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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리향 Oct 08. 2024

새로운 여정의 시작

  본격적인 백혈병 치료를 위해서 나는 준 무균실로 병실을 옮겼다. 항암제가 투여되었고 나의 몸은 항암제를 잘 받아들였다. 지금까지 내 몸을 항생제로부터 깨끗이 유지한 것이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나는 젊어서부터 어지간하면 병원에도 가지 않았다. 감기도 몸으로 때웠다. 특히 항생제에 대한 거부감을 보였다. 나는 내 몸을 깨끗하게 유지하고 싶었다. 그 노력이 언젠가 내가 심각한 위기에 빠졌을 때 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 나의 노력이 이번 치료에서 어느 정도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그 오랜 시간 동안 모은 카드는 이번 치료에서 모두 다 써버렸다. 

  치료를 받으면서 거의 매일 항생제가 들어갔다. 이제 나는 더 이상 항생제로부터 깨끗한 몸이 아니다. 어쩔 수가 없다. 다만 평생 동안 모은 카드의 노력이 헛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아직 몇 차례 치료가 남아 있지만 다행히 1차 치료는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나는 의사나 간호사들의 지시를 잘 따랐다. 내가 나서서 왈가왈부할 사항이 아니었다. 나는 완전 문외한이기도 하지만 내가 간섭을 하면 그들의 자유로운 생각을 가로막을 수 있고 그것은 회복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의사나 간호사나 치료에 있어서 자신감이 필요하다. 내가 간섭한다 해서 그들의 자신감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은 프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그들의 자신감에 조금이라도 상처를 내고 싶지 않았다. 내가 지적한다고 그들이 갑자기 울트라 파워를 갖게 되는 것도 아니다. 그들의 능력이 최대한 발휘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 그러면 나는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어야 한다.

  나는 치료를 받으면서 간호사들이 정말 바쁘게 움직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들에게 감사한다. 나는 그들의 말에 고분고분했다. 다른 불편함은 전혀 없었다. 다만 치료 초기에 두 간호사를 분간하지 못하는 혼동이 발생한 것을 빼면 병동에서 특별한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일반 병동에서의 소란과 난리는 없었다. 나에게 안면인식장애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둘을 구분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이건 중요하다. 간호사마다 나와의 상호작용이 다른 데 둘을 구분하지 못하면 대응이 어려워진다. 둘 다 단발이었고 얼굴 형태도 유사했다. 나는 동물 중에 고양잇과 동물을 좋아한다. 그러나 나는 치타와 표범을 구분하는 데 상당 기간 어려움을 겪었고, 퓨마와 재규어를 구분하는 데 또 어려움을 겪었다. 지금은 넷을 뚜렷하게 구분할 수 있다. 

얼굴 형태만 보면 이것이 치타인지 표범인지 알 수 있다. 

  나는 고양이를 좋아한다. 내가 부천에서 누나한테 최후통첩을 받은 데에는 고양이를 키우고 있다는 사실이 한몫했다. 나는 부천에 있을 때 <경>이라는 코리안 숏헤어를 키우고 있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 녀석은 집사인 나를 무척 닮았다. 식성에서 입 짧은 나를 그대로 닮았다. 조금만 배가 부르다 싶으면 한 입도 먹지 않으려 했다. 더 먹으라고 밥그릇에 들이밀면 사료를 하나 물었다가 이내 뱉어 버렸다. 녀석은 내가 부평 도서관에서 돌아오면 베란다 옷장 위에 있다가 나의 발소리를 듣고 쪼르르 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그리고 한번 벌러덩 누운 다음 내가 배를 한번 쓰다듬으면 바로 일어나서 다른 데로 가버렸다. 이 정도면 됐지? 그게 나에게 보인 최대한의 성의였다. 그것으로 나는 배가 부를 수 없었다. 녀석은 나를 항상 배고프게 했다. 그렇다고 사정을 하고 싶지도 않았다. 나도 자존심이 있다. 

  셋째 누나는 어떻게 알았는지 노발대발했다. 아마 둘째 누나가 고자질한 것이리라. 나는 대학원으로 내려오면서 녀석을 시골집에 데려다 놓았다. 나는 매주 시골집에 들러 녀석을 보았다. 내가 부르면 반갑게 나를 맞았지만 어머니를 좋아하지 않은 듯했다. 그런데 녀석은 저를 똑 닮은 남자 친구를 한 번 나에게 보여 준 뒤로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그것이 녀석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나는 그 일로 충격을 먹었다. 나는 책임질 수 있는 상태에 도달할 때까지 더 이상 고양이를 키우지 않을 것이다. 너무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나는 끝까지 <경>을 책임지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지니고 있었다.

  시간 지나면서 내가 치타와 표범을 구분할 수 있게 되었듯이 두 간호사를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한 명은 치타와 같이 뼈대가 얇고 다른 친구는 상대적으로 표범처럼 단단했다. 둘 사이의 차이를 구분하는 데 거의 2주일의 시간이 필요했다. 둘 사이를 구분할 수 있게 될 즈음에 나의 치료는 중반부를 지나고 있었다. 치료는 순항하고 있었다. 1주일이 더 지나자 담당 교수는 다음 주면 1차 치료가 끝이 날 것이라 했다. 조혈모세포 이식을 위해서 형과 누나들의 DNA를 조사했는데 형이 100% 일치한다는 소식도 들었다. 매우 반가운 소식이었다. 다시 일주일이 지나서 나는 1차 치료를 마치고 퇴원을 했다. 나는 셋째 누나 집에서 요양을 시작했다. 집 앞에 논이 내다보이는 누나의 시골집은 요양에 최적화된 환경을 제공했다. 날씨도 요양에 부담을 덜 주는 방향으로 바뀌고 있었다. 겨울이 이제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 머지 않아 새봄은 준비를 마칠 것이다. 곧 새봄이 찾아오듯이 나의 인생 여정도 새롭게 이어지기를 빌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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