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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리향 Oct 08. 2024

미안, 내 몸아!

 내 몸은 꾸준히 신호를 내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둔감했다. 알았다면 당연히 대처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의 관심은 온통 투자 유치에 쏠려 있었다. 나는 투자 유치를 위한 시연 장치를 만드느라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대전의 공구 상가 안에 있는 업체에 실험 장비 제작을 맡겼다. 혼자 일하는 사장은 공학적인 견지에서 정말 훌륭한 사람이었다. 나는 그 업체 이외에 여러 업체를 들를 예정이었다. 그러나 그 업체에서 제작 방식에 대한 전반적인 사항을 파악하느라 2시간이 넘는 시간을 소비했다. 처음에 사장은 자신의 장비로는 내가 설계한 장치를 만들 수 없다고 했다. 그런데 점차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설계를 조금 변경하면 자신의 장비로도 충분할 것이라 말을 했다. 그래서 어떻게 변경하면 되겠냐고 물어보았고 그가 변경안을 제시했다. 그런데 그 변경안이 매우 훌륭했다. 나는 깜짝 놀랐다. 그는 선반과 밀링을 다루는 단순한 기술뿐만 아니라 소위 말하는 엔지니어링 감각을 지니고 있었다. 나는 거의 매일 출근하다시피 공구 상가에 들렀다. 집에 돌아와서는 프로그램을 작성하고 도면 작업을 해야 했다. 쉴 틈이 없었다. 

  그러다가 건강을 좀 챙겨야겠다는 마음으로 다시 인근 천마산으로 산책을 나섰다. 18일 만이었다. 나는 보통 일주일에 두세 번은 천마산을 방문하곤 했었다. 그런데 예전에는 산책을 해도 전혀 땀도 안 나고 운동도 되지 않아 문제였는데 이번에는 몇 발자국만 떼도 숨이 찼다. 그 정도면 눈치가 있어야 하는데. 왜 이러지? 뭔 문제가 있나? 정도를 넘어서지 못했다. 그냥 일시적인 거겠지 하면서 다음날에도 그다음 날에도 숨을 헐떡이며 산책을 마쳤다. 그전부터 이미 징조가 있었다. 산에 가기 위해서 나는 세 가지 길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었다. 그중 하나는 조그만 계단을 통해야 했다. 그런데 어느 날인가부터 그 작은 계단을 오르는데도 버거워하고 있었다. 그러나 너무 무리해서 좀 몸이 조금 안 좋을 뿐이라 치부했다. 정말 멍청했다. 그때 나는 P 내과에 찾아가서 몸의 변화를 상담했어야 했다. 

  아마 그때 나의 적혈구 수치는 형편없이 낮았을 것이다. 적혈구 수치가 현저하게 낮으니 산소 운반에 문제가 발생하고 숨이 턱밑까지 차오르고 있었는데 나는 <수>에게 무심했던 것처럼 내 몸에도 무심했다. 내가 내 몸에 대해서 무심해진 것은 아주 슬픈 이야기다. 나는 그간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로딩 문제로 심각한 고통을 당했다. 그런데 그 수많은 고통 속에서 내가 얼마나 많은 죽음을 떠올렸겠는가? 고통은 코끼리를 체념하게 만들지만 나를 죽음에 대해서 무덤덤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G 대학 병원 교수에게서 백혈병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무덤덤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보면 그것이 내가 바라던 영혼의 일면이다. 

  그동안 고통이 내 영혼을 조금씩 조각하고 있었다. 로딩 문제가 해결되면서 내 영혼은 바라던 모습에 가까이 다가가고 있었다. 하지만 이내 백혈병이라는 시험대를 마주했다. 그 시험대에서 내 영혼은 크게 흔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안다. 영혼은 나의 몸 상태에 흔들리지 않아도 좋다. 그러나 몸이 망가지도록 방치하지 말아야 한다. 몸이 없으면 영혼도 없다. 영혼이 아무리 흔들리지 않는다 해도 사라지면 아무 소용이 없다. 그러면 흔들리지 않는 영혼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나는 투자 유치에 너무 깊이 빠져버렸었다.  그 일에 푹 빠진 나머지 몸도 돌보지 않았고 다른 모든 신경을 끊어 버렸다. 그러한 집중력이 고등학교 3학년 생활과 대학 4학년 생활을 지탱하는 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집중력은 이번 사건처럼 심각하게 내 몸을 왜곡시킬 수 있다.

  내 몸아 미안하다. 너가 얼마나 간절한 마음이었지를 생각하면 눈물을 감출 수가 없다. 나는 너에게 손이 발이 되도록 빌어야 한다. 너가 보낸 수많은 신호들을 무시하고 간절한 너의 마음을 내가 너의 주인이라는 이유로 무시한 것은 정당한 처사가 아니다. 내가 너의 주인이라 하더라도 너에게도 살아야 할 욕망이 있을 것이다. 그 욕망을 짓밟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내 몸아 앞으로 네가 보내는 신호에 바로 반응할 것이다. 내가 주인이라지만 너는 나의 노예가 아니다. 너에게도 너 나름의 의지가 있을 것이다. 그것을 내가 무시한 것에 대해서 미안하다. 다시는 너의 그러한 신호를 무시하지 않을 것이다. 사실 너와 나는 하나이지 주인과 노예의 관계가 아니다. 미안하다. 내가 많이 미쳐있었다. 이해를 부탁한다. 더 이상 그 정도로 미쳐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다시는 너의 의견을 무시하지도 경시하지도 않을 것이다. 네가 없으면 나도 내 영혼도 없다. 앞으로 나의 영혼이 너를 지키는 파수꾼 역할을 충실히 다할 것이다. 염치없지만 나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주렴. 미안. 내몸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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