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8시가 조금 넘은 강남 센트럴시티 고속터미널. 한 달 만에 열혈청춘이 다시 뭉쳤다. 순창(강진면)으로 가는 고속버스 앞에는 라이더들로 북적인다. 모두의 얼굴엔 남녘 섬진강의 봄을 빨리 만지고 싶어 하는 성급한 마음들이 보인다.
자전거를 고속버스에 실을 때는 앞바퀴만 분리해서 짐칸에 싣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오늘은 열 명이 넘는 라이더들이 한꺼번에 몰렸으니. 버스 기사님의 고심이 깊어지는 듯하다. 결국 뒷바퀴까지 풀어야 했다. 더 많은 자전거를 싣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처음 해보는 뒷바퀴 분리 작업을 어렵사리 마친 끝에 열혈청춘 모두 예정된 버스에 올랐다. 같은 버스를 예약한 일부 라이더들은 짐칸이 부족해서 한 시간 뒤에 출발하는 버스를 타야 했다. 승차를 못한 몇몇 라이더들에게 미안한 마음과 다행이라는 마음이 교차한다.
3시간 40분을 달려 강진터미널에 도착했다. 분해된 자전거를 조립하는 데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뒷바퀴는 체인과 연결되어 있어 조립이 까다롭다. 두 손에 씨꺼먼 기름 떼를 잔뜩 묻히는 수고를 마치고 나니 이미 점심때를 훨씬 넘겼다. 터미널 인근 식당에서 섬진강 풍미를 품은 다슬기탕과 다슬기회로 맛깔난 출발을 했다.
감성이 흐르는 강
섬진강은 모래사장이 넓게 발달하여 옛날엔 모래내, 두치 등으로 불리었다가, 고려 우왕 시절 왜구가 침략하였을 때, 수 만 마리의 두꺼비가 한꺼번에 울어대서 왜구가 놀라 물러났다는 전설이 오늘날 섬진(蟾津, 두꺼비 나루)의 유래가 되었다 한다.
모래내, 두치로 불린 옛 이름처럼, 섬진강 상류는 잔잔한 물줄기에 바위와 모래언덕이 많이 보인다. 강폭에 비해 흐르는 강수량이 적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물줄기가 가늘게 흐른다. 강 정비 사업으로 많은 변화를 겪은 4대 강과는 달리, 섬진강은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 모래톱과 수풀 사이로 유유히 흐르는 강물을 보니, 그 옛날 고향 마을을 흐르던 강을 보는 듯 아련하다. 옅은 물가에서 아이들 몇이 물장구를 치고 있다. 꾸밈없는 자연의 속살을 벗 삼아 놀고 있는 아이들이 내 어린 시절을 똑 닮았다.
여름 한철이면 그 강은 우리 마을 아이들의 놀이터였다. 어린 나는 시퍼런 강물이 무섭기도 했지만, 기를 쓰고 마을 형들을 따라가 강가에서 하루 종일 신나게 놀곤 했다. 저 섬진강 아이들도 훗날 오늘을 추억하는 날이 있으리라. 옛 감성을 간직하고 흐르는 섬진강이 먼먼 추억을 소환하며 정겹게 다가온다.
감성의 강, 섬진강
섬진강 시인 김용택의 진메 마을
섬진강은 쉴 새 없이 흐르면서도 급함이 없어 좋다. 모래섬을 돌아 수풀과 바윗돌을 스치며 유유자적 흘러갈 뿐, 속도로 우리를 재촉하지 않는다. 강 따라 이어지는 울창한 나무 그늘숲은 삼림욕을 하며 달리는 기분까지 들게 한다.
장군목 인증센터를 지나, 강 따라 한적하고 소박한 시골길을 달리다 보면 '진메 마을'이 나온다. 마을 어귀에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보이고, 섬진강 시인 김용택의 생가 푯말이 눈에 들어온다. 집 앞 느티나무는 '시를 쓰는 나무'라는 이름표를 달고 있다. 젊은 시절 김용택 시인이 직접 심었다는 이 나무를 주제로시인은 일곱 편의 연작시(푸른 나무)를 썼단다. "내 시는 자연이 말해주는 대로 받아 적었을 뿐"이라 했던 시인의 말에 따르면, 결국 시를 쓴 건 시인이 아니라느티나무였을 게다.
시인의 집에서 자라 시를 쓰는 나무!
시인(詩人)이라 해야 할까? '시목(詩木)'이라 해야 할까? 난 그냥 '느티나무 시인'이라 부르고 싶다. 시인이 느티나무가 되고, 느티나무가 시인이 되어 한 몸으로 시를 썼을 것이다.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느티나무 시인! 시를 쓰는 나무가 부럽다.
김용택시인 생가와 시를 쓰는 나무
시인이 태어나서 자랐다는 고택에는 회문재(回文齋)라는 편액이 걸려있다. '글이 돌아오는 집'이란 뜻이리라. 시인의 집다운 이름이다. 돌담장으로 둘러싸인 고택은 포근하고 친근하다. 마당 한편에는 시인의 삶과 애환이 묻어있는 '농부와 시인’ 시비가 방문객의 발길과 마음을 붙든다. 삶의 터가 시가 된 집 마당에 서서 강을 바라보고 있으니, 고향과 자연을 사랑했던 시인의 소박한 마음이 전해지는 듯하다.
시인의 시비
다시 페달을 밟고 달리다 보니, 마을을 휘감고 흐르는 강을 따라 ‘섬진강’, ‘봄날’ 등 시인의 시심을 담은 시비가 여럿 보인다. 강이 시가 되고, 시가 강이 되어 흐르는 섬진강. 그 강을 따라 우리 모두 시인이 되어 달린다.
새로운 친구, 나의 애마
강길을 따라 달리는 페달이 한결 가볍다. 사실, 오늘 나와 함께하고 있는 애마(자전거)는 나와 만난 지 보름도 채 안되었다. 지난번 남한강 종주 때 동료들 뒤에 쳐져 '알바'와 '끌바'를 해야 하는 적지 않은 시련이 있었다.
모두들 내 자전거가 문제라며 새 자전거를 사라고 야단이었다. 특히, 청이 아우의 성화가 자심했다.
"형님! 이제는 형님을 위해 투자를 좀 하세요! 눈 딱 감고 자전거 한 대 새로 장만해요. 제발!"
아우의 애정 어린 그 마음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나는 애써 못 들은 척했다. 그러나 지난번 남한강 종주 때 뼈저리게 느낀 바도 있고 해서 고민이 깊어갔다. 결국, 향후 국토종주를 위해서는 새 자전거를 구입해야겠다고 결론을 내렸다. 내 주머니 사정과 타협한 끝에 국산 자전거로는 최고급인'첼 ×'로 결정했다.
사실, 열혈청춘 다른 동료들의 자전거는 라이더들이 부러워하는 수준급의 자전거다. 자동차로 말하면 벤 ×, B×W급이거나, 최소한 그×져급이다. 새로 마련한 내 자전거는 적어도 소 ×타급은 되지 않을까?, 내심 자부심을 가져본다.
새로운 친구가 된 애마가 한결 나의 몸과 마음을 편하게 한다. 나는 애마 이름을 '행복이'라고 부른다. 함께하면 행복한 친구, 그 친구와 함께 섬진강을 달린다.
가자, 행복아! 섬진강이 다가오고, 행복이 밀려온다.
나의 애마와 메타세콰이어 길
메타세콰어어 길
남원에서 곡성으로 접어드는 어귀에 메타세콰이어 길이 나온다. 하늘로 치솟은 아름드리나무들이 길게 서서 라이더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마치 일열로 서서 환영인사를 하듯 우리를 반긴다. 멋진 추억사진 한 장 남길 수 있는 아름다운 거리다.
오늘은 곡성에서 하루 밤을 묵기로 했다. 시내 외곽에 자리한 모텔에 숙소를 정했다. 날이 어둑해지고 있다. 섬진강의 하루도 저물고 있다.고단하고 지친 하루가 삼겹살 파티로 깊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