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욕관(嘉峪关)
아마도 <영웅문>에 가욕관이 나왔던 것 같다.
새외(塞外)로 통하는 관문.
주인공에게 감정 이입한 독자의 입장에서 가욕관은 현실과 미지의 세계를 가르는 관문이었다.
그러니 여행의 첫 번째 목적지는 당연히 가욕관이어야 했다.
가욕관은 명 태조 홍무제(주원장) 시절 만들어졌다.
동쪽 란저우에서 서쪽 옥문관(玉門關)까지 이르는 하서주랑(河西走廊)의 서쪽 끝단에 자리한, 가장 큰 관문이다.
대륙의 동서를 포괄하는 대제국이었던 한(漢)나라와 당(唐)나라 서역과의 경계가 옥문관이었다면, 영토가 축소된 명나라 때의 경계는 가욕관이었다.
만리장성의 동쪽 끝이 산해관이라면 서쪽 끝은 가욕관이다.
요즘 중국에서는 동북공정의 일환으로 산해관을 애써 무시하고 있지만.
남쪽에는 험준한 기련산맥이 솟아 있고, 북쪽으로는 고비 사막이 펼쳐져있다.
좁다란 회랑 지역인 데다 관문 앞에는 토뢰하(讨赖河)가 흐르는 대협곡이 길을 끊어놓은 천혜의 요새다.
인공위성에서 보인다는 인류 최고, 최대의 건축물 만리장성은 '진시황 때 만들었다'라고 오해하는 사람이 꽤 있다.
중원을 차지한 한족은 늘 몽골, 흉노 등 북방 기마민족의 침입에 시달렸다.
시달렸다기 보단 속수무책으로 털렸다.
얼마나 징그러웠으면 그들이 아예 못 내려오게 성을 쌓을 생각까지 했을까?
이런 상황은 진시황 이전에도 마찬가지였다.
국경 지대에 살던 사람들은 여기저기, 나름대로 산발적으로 산성을 쌓아 자기네 살 곳을 방어했다.
즉, 진시황 이전에도 성곽 자체는 띄엄띄엄 조성이 되어 있었고, 진시황은 그걸 연결하는 공사를 한 거다.
가욕관(서쪽 끝)부터 산해관(동쪽 끝)까지 이어지는 지금의 형태는 명나라 때 와서야 완성된다.
실제로 가욕관 부근의 장성과 북경 인근에서 보는 장성은 지역적 특색을 반영해 성곽의 조성 형태도 재질도 다르다.
가욕관은 훌륭한 관광 자원에 비해 인프라는 형편없었다.
대중교통은 미비했고 사람들은 불친절했다.
여행사의 패키지 투어에 참가하지 않으면 이동이 불가능했다.
하지만 시끄러운 투어 팀에 참여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고심 끝에 택시를 한 대 통으로 대절했다.
하루 요금은 80위안, 당시 환율로 우리 돈 1만 5000원 정도였다.
사스가 휩쓸고 간 탓에 중국 관광산업이 위축된 탓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당시 중국 물가 자체가 워낙 저렴했다.
여행자에게는 축복이었다.
물론 지금은 그딴 거 없다.
처음 들른 곳은 만리장성의 서쪽 끝인 '장성제일돈'이었다.
가욕관 시를 남북으로 가로질러 뻗은 현벽장성이 토뢰하와 만나는 곳에 세워진 성루다.
지금은 비바람에 풍화되어 성의 모습은 간데없고, 누런 황토로 된 거대한 바위 덩어리와 성벽의 흔적만이 남았다.
어디선가 '쿠르릉'하는 굉음이 들렸다.
제일돈에 올라보니 발아래는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고, 그 밑으로는 황하가 세차게 흐르고 있었다.
협곡 건너편은 황량한 사막이다.
가욕관 시의 지도를 보면 남쪽의 기련산맥과 북쪽의 고비 사막 사이 구간이 어이없을 정도로 좁다.
게다가 틀어막고 있는 지역을 제외하면 산과 강이 천혜의 경계선을 만들고 있다.
이 때문에 흉노족들이 넘어올 수가 없어서 장성 축조를 여기서 마쳤다.
수긍이 갈만한 규모다.
베이징에서 팔달령과 거용관 장성을 보고 나니 사실 현벽장성 자체는 별로 볼 게 없었다.
흙으로 만든 성벽은 낮았고, 성을 축조한 흑산(黑山)은 밋밋한 언덕에 가까웠다.
나무, 바위 등 장애물이 없어서 병사들이 내달리면 그대로 성벽에 닿는 구조다.
방어선으로서의 역할을 기대하기는 어려웠을 듯한데, 이 정도 만으로도 충분했나 보다.
성벽을 반쯤 올랐을 때 성벽 너머 먼 곳에 자리한 사원에서 구슬픈 음악소리가 흘러나왔다.
묘하게 사람의 감정을 자극하는 소리였다.
성벽 너머로는 끝도 없이 황무지가 펼쳐졌는데, 그 황무지를 가로질러 모래 구름을 일으키며 한 무리의 기마병들이 달려올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성벽 끝에 다다르자 웃고 떠드는 사람들의 소리는 멀어지고 바람소리만 들려온다.
'휘잉'하고 부는 소리가 아니라 '우웅'하고 우는 소리다.
여느 바람 소리가 공간을 할퀴고 지나가는 날카로운 소리라면, 이곳의 바람 소리는 저 넓은 황야의 공기를 쓰나미처럼 밀어붙이는 듯 웅장한 소리다.
스물다섯, 좁은 세상만 보고 살았던 내게 이런 압도적인 공간감은 처음이었다.
중국 문학을 공부하면서 '대륙의 호방한 기질'이라는 표현을 참 많이도 봤는데, 문득 가슴이 웅장해졌다.
막연하게 뛰쳐나온 여정에 목적이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