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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기환 Sep 03. 2024

시가 흐르는 섬진강 2

('23.4.8~4.9)

곡성(哭聲) 아닌 곡성(谷城)


여직 한 번도 와보지 않은 곡성 땅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곡성(哭聲)이라는 영화가 주는 강렬한 이미지 때문일까? 왠지 곡성(谷城)은 음습한 분위기가 먼저 떠오른다. 그러나 우리가 만난 곡성은 따뜻한 사람들이 사는 곳이었다.


 아침 해장을 위해 곡성 기차마을 전통시장을 찾았다. 이른 아침인데도 식당은 꽤 많은 사람들이 자리하고 있다. 재첩 해장국은 국물이 그만이었다. 모두들 얼큰하고 시원한 국물 맛에 취해 순식간에 국물을 다 비워버렸다. 건더기만 가득한 뚝배기를 보며 국물을  더 달라는 말을 못 하고 망설이고 있는데, 국물이 가득 담긴 큰 사발 하나가 탁자 위에 놓인다. 우리의 마음을 읽고 말없이 국물 한 사발 내어주는 주인아저씨의 넉넉한 인심이 고맙다. 곡성의 얼큰하고 시원한 인심 한 사발을 행복하게 들이켰다.


식사를 마치고  한적한 길을 나섰다. 애매한 갈림길에서 어디로 갈지 갈등하고 있는 우리를 본 농부 한 분이  투박하고 정감 있는  남도 사투리로  어디 가냐고 묻는다. 섬진강으로 들어가는 길을 찾는다고 하니, 따라오라며 트럭을  몰고 앞장서 길을 안내해 준다. 도시에선 볼 수 없는 사람냄새가 난다. 어젯밤에도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다. 이곳 사람들은 무심하게 손가락으로 방향만 일러주는 법을 모르는 사람들이다. 직접 앞장서 확인까지 해주지 않으면 안 될 것처럼 몸과 마음으로 말해주는  따스함이 있다.  이토록 작은 배려가 낯선 이방인을 감동하게 만드는 곳이 곡성이다. 곡성(哭聲) 아닌 곡성(谷城)을 만났다. 처음 찾은 객지에서 여행의 또 다른 행복을 맛본다.

곡성 증기기관차

강 길을 달리다 보니 기적을 울리며 다가오는 증기기관차가 보인다. 곡성 명물로 자리 잡은 증기기관차가 섬진강 아름다운 풍광을 따라 달린다. 가족단위 승객들이 차창너머로 손짓을 한다. 나도 손을 들어 웃음으로 답례를 다. 물길 따라 자전거길과 숲길이 달리고, 그 위로 기찻길과 자동차길이 달린다. 길과 길이 만나는 곳에서 사람을 만나고 마을을 만난다. 정겨운 길 따라 행복한 페달을 밟는다.


쌍계사와 하동십리 벚꽃 길


횡탄정과 사성암 인증센터에서 남도대교 인증센터로 가는 길은 강이 보이지 않고 공도로 이어지는 길이 많다. 구례구역에 다다르니  강줄기가 제법 넓어지고 있다. 강이 내다보이는 카페에서 아이스커피와 맛난 빵으로 요기를 하며 힘든 일정의 여유를 즐겼다.

구례구역과 향가터널

남도대교를 건너면 쌍계사와 화개장터가 있다. 그냥 지나칠 수도 있지만, 이곳을 지나면서 쌍계사를 외면할 수 없다.  하지만 그 욕심은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지리산 자락 삼신산 중턱에 자리한 절까지 길은 계속 이어지는 업힐(uphill)로 숨이 턱까지 차오른다.  내  새 친구 '행복이'가 기를 쓰고 오르지만 힘에 겨워한다.  나의  자존심을 지켜주려는 듯 낑낑대며 애를 쓰는 행복이가 애처롭다. 선두와 거리가 점점 멀어지긴 했지만, 그래도 끌바를 하지 않고  천천히 올라갈 수 있어 다행이다. 끝이 없을 듯 이어지는 고개를 여러 번 넘어서야 겨우 사찰에 다다랐다. 입구에 자전거를 두고, 가파른 길을 걸어 올라가 일주문을 지나니, 계곡 물소리 한적하게 들리고, 일순 엄숙한 분위기가 펼쳐진다. 신라의 대 문장가였던 최치원이 비문을 썼다는 국보 ‘진감선사탑비’를 비롯해 다수의 보물을 간직하고 있는 쌍계사는 수려한 산세와 함께 천년고찰의 품위를 지키고 있다. 켜켜이 쌓인 세월이 범접할 수 없는 무게로 다가온다.


쌍계사


내려오는 길은 쌍계사가 자랑하는 벚꽃 십리 길을 따라 달린다. 휘파람을 불며 달린다. 수령이 50년~100년이 된다는  벚나무들이 도로 양 옆으로 끝이 없이 이어진다. 내가 여태까지 본 벚꽃길 중 가장 웅장하고 깊다.  아쉽게도 이미 벚꽃은 반 이상이 지고 화려했던 시절을 아쉬워하듯 시든 꽃무리만 한들거리고 있다.

"형님! 벚꽃 필 때 꼭 한번 다시 와요"

 아우들이 두 바퀴 위에서 아쉬운 듯 소리친다.

"그러자! 그때는 정말 장관이겠다!"

언젠가 벚꽃 만발한 이 길을 꼭 한번 오고 싶다고 모두들 입을 모은다.

쌍계사 벚꽃 십리길


화개장터


벚꽃 십리길 끝자락엔 화개장터가 있다. 가수 조영남의 노래 ‘화개장터’가 인기를 끈 이후, 영호남  교류와 화합의 장이라는 상징성을 띠게 되면서 유명한 관광지가 되었다. 실제로 장터 내에는 조영남의 동상이 특유의 정감 있는 얼굴 웃고 있다. 사람들이 스스럼없이 다가가 연신 사진을  찍는다. 나도 사진 한 장 남겼다.  


그 옛날에는 섬진강을 따라 이곳 화개장터까지 범선이 오르내렸다 한다. 남해안의 해산물과 내륙지방의 농산물, 지리산 임산물까지 이곳에서 교역이 되었지만, 육로 교통이 발달되면서 하동포구 80리를 오르내리는 범선의 자취는 찾을 수 없.


주말 휴일 화개장터는 생기가 넘친다. 사람들의 행렬로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다. 앞사람을 따라, 뒷사람에 밀려 시장바닥을 한 바퀴 돌았다. 여기저기서 호객하는 소리와 흥정하는 소리, 웃음소리가 왁자하다. 장터는 늘 사람냄새가 나서 좋다. 출출한 배를 채우기 위해 이곳의 명물 벚굴 집을 찾았다. 어른 손바닥만 한 벚굴이 쟁반에 담겨 나오고, 재첩 비빔밥이 입맛을 자극한다. 걸신들린 듯, 게눈 감추듯 행복하게 해치웠다.

벚굴 한 상과 조영남 동상


매화마을과 배알도


남도대교를 다시 건너 매화마을을 향해 달린다. 이 구간은 섬진강 코스 중 가장 힘든 길이다. 노면 상태도 그리 좋지 않고 업다운 힐이 반복되면서 라이더들을 힘들게 다. 그래도 유채꽃 만발한 들판과 오밀조밀한 들길을 달리는 재미가 있다. 


매화마을 인증센터는 섬진강 넓은 강줄기를 바라볼 수 있는 강변에 자리하고 있다. 매화마을은 광양이 자랑하는 관광지이지만, 3월 초에 만개했을 홍매화, 백매화는 이미 지고 난지 오래다. 매실나무 가득한 산비탈을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하고 길을 재촉한다.  

섬진강길 풍광

매화마을을 지나 우리는 마지막 인증센터인 광양만 배알도 수변공원으로 달린다. 하구로 내려갈수록 강폭이 점점 넓어지면서 바다가 가까워졌음을 알 수 있다. 가슴이 탁 트이는 강을 따라 달려가니 가꾸어진 배알도 수변공원이 나온다. 드디어 550리 먼 길을 달려온 섬진강이 바다와 만나 마침표를 찍는 순간이다, 빨간색 드레스를 입은 배알도 인증센터가 미소로 우리를 반긴다. 그녀의 품에 안겨 인증도장으로 마침표를 찍고, 수첩에 입을 맞춘다. 짜릿한 행복이 밀려온다. 이 순간을 위해 우리는 달려왔다. 힘든 여정이지만 행복이 있어 우리는 또다시 달릴 것이다. 

배알도와 인증수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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