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중 묘약 03화

<묘약 3> 멸치 나무 프린터

설거지 출근 운동 공부, 복제된 나에게 대신 시켜볼까

by 빵먹는 영철이

이 책은 주변의 흔한 재료를 이용한 묘약 제조법을 소개하는 낭만, 멸망, 격정의 기록이다. 벼룩의 간을 꺼내 형광물질을 발라 감은 눈을 뜨게 하는 심봉사의 기적을 목격하고 싶은가. 감자 외형을 뒤집어쓴 포유류의 살코기로 부처의 지혜를 경험하고 싶은가. 당장 책을 펼치시라! 인생을 바꿀 기적 속으로 함께 비밀스레 들어가 보도록 하자.


1-3. 무제한의 분신술- 멸치 나무 프린터.


지긋지긋하게 말 안 듣는 자식과 무심한 남편을 뒤로하고 휴양지로 달려가 진주빛 비키니 차림으로 파도에 뛰어들고 싶은 날. 셔츠도 인성도 똥냄새가 나는 상사와 마주하기 위해 출근하는 대신 먼지 얹은 게임기와 아껴둔 양주로 밤을 새우고 싶은 날. 간절한 소망에도 불구하고 일상을 팽개칠 용기가 없는 그대에게 나 대신 아침에 일어나 밥 하고 출근할 누군가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 같은 소망을 가져본 여러분들이라면 누구나 탐 낼 묘약이 있어서 소개한다. 바로 인간 복제라는 절멸의 기술을 자랑하는 것으로 모자라 공학적 완성도와 미학적 아름다움까지 뽐내는 묘약계의 걸작, ‘멸치나무 휴먼 프린터’다.


왜 '프린터'를 '묘약'으로 부르는가


그런데 ‘묘약’이라면서 ‘프린터’라니? 프린터는 약이 아니지 않은가? 의문을 가진 분들께 말씀 올린다. 여러분은 앞으로 이 책을 읽는 과정에서 묘약을 이야기할 때 꼭 입으로 씹거나 마셔 삼키거나 몸에 바르는 '약'만을 생각하지 않기 바란다. 어떤 묘약은 살아 숨 쉬는 벌레 한 마리이기도 하고 어떤 묘약은 사람이 드나들 수 있을 만큼 커다란 구조물이기도 하다. 어떤 묘약은 허공에 흘러 다니는 바람이나 소리일 때도 있고 어떤 묘약은 눈을 감고 머리에 떠올리는 생각 한 자락일 때조차 있다. 그러니 '묘약'이라는 단어는 사람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붙여놓은 사소한 별명 정도로 여기자. 이름, 모양, 소리, 냄새 그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은 채 눈과 머리와 마음을 열고 세상을 바라볼 때 여러분은 본격적으로 묘약의 세계에 발을 들이게 될 것이다.


서두가 길었다. 바로 들어가자.


멸치나무의 정체


터키 중부 네브셰히르주 카피도키아에 있는 거대한 지하 도시 데린쿠유의 동쪽 끝에는 숨겨진 통로로 연결된 커다란 방 하나가 있다. 만약 여러분이 그 방에 들어가 볼 수만 있다면 그 안에서 펼쳐진, 한 번도 본 적 없는 나무로 이루어진 숲을 만나게 될 것이다. 여러분은 이 나무를 본 적은커녕 이름도 들어본 적 없다. 왜냐면 이 나무는 숨겨진 방 밖에서는 한 그루도 살지 않으며, 모양과 생태는커녕 존재 자체를 아는 자가 거의 없어서 이름도 없기 때문이다. 다만 이 나무를 돌보고 가꾸는 단 한 사람, 아니 단 한 사람에서 시작해 지금은 4256명으로 불어난 하킨 쉬퀴르만은 술에 취할 때면 어금니를 꽉 깨물고 이 나무를 향해 '이런 망할 놈의 멸치 똥 같은 나무'라고 중얼거리곤 한다. 그 ‘멸치 똥 같은 나무’가 이 나무를 부르는 유일한 이름이라면 이름인데, 어감이 너무 거칠고 공격적이니 우리는 그냥 '멸치 나무'로 부르도록 하자.

하킨은 멸치 나무를 이용해 한 사람을 여럿으로 복제할 수 있는 휴먼 프린터를 만들 수 있는 세상 단 한 사람, 아니 뭐랄까, 어쨌든 단 한 명에서 시작해서 지금은 4256명으로 늘어난 인간들이다. 이들은 자신의 몸에 맞는 프린터를 하나씩 가지고 있는데 술만 마시면 프린터를 이용해 자꾸 자기 자신을 복제하는 버릇이 있어서 나이 70이 넘은 현재 4256명까지 그 숫자가 늘어나고 말았다. 하킨은 술만 깨면 복제된 자신들을 향해 악담을 퍼붓고 프린터를 또 사용한 자신을 경멸하며 프린터를 부숴버리곤 하는데, 다시 술에 취하면 부서진 프린터를 수리해서 자신을 또 복제해 버린다. 대체 왜 술만 마시면 자신을 복제하는 것일까. 어떤 하킨은 이것이 그저 우울한 술버릇일 뿐이라고도 하고 어떤 하킨은 비뚤어진 자기애 탓이라고도 하고 어떤 하킨은 프린터에 자신을 복제하는 것만큼 좋은 운동이 없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2009년, 59세 생일을 맞이해 멕시코 칸쿤에서 총회를 연 하킨들은 총회 이후부터 모두 술을 끊고 다시는 자신을 복제하지 말자고 결의했지만 그날 밤 취한 하킨들이 복제해 새로 만든 새 하킨만 해도 43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사실 4256명이라는 숫자도 2014년 인도네시아 보르네오 섬에서 열린 하킨 총회 때 모인 하킨들의 숫자를 말한 것일 뿐, 지금 현재 하킨이 몇 명으로 늘어났는지는, 하킨 자신들조차도 정확히 알지 못한다.


프린터의 구조


이 책에서 소개하는 다른 묘약들과는 달리 이 휴먼 프린터는 여러분이 직접 만들 수 없다. 데린쿠유 지하도시의 어느 곳에 비밀의 문이 숨겨져 있는지, 그 나무를 어떻게 가공해서 휴먼 프린터를 만들 수 있는지는 하킨들만이 알고 있는 비밀이기 때문이다. 다만 하킨들의 손에 만들어져 판매된 프린터들의 치수와 나무의 모양, 성분에 대한 연구는 연구원들에 의해 실행된 바, 여러분에게 간략히 전달해 줄 수는 있다.

휴먼 프린터는 사람 모양을 한, 가운데가 뻥 뚫린 일종의 틀처럼 생겼다. 사람 모양의 쿠키 커터를 나무로 거대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하면 틀림없다. 프린터 각 부분의 치수와 모양은 다음과 같다.


높이 ; 머리 꼭대기에서 양 다리 사이까지의 거리. 대상자의 신장x 13


머리 ; 정확한 원형. 지름은 대상자 머리 지름 x 12.908


목의 폭 ; 폭은 대상자 목의 둘레 x 11.998 % 3.14+32.4cm. 길이는 대상자의 쇠골 가운데부터 턱까지 길이 X 12.6 +12.4cm


몸 ; 길이는 대상자의 쇠골 가운데에서 배꼽까지의 거리 x 13 + 59.4 cm. 폭은 대상자의 가슴 밑 둘레 x 13.21


팔 ; 양 겨드랑이 각도 43.7도. 폭은 대상자의 팔꿈치 둘레 x 6.2, 오른팔 길이는 대상자의 어깨부터 손목까지의 길이 x 11.27. 왼팔 길이는 대상자의 어깨부터 손목까지 길이 x 10.87+ 23 cm.


다리 ; 다리 사이 각도 74.2도. 다리 폭은 대상자의 허벅지 둘레 x 6.2, 오른 다리 길이는 대상자의 오른쪽 골반부터 복숭아뼈까지의 길이 x 11.27, 왼 다리 길이는 대상자의 오른쪽 골반부터 복숭아뼈까지의 길이 x 10.87 +23 cm.



2017년 호주에서 열린 하킨총회 당시의 하킨들과 멸치나무 프린터


위와 같은 모양과 크기로 완성된 프린터를 세워놓은 뒤 오른손잡이는 프린터의 오른쪽 발, 왼손잡이는 프린터의 왼쪽 발을 걷거나 뛰어서 통과하면 들어갈 때 하나였던 사람이 프린터 틀을 통과하는 순간 둘이 되어 나온다. 양손잡이의 경우 아무 쪽 발이나 통과하면 된다. 왼손잡이가 프린터의 오른쪽 발을 통과하거나 오른손잡이가 프린터의 왼쪽 발을 통과하면 아침잠이 많고 저혈압인 복제 인간이 만들어진다.

묘약협회 산하 휴먼 프린터 연구 협회는 1937년 8월, 칠레에 살고 있는 한 하킨으로부터 가공 전의 원형 멸치 나무 조각과 프린터 제작을 위해 가공한 멸치 나무 조각을 각각 200g씩 전달받은 바 있다. 연구 결과, 가공된 나무에는 원형의 나무와는 달리 테트로도톡신, 지로미트린, 무스카린, 트리코테신 등 무시무시한 독소뿐 아니라 아직 학계에 보고된 적 없는 형태의 독감 바이러스나 현대에는 이미 사라진 것으로 보이는 원시적 형태의 세균마저 존재했다. 하킨들이 이 많은 형태의 독소와 바이러스, 세균들을 어떻게 사람을 해치지 않는 불활성화 상태로 가공해서 나무에 입혀 놓았는지, 이 독소와 균들이 인간의 복제에 어떻게 작용하는지 아직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 이 밖에도 가공된 나무에서는 산화된 폴리프로필렌이나 파피루스, 자작나무 가루, 닭껍질, 고무 진액 등이 사용된 것으로 밝혀졌다. 역시 어떤 이유로 이 재료들이 사용됐는지 아무도 모른다.


프린터 주문, 제작 방법


연구원들의 오랜 노력에도 불구하고 지금으로선 하킨들에게 휴먼 프린터를 직접 주문 제작하는 것 외에는 일반인이 휴먼 프린터를 가질 방법이 없다. 프린터기의 가격은 어떤 하킨이 만드는 가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현재 멕시코에 살고 있는 한 하킨은 프린터 하나를 팔면서 단 돈 230 달러만을 요구한다고 한다. 독일에 있는 한 하킨은 프린터 하나의 가격으로 37만 5천 유로로 요구하며 한 번에 3개 이상 구매할 때만 주문을 받는다. 그렇게 만들어진 모든 프린터는, 사실 같은 하킨이 제작하는 것이므로 품질에 차이가 없다. 다만 주문을 하기 위해선 구매자가 직접, 3, 4년에 한 번, 12월 24일에 열리는 하킨 총회에 방문해야 하는데 총회의 장소는 매 번 바뀌며 그 해의 장소는 9월 중순 무렵 *하킨스 홈페이지에서 공개된다. (주석 ; www. Hakinsprintersdisaster.org) 총회에 도착한 뒤에는, 안타깝게도 여러분은 싼 가격을 부르는 하킨을 찾을 수 없다. 다 똑같이 생겼기 때문이다. 찾는다 해도 그 하킨에게 프린터를 주문할 수 있을지 전혀 보장할 수 없다. 현재 4256명의 하킨 중 휴먼 프린터 제작을 계속하고 있는 하킨은 23명에 불과하며 그 하킨들도 다른 하킨들과 마찬가지로 총회 도착 순간부터 술에 취하기 시작해서 두 시간 후에는 제대로 주문을 받을 수 없는 상태가 되는 데다 정신이 있다 해도 기분에 따라 주문을 거절하기가 일쑤다. 매 총회마다 평균 3명 정도의 하킨이 2개 안팎의 프린터 주문을 받아 집으로 돌아간다. 휴먼 프린터 제작은 모두 수작업으로 이뤄지기 때문에 한 명의 하킨이 일 년 내내 만들어낼 수 있는 프린터의 수는 많아야 2개에 불과하다. 만약 여러분이 프린터 제작을 위해 총회를 방문한다면, 방금 도착한 하킨들 하나하나를 붙잡고 주문을 받는 하킨을 찾아낸 뒤 하킨이 지루해서 짜증을 내기 전, 대략 3분 이내에 제작을 부탁하도록 해야 한다. 가격을 묻거나 흥정하는 것은 이런 상황에서 거의 불가능하니 프린터를 원한다면 돈은 달라는 대로 당장 내주는 수밖에 없다.

여러분이 프린터의 주문 제작에 성공한다 해도 그 거대한 프린터를 보관, 사용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이런 이유로 휴먼 프린터는 국가나 군대 단위에서 주문 제작하는 경우가 제일 많다. 구매자들이 구매 사실을 공개하기 꺼려해서 정확한 숫자가 확인되고 있지는 않지만 묘약협회는 30개 이상 국가 혹은 군대가 휴먼 프린터를 이용해서 강력한 군인을 복제해 부대를 이루거나 우수한 과학자를 복제해 특수 연구소를 구성하는 등을 시도해 왔던 것으로 보고 있다. 성공했을까? 역시 알려지진 않았지만, 나는 회의적이다. 프린터를 구매해 사용했던 내 친구의 경험담을 전하며 여러분과 그 이유를 함께 짐작해 보자.


멸치 프린터 실사용 후기 - 대한민국 김현민


2001년 12월,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열린 하킨 총회에 참석한, 당시 37세였던 대한민국 출신의 김현민은 기적적으로 이집트 바니수와이프 근처에 사는 하킨에게 휴먼 프린터 제작을 의뢰하는데 성공했다. 당시 가격은 28만 달러였다고 한다. 큰돈이었지만 현민이는 부모님의 집까지 담보로 잡고 대출을 받아 값을 지불했다. 현민이는 전력을 다해 게으르게 살고 싶은 소망이 있으면서도 삶에서 많은 것을 이루고 싶은 욕심 또한 큰 친구였다. 그런 현민이에게 복제된 자신을 이용해서 성취와 게으름이 공존하게 하는 삶을 구매하는 가격으로 28만 달러는 큰돈이 아니었다. 거대한 프린터를 보관, 사용하기 위해 현민이는 경기도 여주군 외곽, 주변에 이웃은커녕 논밭조차 없고 도로로 제대로 나지 않은 시골로 이사를 하기까지 했다.

주문을 의뢰한 지 8개월 후, 현민이의 여주군 외곽 집 앞에 드디어 휴먼 프린터가 도착했다. 흥분한 현민이는 그날 밤, 밤새도록 프린터의 앞 발을 부분을 달려서 통과하고, 통과하고, 또 통과했다. 아침에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176명의 현민이가 집 주변에 빽빽하게 서 있었다고 한다. 많은 현민이들을 보며 뿌듯해진 현민이들이 서로에게 외쳤다. 오늘부터 외국어 공부를 시작해. 다른 현민들이 또한 서로에게 외쳤다. 너는 가서 요리를 배워. 또 다른 현민들이 다시 서로에게 외쳤다. 넌 우선 가서 청소부터 해. 그 어떤 현민도 외국어를 공부하려 하지 않았고, 요리를 배우려 하지 않았고 청소를 하려 하지 않았다. 자기 말고도 그 일을 할 현민이 충분히 많았기 때문이다. 현민이들은 서로에게 시키려고만 하고 스스로 뭔가를 하려 하지 않는 모든 다른 현민들에게 큰 분노를 느꼈다. 그리고 동시에 불안함도 느꼈다. 자신이 복제된 현민이라고 느끼는 현민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가 자신이 진짜 현민이라고 주장했다. 현민이들은 자신을 진짜 현민으로 인정하지 않는 다른 현민들을 위협으로 느끼기 시작했다. 이내 어딘가에서 고함이 들리기 시작했다. 잠시 후엔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들리고, 때리고 쓰러지는 소리까지 났다. 저녁 무렵엔 몸도 마음도 엉망이 된 현민들이 도망치듯이 그 자리를 빠져나갔다. 다음 날 아침까지 현민의 여주군 외곽 집에 남은 현민이들은 서른 명도 채 되지 않았다. 사방으로 흩어진 현민들은 하나의 신분증으로 사방에서 출몰하다가 절반 가까이가 사기꾼으로 체포됐다. 나머지 중 일부는 새로운 신분을 사려고 시도하다가 역시 체포되었고, 또 다른 일부는 새 삶을 위해 밀항을 시도하다 죽거나 또 체포됐다. 무사한 것은 현민의 집에 남았던 서른 명 정도뿐이었다. 그들은 오랜 불화의 시간 끝에 서로를 진짜 현민으로 간신히 인정하고 많은 것을 포기한 채 살아가고 있다. 남아있는 그 어떤 현민이도 끝까지 외국어를, 요리를 배우지 않았고 청소를 하지도 않았다고 한다.



(묘약 시리즈는 매주 월, 목 2회 연재됩니다. 마음에 드셨으면 구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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