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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들deux맘 Aug 12. 2024

꽃미남 할아버지, 한 줌의 흙이 되다.

늘 그래왔듯 아파트 단지 앞 파리바게트에서 할아버지가 좋아할 만한 빵을 몇 개 골랐다. 그리고 집에 들어가 할아버지 방 문 앞에 빵을 놓고 평소대로 "할아버지, 빵 사 왔어요."라 말해보지만 인기척이 없다. TV를 보시느라 내 목소리가 안 들리나? 슬쩍 방 문을 밀었는데 할아버지가 앉아서 잠이 드셨다. 하지만 조금 이상했다. 할아버지의 고개가 비정상적으로 떨구어져 있었다.

순간 내 온몸을 짓누르는 급박함을 느꼈다. 나는 그 즉시 방 문을 박차고 들어가 할아버지에게 달려갔다. 할아버지의 등을 내 두 손으로 받치는 순간 할아버지는 그대로 내 품에 안겼다. 의식이 없는 할아버지를 안은채 있는 힘껏 배에 힘을 주며 괴성에 가까운 목소리로 아빠를 불렀다.

"아빠! 아빠! 아빠!"

주무시고 있던 아빠가 달려와 상황을 살피고 나에게 119로 전화하라고 소리쳤다.

나는 거실로 달려가 무선전화기를 들고 와 아빠 앞에 섰지만 어디로 전화할지 몰랐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나는 그 자리에서 바보같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아빠가 급하게 내가 들고 있는 전화기를 낚아채고 119에 신고를 했다.



56년생 영숙 씨의 아버지

나의 외할아버지 이야기다.

탤런트 박근형을 닮은 할아버지는 어딜 가나 눈에 띄었다.

중학교 시절 할아버지를 동네에서 만나면 친구들이 너희 아빠는 왜 출근하지 않고 집에 계시냐는 질문을 하곤 했다. 키가 크고, 젊고, 잘생긴 할아버지. 난 친구들 앞에서 일부러 더 크게 외치곤 했다.

"할아버지! 어디 가세요?"

할아버지는 젊은 시절 검찰청에서 일하셨다고 했다.

멋진 외모에, 번듯한 직장까지 그 당시 할아버지는 완벽 그 자체였을 것이다.

어린 시절 내가 할아버지를 너무 좋아해서였을까?

가정을 제대로 돌보지 않았다는 흠을 가진 할아버지를 크게 원망하진 않았다.  

난 그저 꽃미남 할아버지를 가만히 두지 않았던 세상을 탓했다.  

아들 둘을 키우며 결혼생활 10년 차를 맞은 내가 돼서야 비로소 그 당시의 외할머니의 심정을 알 것 만 같다.

가끔 엄마가 농담으로 하는 얘기가 있다.

할아버지의 외도를 의심했던 할머니가 엄마를 시켜 뒤를 밟게 한 것이다. 한 편의 막장드라마를 상상했던 나는 숨죽여 이야기를 들었지만 그 끝은 한 편의 코미디였다.

할아버지의 미행을 시작한 엄마는 바로 들통이 나서 할아버지와 함께 그 길로 돈가스집으로 향했다.

할아버지와 함께 돈가스를 맛있게 먹고 돌아온 엄마를 바라보는 할머니의 마음이 어땠을까..

얼마나 상심했으며, 얼마나 외로웠을까, 그리고 아무도 모르는 그 고통 속에 얼마나 부르짖었을까..

왜 엄마아빠는 늘 외할머니를 대장부로 불렀는지 이제야 알 것 같다.

뼛속까지 파고드는 그 외로움과 고통 가운데 혈혈단신으로 4남매를 키우기는 쉽지 않았으리라.

반드시 외할머니는 대장부가 되어야만 했을 것이다.

그것이 힘들었다면 대장부인척이라도 해야 모든 것을 이겨냈으리라 생각을 하니 마음 한 편이 아려왔다.

잊으려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잊히지 않았을까?

외할머니는 미국이민이 활발하지 않던 그 시절 큰 딸이었던 우리 엄마만 한국에 남겨두고 미국행을 택했다.

그 후로 그들은 그 누구의 탓도 하지 않은 채 각자의 삶을 열심히 살아나갔다.

미국에서 자리를 잡은 후 우리 가족을 초대해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집안 행사가 있으면 장장 12시간의 비행도 마다하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나와 각별했다.

어린 시절 부모님은 사업체를 운영하시느라 늘 함께 출, 퇴근을 하셨다.

오빠가 나를 때리기라도 하는 날에는 할아버지는 오빠를 불러 잡다 놓으며 참된 교육을 실천하셨다.

옆에서 지켜보며 속으로 어찌나 통쾌했는지 내게는 바쁜 아빠 말고도 날 지켜줄 할아버지가 있다는 사실에 한없이 기뻤다.

가끔 학원에 가기 싫어 할아버지에게 온갖 애교를 부리면 할아버지는 아빠인척 학원에 전화해 주곤 했다.

보통은 할머니가 손주손녀를 포대기에 업고 있는 어린 시절 사진을 볼 수 있는데, 우리 집은 달랐다.

할아버지가 나를 포대기에 업고 오빠 손을 잡고 그 당시 우리 동네 어르신들의 만남의 장소였던 대서소에 같이 마실 나가곤 했다.

내 어린 시절의 모든 추억을 함께 한 할아버지가 내 눈앞에서 쓰려졌다.

할아버지는 그대로 구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이송되었고 나는 그렇게 작별 인사도 못한 채 내 사랑하는 할아버지를 천국으로 보냈다.

급하게 미국에서 할아버지의 가족들이 입국하고 장례예배가 진행되었다.

딸보다 더 우는 손녀 때문에 예배자체가 진행되지 않을 정도였다.

나의 슬픔과 충격은 극에 달했다.

3일장을 지내는 동안 한 모금 마시지 않았다.

할아버지의 죽음을 받아들여야 했지만 쉽지 않았다.

그렇게 할아버지를 보내고 집에 돌아와 나는 바로 할아버지 방으로 들어갔다.

할아버지의 냄새, 늘 뿌리던 향수, 깔끔하게 정리된 할아버지의 옷가지, 그리고 할아버지의 중절모가 옷걸이에 걸려있었다.  

모든 것이 그대로인데 내 사랑하는 할아버지만 없었다.

그리고 이내 나는 오열했다.

할아버지의 유서를 발견한 것이다.

얼마나 오래전에 쓴 건지 모를 정도로 빛바랜 종이 위에 할아버지는 정성스레 써내려 갔다.

할아버지의 편지 한 글자 한 글자가 내 마음을 울렸다.

그리고 아파트 단지 내에 있는 양로원에 가끔 가시곤 했는데 그곳에서 주는 안내지 같은 것이 옆에 보였다.

그 종이에 쓰여있는 지금도 이해되지 않는 몇 가지 문구들이 기억이 난다.

"자식에게 짐이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하자, 그리고 냄새가 나지 않게 늘 청결한 몸을 유지하자."




아버지의 존재는 예나 지금이나 무겁고 근엄하다.

어린 시절 내가 바라본 영숙 씨와 외할아버지의 관계도 그다지 살갑지는 않았다.

하지만 늘 아버지의 존재는 크고 위대하다.

내가 보는 나의 아버지의 존재도 그러하고 10살 8살 내 아들 둘이 생각하는 아버지의 존재도 그러하다.

56년생 영숙 씨와 그 아버지의 관계도 필히 그러했으리라.

비록 그녀를 조금은 외롭게 했을지라도, 조금은 힘들게 했을지라도, 완벽한 가정을 유지하는 것은 조금 소홀했을지라도 아버지의 존재는 늘 우리의 마음을 울린다.

아버지를 향한 56년생 영숙 씨의 마음을 깊이 헤아릴 수는 없지만 영숙 씨의 아버지의 인생의 마지막 문을 영숙 씨와 내가 함께 닫아드렸다는 것만으로 큰 의미가 있었다.


56년생 영숙 씨도 나 만큼 할아버지와 함께 좋은 시간과 추억을 보내고 싶었을 텐데 내가 대신 그 자리에 있어주었다. 할아버지를 따라 동네 대서소에 놀러 가면 북적북적  어르신들 사이로 늘 들깨를 들고 오는 아줌마가 우릴 반겼다. 뭔지도 모르고 받아먹던 그 들깨가 어찌나 고소하던지 2살 때의 기억이라지만 너무나 또렷하다.

56년생 영숙 씨도 할아버지를 천국으로 보내던 날 영숙 씨는 그 간의 외로움과 회환에 나 만큼 울고 싶었을 텐데 장녀로서 모든 장례식을 주관하느라 그러지 못했다. 그래서 영숙 씨 대신 영숙 씨만큼 그를 사랑했던 내가 목놓아 울어주었다.


할아버지의 화장이 끝나고 유골함을 받았다.

그 옆에는 할아버지가 늘 끼던 금반지와 할아버지의 금니가 있었다.

나는 유골함을 제일 먼저 받아 들고 엄마 몰래 열어보았다.

그리고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간 할아버지를 손으로 만져보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무척이나 따뜻하고 보드라웠다.

할아버지를 원 없이 사랑했고 마지막 가는 길 마저 쏟아낼 수 있는 내 모든 눈물을 쏟아내서였을까?

할아버지의 유골함을 안고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난 두렵거나 무섭지 않았다.

그렇게 꽃미남 할아버지는 내 품에 안겨 한 줌의 흙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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