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현실로 돌아와 보자.
나는 오늘 나에게 온 행운을 잡아보려고 한다. 그녀에게 내 강박증의 시작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연애를 하면 어떤 제약이 있을지까지 웬만하면 모든 것을 구체적으로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가기 전까지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그래도 이렇게 이야기하기로 용기를 내고, ‘나를 싫어하면 어쩌지?’라고 걱정을 하는 나를 보며 내가 진짜 그녀를 좋아하긴 하나 보다라고 생각했다.
분위기 좋은 술집에서 만나 간단하게 술을 마시며 나는 본격적으로 내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내 강박증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그리고 지난 3년 동안 왜 연애를 안 했는지, 연애를 하게 된다면 내가 어떤 모습을 보이고 어떤 제약이 존재할 수 있는지 자세히 말하기 시작했다.
이야기를 하면서도 그녀의 표정이 일그러지는지.. 혹시 내가 싫어졌는지 계속 신경이 쓰였지만, 오히려 그녀는 차분하고 평온한 표정으로 내 이야기를 최선을 다해 경청하는 듯 보였다.
내가 준비한 모든 이야기가 끝이 났고, 이제 운명의 주사위는 던져졌다. 나에게 온 행운이 진짜인지 아닌지는 이제 기다려보면 알게 될 테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녀가 가장 먼저 뱉은 말은 “용기 내줘서 고마워?”였다. 지난번, 지하철역 앞에서 그녀가 나에게 할 말 없냐고 물었을 때, 나는 할 말 있는데.. 조금 기다려달라고 부탁했었다. 그렇게 이야기할 때도 사실 반응이 다양할 수 있지만, 대체적으로는 실망하거나 ‘왜 저렇게 시간을 끌지’라는 식으로 나에 대해 좀 부정적으로 생각하거나 충분히 나에게 부담을 줄 수도 있는 멘트를 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녀는 그때도 이번에도 항상 내 마음에 집중했다. 나에게 깊은 생각이 있을 거라는 믿음, 이런 말을 하기까지 얼마나 용기가 필요했을지 이해해 주는 마음… 내가 그녀를 나에게 온 행운이라고 말하는 이유였다.
그만큼 나에게는 정말 뜻밖의 반응이었다. 그런 말을 내뱉기는 참 쉽지 않았을 텐데… 정말 대단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순간이었다.
사실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의 과거 연애를 듣고, 그런 강박증상이 있다는 것, 그리고 앞으로 연애를 하면서 어떤 제약이 있을지 상상도 못 했을 텐데 본인보다 나에게 맞춰서 그런 말을 하기는 쉽지 않았을 거다.
무엇보다도 그녀는 ‘왜 그러냐..’ 혹은 ‘이해가 잘 안 되는데?’ 등의 뉘앙스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는… 너무나도 정상적이고 이상하지 않다는 눈빛과 말들로 나를 지극히 평범하고 당연한 사람으로 바라보려고 노력하는 것이 나에게는 큰 감동이었던 것 같다.
물론 나중에 그녀에게 이날의 기억과 감정에 대해 다시 물어보니, 그녀는 크게 세 가지 정도의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우선 본인이 나의 상황에 대해서 완전히 알지 못하는데, 섣불리 이야기하거나 판단해서 상처를 줄까 봐 걱정이 되었고 그래서 굉장히 조심스럽게 이야기하며 무엇보다도 나에게 용기 내서 이야기해 준 것에 감사를 표현하고 싶었다는 것.
두 번째로 나중에 연애를 하면서 얼마나 내 걱정이나 강박이 일상에 깊이 박혀 있는지 알게 됐지, 그 당시에는 사실 그렇게까지 깊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는 점.
마지막으로 무엇보다도 나와 연애를 하게 되어 그저 설레고 긴장되고 행복한 마음이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그렇게 난 그날 하늘이 나에게 보내준 것 같은 행운을 붙잡았다. 그런데 아직 궁금한 점이 있지 않아? 바로 내가 연애를 하면서 있을 것 같다고 한 제약은 대체 뭐였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