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루판 吐魯番
둔황에서 투루판까지 가는 길은 정말 멋있다.
처음엔 "아!" 하는 감탄사가 절로 나오고, 조금 있으면 "와!"하고 탄성을 내뱉게 된다.
마지막에는 비명을 지를게 될 만큼 아름답다.
둔황을 떠나 2~3시간쯤 달려 신장 지역으로 들어서면 제일 먼저 지평선 끝에 서있는 설산이 맞아준다.
한참을 달려 산악지대로 들어서니 기괴한 모양의 바위산들이 이어진다.
투루판으로 들어서니 산이 다시 붉은 적토로 바뀐다.
지나는 길에 있는 '화염산'을 보니 정말로 불덩어리 같다.
7월 말, 신장 지역의 평균 기온은 40도를 넘나 든다.
그러나 투루판은 해가지면 선선하다.
도시도 예쁘게 잘 꾸며져 있고, 야시장도 활기차지만 시끄럽지 않아 좋다.
거칠어 보이지만 항상 여유 있는 위구르 사람들도 좋다.
느끼하지 않은 신장라면은 정말 맛있다.
그리고 내가 묵은 투루판 빈관 카운터 직원 아가씨는 정말 예뻤다.
체크인하고 "谢谢(감사합니다)"했더니 "不客气(부커치, 천만에요)"하고 방긋 웃는데, 그 눈웃음에 같이 있던 청년들이 죄다 녹아났다.
투루판에 머무는 동안 일정이 맞아 같이 다닌 친구들이 그 순간 모두 연적으로 변했다.
여행을 시작한 지 보름쯤 지났다.
체력적으로 힘들 시기는 아니었지만, 신장의 여름은 외지인이 버텨낼 재간이 없었다.
게다가 북경 표준시에 맞추다 보니 시차가 4시간이라 해가 늦게 뜨고, 늦게 진다.
한창 활동할 시간이 불볕더위가 기승을 부릴 시간이다.
이걸 생각 못하고 하루 돌아다녔다가 '사람이 구워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덕분에 매일 아침 늦게까지 잠을 자고, 오후 늦게 하루를 시작하는 패턴으로 바꾸면서 생체 리듬이 깨졌다.
말도 안 되는 여름 감기가 찾아왔고, 수면 리듬이 바뀐 탓에 하루 종일 몸이 무거웠다.
비타민이 필요했다.
과일을 사다 먹고 싶은데 정작 깎는 데 쓸 칼이 없다.
과도나 하나 살 생각으로 동네 시장을 찾았다.
좁아터진 골목길에 난전이 펼쳐져 있었다.
동네 시장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위구르 족 전통 의상과 공예품을 파는 가게도 제법 있어 눈이 즐거웠다.
보석(물론 가짜지만) 장식이 박힌 과도 하나를 이리저리 살펴보고 있는데, 등 뒤에서 누군가 '툭'하고 부딪쳤다.
고개를 돌려보니 시커먼 남자 하나가 내 뒤에 바짝 붙어서 딴청을 피우고 있다.
같이 갔던 일행이 힙색 지퍼가 열렸다며 닫으라고 알려줬다.
지퍼를 닫고 과도를 산 후 시장길을 걷는데 또 '툭'하는 느낌이 난다.
이상한 기분이 들어 고개를 홱 돌렸더니 아까 그 남자가 내게서 멀어지고 있었다.
그제야 감이 와서 힙색을 살펴보니 방금 잠근 지퍼가 반쯤 열려있다.
다행히 물건은 잃어버리지 않았다.
처음엔 분노가 치밀었는데, 소지품이 멀쩡한 걸 보니 헛웃음이 나왔다.
여행지에서 소매치기당한 이야기를 들으면 다들 쥐도 새도 모르게 당했다는데, 이 동네는 그런 거 없다.
'이렇게 어설퍼서야 벌어먹고 살겠나'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교주가 제안해 동네의 이슬람 사원에 가보기로 했다.
관광지로 개방된 사원이 아닌, 정말 동네 사람들의 사원이었다.
시안에서 잠깐 대청진사를 둘러보긴 했지만, 관광객들이 너무 많아 사원이라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아잔이 흘러나오는 순백의 사원을 기대하며 차에 올랐다.
택시 타고 달려 사원 입구에 내리니 온통 위구르족 일색이다.
하얀 빵모자들 사이에 선글라스 세 개가 덩그러니 떨어졌다.
그제야 우리가 잘못 생각했다는 걸 깨달았다.
관대한 종교인의 마음으로 우리를 환영해줄 거란 착각은 오만이었다.
그들에게 우리는 그냥 불청객이었다.
눈치 보며 쭈볏쭈볏 들어가려고 하니 입구를 지키던 사람이 손을 들어 단호히 쫓아낸다.
혹시나 싶어 중국어로 "못 들어가나요?" 하고 물었다.
그랬더니 안색이 싸늘하게 바뀌고 대꾸도 안 한다.
한족에 대한 반감은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체감한 느낌은 서늘했다.
내가 한국으로 여행 온 외국인에게 친절했듯이, 혹은 중국 다른 지역을 다니며 만났던 친절한... 사람들은 아직 못 만났구나. 물론 나중엔 만났지만.
좌우간 난 어딜 가나 환영받을 거란 근거 없는 망상을 하고 있었다.
온실 속의 화초가 잡초가 된 순간이었다.
사원 입구에서 쭈뼛거리는 내 모습이 처량하기도 하고, 그네들에게 무작정 들이밀었던 나 자신이 부끄럽기도 했다.
발길을 돌리려는데 사원 안에서 젊은 청년 하나가 걸어 나왔다.
깨끗한 중국어다.
구세주를 만났다. 벙실벙실 웃으며 따라 들어갔다.
(* 이 친구는 이름은 편의상 '오스만'으로 칭한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혹시나 이 글을 단서로 이 친구의 신상이 노출되면 무서운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예배 시작 전까지 나무 그늘 아래서 오스만과 몇 마디 나눴다.
오스만은 우루무치에서 미술 선생을 한다고 했다.
오스만이 함께 있으니 사람들의 적개심이 사라졌다.
지나는 사람들이 모두 흘긋거리며 나를 구경한다.
관광지도 아닌 작은 사원에, 외국인 관광객이 덩그러니 앉아있는 꼴은 아무래도 이질적이었을 테다.
그러던 중 한 노인이 나를 조용히 잡아끌더니 더듬거리며 묻는다.
2003년 상반기는 아들 부시의 미국 정부가 이른바 '대량 살상 무기'를 빌미로 북한을 강하게 압박하던 시기였다.
9.11 참사의 후폭풍은 중국 변두리의 촌로도 긴장하게 만들었다.
당시 중국에서 만난 외국인들, 특히 중국인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에서 온 여행객들은 입을 모아 북한이 이라크 꼴이 날 거라고 예단했다.
아무래도 당사지인 우리가 보고 듣는 뉴스와는 정보의 질과 양에서 차이가 나겠지만, 그들은 확신에 차서 전쟁을 예언했다.
여행을 다니는 동안 무척이나 심란했다.
자기 나라의 국격과 국력은 나가 보면 절감하게 된다.
예배에 참여하려고 사원 안으로 들어가던 오스만이 나를 불렀다.
감사합니다.
예배가 끝나고 오스만의 집으로 향했다.
반지하 한 층과, 지상 1층으로 구성된 간단한 구조였다.
건물을 쌓은 게 아니라 굴곡 있는 지형의 경사면을 파고 들어간 토굴 형태다.
그래서인지 지하로 들어가니 무척 시원했다.
습기가 없고, 햇살만 따가운 투루판의 기후를 잘 이용해 지은 위구르족의 전통 건축 양식이라며 오스만이 자랑했다.
자랑해도 될 만큼 시원하다.
방에 들어서니 우리가 귀한 손님이라며 새 카펫을 내다 깐다.
분명히 차나 한 잔 하자고 했는데 음식이 끝도 없이 이어진다.
쟁반만 한 난과 간단한 요리를 내더니, 이어서 과자, 사탕, 홍차, 수박, 하미과까지 줄줄이 이어졌다.
성의를 생각해서 필사적으로 먹었지만, 그날 밤 복통에 시달려야 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오스만이 앨범을 꺼내 왔다.
중국 곳곳에 여행 가서 찍은 사진들이다.
오스만의 아버지는 여행사 사장이었고, 지금은 퇴직했단다.
본인은 우루무치에서 미대 나와서 미술 선생하고 있는데, 2년 후에 일본으로 유학 갈 생각이라고 했다.
얼마 안 있어 오스만의 연락을 받은 친구 '투르크(*당연히 이 친구도 가명이다)'가 합세해 나와 일행 포함 5명이 환담을 나눴다.
외국인들끼리 만나서 할 이야기는 자연 서로의 나라에 대한 궁금증을 푸는 것이다.
이야기가 오가는 도중, 이들은 대놓고 한족에 대한 반감을 표시했다.
걱정스럽게 물었더니 투르크가 "흥!"하고 거칠게 콧방귀를 뀌더니 열변을 토했다.
가슴이 아프다. 뭐라 할 말이 없다.
국제사회는 강대국 중국의 눈치를 보느라 신장과 티베트의 자주독립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다.
그나마 티베트는 달라이 라마라는 위대한 지도자의 후광으로 지속적인 관심'은'(혹은'만') 받고 있지만, 신장은 그렇지 못하다.
나만 해도 여행을 떠나기 전까지는 그저 '한족과 다르게 생긴 사람들이 사는 중국 땅'으로 밖에 신장을 알지 못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