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들deux맘 Aug 05. 2024

손님들에게 스스로 돌 떡을 대접한 돌쟁이 영숙 씨

엄마와 나는 생일이 같다.

다행히 엄마는 음력생일을 쇠므로 나와 엄마 그 누구의 생일도 묻히지 않는다.

엄마와 생일이 같다는 이유만으로 난 늘 엄마와 나의 관계가 특별하다고 생각해 왔다.

신이 세상 모든 곳에 있을 수 없어서 만든 사람- '엄마'의 존재는 늘 언제나 특별하고 애틋하다.


10년 전 나의 첫 출산 당일, 그 당시 신학대학원생이던 남편은 개강수련회를 결석하면 졸업을 할 수 없다는 학교 규정을 철저히 지켜야 했다.

그렇게 얼떨결에 남편 없이 진통이 시작된 나는 엄마의 두 팔을 꼭 잡고 놓지 않았다. 아니 놓을 수가 없었다.

극심한 진통 가운데 엄마는 그저 말없이 서서 날 지켜보며 두 팔이 피멍이 들고 있는 것도 모른 채 내 진통받이가 되어주셨다. 엄마의 팔을 쥐어뜯는다고 내 진통이 줄어드는 것도 아니었는데 엄마는 그저 그 고통을 온전히 함께 받으며 나와 함께 있어주었다.

둘째 출산 당일에도 엄마와 나는 함께였다.

지방에서 사역을 하던 남편에게 "엄마랑 승리(태명) 낳고 올 테니 여보는 열심히 주일 사역 마무리 잘하고 휴가 받아서 우리 보러 와!"라 말하며 난 당연한 듯 엄마와 출산길에 나섰다.

뼛속까지 T인 남편의 서운한 한마디에 하늘이 무너져라 슬퍼하는 내가 어떻게 두 아이의 출산을 남편 없이 해냈는지 남편도, 남편 지인들도 지금까지 의아해한다.

엄마와 성격, 외모, 목소리 심지어 생일마저 똑같은 필연적 숙명을 가진 우리 둘 만의 애틋한 관계 덕분이라 당당히 말해본다.


56년생 영숙 씨 우리 엄마는 4.2kg인 나를 자연분만으로 낳았다.

둘째가 아니었다면 죽었을 수도 있었다는 말씀을 가끔 하시곤 하는데 나는 그 4.2kg의 출생당시의 몸무게를 그때나 지금이나 훈장처럼 여긴다.

엄마는 분명히 나를 임신하고 행복한 하루하루를 보내셨으리라, 얼마나 잘 지냈으면 태아가 평균 이상의 몸무게를 가지고 태어난단 말인가, 4.2kg으로 태어나서 입원은 고사하고, 병치레 한 번 안 했던 나는 엄마에게 늘 효녀소리를 들었다.

잔병치레 없이 늘 학교에서 51번, 52번을 맡았으며 어딜 가든 "너는 키가 몇이니?"라는 질문을 들으며 살았던 나, 효녀심청급 효도를 하며 자랐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지만 10년 차 엄마가 된 지금은 너무나 잘 알 것 같다.

영숙 씨의 어린 시절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녀의 돌쟁이 시절, 돌잔치 때 온 손님들에게 그녀는  걸어 다니며 떡을 돌렸다고 했다.

얼마나 건강하고, 사랑스러웠을지 상상해 본다.

진한 쌍꺼풀, 똘똘한 눈빛, 도톰한 입술을 가진 돌쟁이 아기가 부끄러워하기는커녕 당당하고 의연하게 돌잔치에 온 손님들에게 돌떡을 돌린다.

그 모습을 본 손님들은 귀여운 돌쟁이 영숙 씨의 모습에 얼마나 흐뭇했을까?
가볍게 미소를 짓는 사람부터 박장대소하는 사람들까지 돌잔치참여한 모든 사람들의 모습이 그러했을 것이다.   


56년생 영숙 씨의  모습과 영숙 씨 주위 사람들의 모습이 68년 전 그 때나 지금이나 한결같다.

영숙 씨는 어떤 상황에서도 늘 웃음을 잃지 않고 사랑이 넘치는 모습이다. 영숙 씨 주위에 있는 자들은 그녀 덕분에 덩달아 함께 웃고 그녀로부터 흘러온 사랑의 제스처에 스며들고 행복해한다. 누군가는 말 많고 오지랖 넓은 아줌마라 애써 눈을 피할 수도 있겠으나 상관없다. 밑도 끝도 없는 자신감으로부터 시작된 타인을 향한 사랑, 그 사랑으로 점철된 자비와 배려의 산실, 그 자체가 영숙 씨다.




1년 전 영숙 씨는 한 유명한 척추전문병원에서 허리 수술을 받았다.

회복까지 걸리는 시간은 길어봤자 일주일이라는 허리 수술 중에서 가장 간단한 수술이다.

남편의 유학으로 어쩔 수 없이 캐나다 밴쿠버에 머물고 있는 나는 엄마의 수술을 함께 지켜볼 수 없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실력 있는 의료진이 포섭된 유명한 척추전문병원이라는 사실과 실제 수술후기를 읽어본 후 조금은 안심하게 되었다. 그러나 56년생 영숙 씨는 평범하다면 평범한 그 수술을 견디지 못했다.

100명 중 한 명 걸릴까 말까 한 그 확률, 부작용이란 얄궂은 아이가 정확히 엄마의 척추 정곡을 찔렀다.

1년 전 일이지만 아직도 엄마의 흐느끼는 목소리가 생생하다.

"영주야, 엄마 너무 아파서 죽을 것 같아, 죽고 싶어.. 정말 너무 아프다. "

56년생 영숙 씨는 43년 내 인생의 모든 단계 단계마다 늘 함께였는데, 난 엄마가 흔치 않은 부작용으로 죽음을 운운하며 고통을 호소하던 바로 그때에 엄마 옆에 있지 못했다.

내가 꾸린 내 삶, 주님이 선물해 주신 내 가정의 풍요를 위해 이 세상 어디든 가겠다는 조금은 이기적인 마음 때문이었다 고백해 본다.


'56년생 영숙 씨' 엄마에 에 관한 글을 쓸 거라며 카톡으로 슬쩍 언질을 주니 답장이 왔다.

"나는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수십 년 그녀의 따뜻한 자궁 안에서 세상에 있는 모든 좋은 기운을 받으며 나와 오빠가 태어났다.  

그리고 그 귀한 세대는 계속 이어지며 지금 이 세상에서 유의미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세대와 세대를 잇는 귀한 역할을 '56년생 영숙 씨'가 해냈는데 그녀는 아무것도 한 게 없다 겸손히 말한다.

68년 인생을 살아온 영숙 씨

돌쟁이 시절 스스로 손님들에게 떡을 돌리던 그 자신감으로 평생을 살아가는 56년 영숙 씨.

그녀의 파란만장한 인생을 나는 안다.

젊은이들 못지않은 뜨거운 사랑도 해 보았고,

세상이 무너진냥 목놓아 운 적도 셀 수 없이 많다.

56년생 영숙 씨의 인생 3막이 시작되었다.

주인공 56년생 영숙 씨도 그녀를 바라보는 관객들도 늘 위풍당당한 모습을 고풍스레 유지할 것이다.

68년 엄마의 인

어떤 설명이 더 필요한가?

그 자체로 위대하고 경이롭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