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 때 크리스마스 전야에 친구들이랑 한잔하면서 '고요한 밤 거룩한 밤' 불렀던 기억이 있다. 통기타 치면서 노래하다가 갑자기 눈물이 났다. '주의 부모 앉아서, 감사 기도 드릴 때, 아기 잘도 잔다' 부분에 나의 세포들이 민감하게 반응한 거다. 부모가 아들 낳고 감사 기도하는 건 당연한데, 그 아들이 나중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거다.
난 예수한테서 세 가지 특징을 발견했다: 사랑, 비폭력, 그리고 저항.
첫째, 예수는 사랑 그 자체였다. 가난한 사람들, 아픈 사람들, 힘없는 사람들, 죄인들 모두에게 사랑을 베풀었다. 간음한 여인을 구해준 사건으로 진짜 사랑이 뭔지 보여주었다. 그리고 죽을 때조차 원수를 위해 기도한 거 보면, 용서에 한계가 없다는 것도 보여줬다.
둘째, 예수는 폭력을 끝까지 반대한 사람이다. 포도원 농부의 비유(누가복음 20장) 같은 이야기로 말이다. 근데 성경에 폭력적인 이야기가 너무 많아서 비폭력적인 예수를 상상하기가 어렵다. 예수는 악에 맞서 싸웠지만, 폭력을 사용하지 않고 그냥 잡혀가서 죽임을 당했다.
셋째, 예수는 악에 맞서 온몸으로 저항했다. 예수의 저항을 '비폭력 투쟁'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손이 마른 남자를 안식일에 고쳐준 사건(마가복음 3장)은 안식일 규정을 일부러 어기면서 종교지도자들에게 도전한 거고, 성전에서 장사꾼들을 쫓아내며 '강도들의 소굴'이라고 한 것은 성전당국에 도전한 거다. '하느님 나라' 운동이나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라는 말도 성전당국과 로마 제국에 대한 저항이었다.
근데 이런 예수가 지독한 말들을 했다고? 난 못 믿겠다. 고양이가 "야옹"하는 것처럼, 예수는 사랑을 말해야지, 무슨 강아지가 "야옹"하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마태복음 5장에 나온 말을 보자.
"누구든지 정욕의 눈으로 여자를 바라보는 사람은 이미 마음으로 간음한 거다."
"오른눈이 죄짓게 하거든 빼버려라. 오른손이 죄짓게 하면 잘라버려라."
간음에 관한 말은 뭐, 맞다고 치자. 근데 눈을 빼버리라고? 만약에 오른눈을 빼버렸는데 왼눈이 또 죄를 지으면? 그럼 왼눈도 빼야 하나? 간음한 여인을 구해준 예수가 이런 말을 했다고는 도저히 믿기 힘들다.
대형교회 가서 애꾸눈 사람 몇 명이나 있는지 살펴보라. 한 명도 없을 거다. 장님은 있을 수 있겠지만, 근데 그건 스스로 눈을 뺀 건 아닐 거다. 그 교회 남자들이 다들 정욕의 눈으로 여자를 본 적 없다는 건가? 솔직히 말해서, 정욕의 눈으로 여자를 안 쳐다보는 남자는 별로 없다. 근데 왜 다들 두 눈 멀쩡한 거냐고?
여기서 '오른손'은 사실 '그거'를 돌려서 말한 거 같다. 간음 이야기 바로 뒤에 나오니까 '그거'가 더 적절한 단어일 거다. 만약 눈을 빼버려도 정욕을 못 참으면, '그거'를 잘라버리면 해결될 거다.
이런 식으로 복음서에는 예수가 했다고 믿기 어려운 말들이 많다. <요한계시록>은 더 심각하다. 6장에서는 어린양이 봉인을 뗄 때마다 끔찍한 말들이 나온다. 물론 어린양은 예수 그리스도다.
"그 위에 탄 사람은 땅에서 평화를 없애고 사람들끼리 서로 죽이게 할 권한을 받았으며, 큰 칼 하나를 받았습니다." 이거, 금송아지 사건에서 모세가 3천 명 학살한 장면 떠오르게 한다. 요즘이었다면 큰 칼 대신 핵무기를 받았을 거다.
"전쟁과 기근, 질병, 짐승들을 가지고 세상 사람 4분의 1을 죽일 권한을 받았습니다." 와! 이건 야훼의 전매특허 기술이다.
예수의 성품이랑 너무 안 어울리는 말들이 이렇게 많은 이유가 뭘까? 저자들이 저마다 자기 생각을 반영한 거다. 마치 모세가 자기 성격을 야훼한테 투사한 것처럼.
문제는 이런 끔찍한 말들을 기반으로 기독교가 형성되고 발전했다는 거다. 죄를 지으면 눈을 빼고, 손을 자르고, 그래도 안 되면 전쟁, 기근, 질병, 짐승들로 다 한꺼번에 죽여버린다. 이런 사고방식에 길들여진 기독교가 세상에 끼친 영향이 뭐였을까?
종교재판, 마녀사냥, 이교도 학살, 십자군 전쟁, 다 하느님의 뜻을 실천한다고 저질러진 거다. 심지어 기독교지도자들은 근대의 식민지 학살이나 독재자의 만행도 성경에 나오는 비슷한 사건들 찾아서 합리화하고 정당화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