 버틸 수 있을 듯했다. 

물론 험하게 자고 거칠게 먹어야 했다. 

혈기넘치는 스물 다섯이었고, 이 나이 대의 배낭여행은 응당 그래야 한다고 믿었다.





2003년 7월 4일, 종강과 동시에 길을 나섰다.

대도시를 벗어나 시골과 오지를 돌아다녔다. 

언제나 사랑받고 환영받았던 순진했던 시절의 기억은 온갖 사기꾼과 협잡꾼들을 만나면서 조각났다. 

그래도 대륙의 장엄한 자연 경관에 감탄했고, 순박한 사람들의 인정에 감동했다.


중국의 빈부격차는 기가 막혔다. 

그러나 자기가 가진 것에 만족하고 감사하며, 즐겁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행복한 인생이 뭔지 심각하게 고민했다. 

차별받는 소수민족의 삶을 그네들의 입을 통해 직접 들을 수 있었다. 

학교에 있었더라면 절대로 할 수 없었을 경험이었다. 

그 시절은 내 가치관과 행동 양식을 구성하는 기둥이 됐다. 

이때부터 나는 "한국인은... 중국인은... 일본인은..."이라며 국민성을 도매금으로 넘기는 사고방식과 화법을 배척했다.



20년이 지나 머리가 조금 식은 뒤 다시 돌아보니 많은 것이 변했다. 

개도국이었던 중국은 패권 국가가 됐다. 

미디어를 통해 보는 중국 사회는 중화주의에 매몰됐고, '1등'이라는 가치에 광적으로 집착한다. 

그 시절 만났던 중국 사람들은 중국의 무질서와 시민의식을 부끄러워했다. 

하지만 요즘 만난 많은 중국인들은 이에 연연하지 않는다. 

자국의 국력을 자랑스러워하며, 당연히 자국이 세계의 중심이며, 그래야 한다고 믿는다. 

역사적인 경험을 통해 고개를 숙였던 중화주의가 고개를 빳빳이 들고 있다.



물론, 짧은 여행을 통해 얻은 경험으로 재단하는 건 무리다. 

그래도 파편적인 모습을 통해 그들의 삶을 살짝 들여다보는 건 가능하지 않을까?

내가 그 시절을 통해 변화한 것처럼, 독자들께서도 잠시나마 생각해보는 기회가 됐으면 한다.

집단을 기준으로 타인을 재단하기보다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좀 더 건강한 관계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문득, 그때가 그립다. 






중국인의 사고는 자기중심적이다



여행의 시작은 베이징이지만, 이미 베이징에서 3개월 거주했던 터라 여행이라고 부르기 어색하다. 

그러다 보니 시안을 떠나 가욕관으로 향하는 기차를 탄 뒤에야 여행을 떠난 실감이 났다. 

배웅하는 친구들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진 후 고개를 돌려 바라본 기차 안이 낯설었다.

뜬금없이 배가 고팠다.  

일단 배부터 채우기로 했다. 

중국의 열차 안에는 칸마다 거대한 급탕기가 있다. 

모두들 손에 보온병을 들고 다니며 차를 홀짝이는 나라다 보니 어딜 가든 뜨거운 물은 필수다. 

공장의 기계가 연상되는 육중한 은빛 물탱크는 24시간 펄펄 끓는 물을 공급한다. 

땅덩어리가 넓어 다른 도시로 갈 때 걸핏하면 열차 안에서 밤을 지내야 하는데, 이때 이 뜨거운 물은 꽤나 요긴하다. 

사발면을 비롯한 각종 간편식을 먹는데 아무 불편함이 없다. 


나는 기차 여행을 할 때면 열차에서 때워야 하는 끼니 수를 생각해서 그 2/3 수량만큼 사발면과 햄, 과일 등을 준비해 끼니를 해결하곤 했다. 

12시간 정도라면 아무 문제없지만 24시간 이상 열차를 타게 되면 이게 심각한 부작용을 낳는데, 열차에서 내릴 때쯤에는 얼굴이 퉁퉁 부어 다른 사람이 된다는 거다. 

그래서 하루 한 끼 정도는 중간에 들르는 역마다 진을 치고 있는 상인들에게서 음식을 사 오거나, 열차 내에서 파는 '허판(盒饭, 도시락)'을 사 먹곤 했다. 


허판은 스티로폼 도시락 용기에 밥을 담고 그 위에 야채와 고기 볶은 찬들을 서너 종 올려낸 덮밥이다. 

뚜껑을 열고 몇 술 뜨다 보면 어느샌가 다 섞여 개밥 같은 모양새로 바뀌지만, 맛은 나쁘지 않았다. 

인스턴트식으로 때울 때 부족하기 쉬운 비타민을 어느 정도 섭취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꽤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가욕관 장성의 끄트머리 어디쯤. 



시안-쿠얼라 간 기차는 에어컨 없이 역마다 들리는 완행열차다. 

30도를 넘나드는 7월 초, 황야를 가로지르는 기차는 달리는 찜통이었다. 

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메마른 흙과 수분이라곤 눈 씻고 찾아봐도 없을 듯 건조한 둔덕, 그리고 그 위를 덮은 붉은색 벽돌집들 일색이다. 

황톳빛 흙 위에 누런 먼지가 덮인 붉은 벽돌집이 메마른 대지를 한결 더 갈증 나 보이게 만들었다. 


그 메마른 흙 위에서 농작물이 자라고 있었다. 

기차를 타고 이동할 때마다 바깥 풍경을 보면서 "땅이 있으면 논밭을 만든다"는 중국 속담을 실감했다. 

이 거대한 농토는 보기만 해도, 생각만 해도 숨이 막힌다. 

중국이 식량을 자급하지 못하면 세계적인 식량대란이 온다는 말은 결코 거짓말이 아니다. 




6인실 잉워(硬卧) 같은 칸에 탄 이들은 퉁퉁한 남학생과 통통한 아가씨다. 

당시는 대도시를 벗어나면 외국인을 신기하게 바라보는 중국인의 시선이 일상인 시기였다. 

둘은 계속 나를 흘끗흘끗 쳐다보다가 눈이 마주치면 이내 시선을 피하곤 했다. 

낮잠을 자고 일어나 국수를 한 그릇으로 점심을 해결하는데, 그걸 본 아가씨가 키득거리며 웃는다. 

잠시 후 객실 담당 승무원과 남학생이 합세해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대화 주제는 나였다. 

외국인이 중국어를 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는지 대놓고 나에 대한 궁금증을 주거니 받거니 하는데, 품평회에 오른 물건이 된 기분이었다. 

그러다가 결국 승무원이 말을 건넸다. 




이들의 관점은 신선했다. 

아가씨는 국수를 휘젓는 젓가락질이 능숙하길래 중국인인 줄 알았다고 했다. 

남학생은 영어 가이드북을 보고 영어 공부하는 중국인이라고 생각했다. 

탓하고 싶지는 않지만, 자기중심적인 사고는 대륙 사람의 특징 중 하나다. 

검은 머리의 동양인은 일단 중국인으로 생각한다. 

그도 그럴 것이 56개 소수민족이 모여 사는 나라가 아니던가. 


이 때문에 가끔 웃지 못할 상황이 벌어지곤 했다. 

시골 오지로 들어가면 내가 중국어를 하건 우리말을 하건 상관없이 나를 중국인으로 여겼다. 

때로는 조선족으로 생각한 경우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사투리를 쓰는 중국인으로 착각한 경우가 많았다.

사실 중국인들에게 사투리는 외국어나 마찬가지다. 

간쑤성에서 버스로 이동할 때에는 차비 외에 외국인 보험료 40원을 의무적으로 부과해야 하지만, 나에겐 아무 말도 묻질 않았다. 같은 이유다. 


승무원은 내가 쓰레기를 어디다 버려야 할지 고민하는 모습을 보고 외국인이라 생각했다. 

중국인들의 쓰레기 문제는 20년이 지나도 발전이 거의 없는 듯하다. 

지난해 베이징에 갔을 때, 사람들이 일회용 용기에 담긴 음식물을 그대로 길거리 쓰레기통에 처박는 걸 보고 현기증이 났었다. 

승무원은 사스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다. 



"중국인들이 이렇게 지저분하게 사는데 병이 안 걸릴 수가 없지. 사스가 창궐한 이후에야 겨우 위생관념이 생기기 시작했어. 어쩌면 사스가 발병한 게 차라리 다행일지도 몰라."





완행열차는 계속해서 간쑤 회랑을 달려 황하의 지류 위를 통과하는 철교 위에 올랐다. 

황하는 물 반 진흙 반이다. 

하수는 아니지만 결코 식수도 아닌 것으로 보이는 누런 물이 비단결처럼 꿈틀대며 흘렀다. 


한참을 더 달리니 사막지대로 들어섰다.

거친 돌산과 황량한 모래산이 번갈아 나타나고, 기차는 듬성듬성 솟은 산 사이에 펼쳐진 황무지를 가로질렀다. 

한때는 박력 넘치게 위로 뻗었을 산이 억겁의 세월을 맞은 끝에 밋밋한 구릉으로 변했다. 

바싹 마른 대지 위에는 하천이었던 흔적들이 할퀴고 지나간 자리가 남았다. 

마치 노인의 깊은 주름을 보는 듯했다.

기차가 크게 호를 그리며 굽이돌 때면 창밖으로 보이는 기차 꽁무니에서 모래먼지가 구름처럼 일어났다. 

간쑤성의 사막지대는 와호장룡에서 장첸과 장쯔이가 처음 만나던 그 사막 같다. 

당장이라도 저 산 꼭대기에서 반천운이 도적떼를 끌고 불쑥 나타날 것만 같았다.


더위에 지쳐 잠시 눈을 감았다 뜨니 사막 너머 머리에 흰 눈을 이고 허리에 구름을 두른 설산이 보였다. 

무더위에 땀을 뻘뻘 흘리며 설산을 바라보고 있자니, 현실감이 없었다. 

세상은 넓고 내가 체험한 세상은 정말로 좁다는 걸 알았다. 

간쑤 지방을 통과하는 동안 내내 입을 벌리고 풍경에 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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