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만리향 Oct 08. 2024

영혼이 시험대에 서다

  병실의 중앙 자리는 여러 가지를 경험하게 만드는 절묘한 자리임은 확실했다. 옆자리의 외국인 친구가 보인 마지막 행동은 일시적으로 나에게 심한 무력감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옆자리가 조용해지자 이번에는 앞자리가 떠들썩해졌다. 환자는 40 초반의 남자였다. 그의 정확한 병명을 알 수 없지만 그는 다리를 움직이지 못하는 듯했다. 전공의인듯한 병원 관계자가 수술을 앞두고 그 환자에게 엄청 겁을 주고 있었다. 내가 들어도 섬뜩했다. 수술하다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수술을 앞두고 그렇게 심하게 말을 해도 되나 싶을 정도였다. 

  그는 말이 없었다. 나중에 같은 말을 들었을 때 나도 침묵했다. 그것은 병원만이 당당하게 내지를 수 있는 협박이다. 병원 관계자는 왕창 겁을 주었지만 수술은 별 탈없이 잘 진행되었던 듯하다. 매우 오래 걸린 수술이었다. 병원 관계자는 수술이 잘 되었다고 말했다. 이제 관리만 잘하면 된다고 했다. 그는 거동이 불편했기 때문에 보호자가 필요했다. 나이 든 어머니가 아들인 그를 돌봤는데 둘 사이에 좋은 기류가 흐르지는 않았다. 가끔가다 큰 소리가 들리고 무엇인가 엎어지는 소리도 들렸다. 이 자리는 그런 소리를 감수해야 하는 자리였다. 세상사에서 벗어나 잠시 쉬어가는 시간을 가지라고 환자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는데 뭘 모르고 하는 소리다. 여기 세상도 바깥세상만큼이나 소음과 소란이 심하다. 

  다음날 오전에 나는 앞으로 있을 치료를 준비하기 위해서 히크만 카테터를 장착하는 수술을 받았다. 마치 전장에 나서는 장수의 갑옷과 같이 치료를 위해서 필요한 장비였다. 그 사전 작업으로 내 심장 상태가 어느 정도인지 체크를 하기 위해 심장 초음파를 찍었다. 심장 초음파는 처음 들어본 내용이었다. 심전도는 그냥 손, 다리, 그리고 가슴에 측정기를 올려놓고 심장 박동만 재만 그만이다. 그래서 순식간에 모든 것이 끝나버리고 만다. 그런데 심장 초음파라는 것은 달랐다. 측정 시간도 30분이나 걸렸다. 사람에 따라서는 40분 이상이 걸린다고 했다. 환자가 얼마나 측정자의 지시를 잘 따르는지에 따라서 시간이 달라졌다. 젊은 여자 측정자는 나에게 반드시 누우시고 숨을 참으세요라고 말한 다음 찰칵찰칵 사진을 찍었다. 아주 다양한 자세로 작업이 진행되었다. 국민 체조보다 많은 자세를 나에게 요구했다. 측정이 거의 마무리 지어갈 즈음, 그녀는 아주 잘했어요 라며 칭찬의 멘트를 날렸다. 내가 남들보다 빠르게 마친 것도 그녀의 지시를 아주 잘 따랐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칭찬은 결코 듣기 싫은 소리가 아니기에 “이 정도 가지고 뭘 “ 하면서 나는 흐뭇한 마음을 가졌다. 아직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심장 초음파를 끝내고 나는 수술실로 옮겨졌다. 의사 가운을 입은 사람들 다수가 포진해 있었다. 나는 마루타였다. 그들은 집도의가 어떻게 수술하는지 지켜보는 전공의들일 것이다. 나는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하니 시간을 달라고 했다. 그들은 아마 피식 웃었을 것이다. 무슨 대단한 수술을 하는 것도 아닌데 호들갑을 떨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생각은 중요하지 않다. 내가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다. 이것은 내 인생 처음 칼질이다. 그들의 입장에서 매일 벌어지는 일상 중 하나의 이벤트에 불과하겠지만 나에게는 인생에 처음 겪는 이벤트인 것이다. 둘 사이에 관점이 다를 수밖에 없고 그들의 입장은 나에게 의미가 없다. 마취가 되었기 때문에 나는 아무런 고통을 느낄 수 없었다. 무엇인가가 내 몸을 긁고 지나가고 있는데 그것이 칼날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은 한 10분에서 20분 정도 걸렸던 듯했다. 다 끝났습니다. 환자분 수고하셨어요. 이제 전투에 나설 준비가 되었다. 

  수술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셋째 누나한테서 다급한 전화를 받았다. 누나는 다짜고짜 S 병원으로 옮기자고 했다. 둘째 누나가 검색을 해보니 백혈병에는 S 병원이 대한민국 최고란다. 나도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하영 선배가 보내준 게시판 글에 S 병원에 가기 위한 자신들만의 방법들이 수두룩하게 댓글로 달려 있었다. 댓글들 속 사람들에게 S 병원에 가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없는 당연한 사실이었다. 그들에게는 어떻게 가야 하는지가 중요했다. 누나들도 그런 글들을 여기저기서 보았을 것이다. 나는 고민에 빠져야 했다. 그래서 다시 의견을 듣기 위해서 두 채널에 연락을 시도했다. 첫 번째는 하영 선배였다. 선배의 대답은 당연히 S 병원이었다. 두 번째는 부민이었다. 나는 부민에게 현재 나의 상황을 설명하고 H 내과 의사의 의견을 물어보라고 부탁을 했다. 그 의사도 S 병원이 대한민국 최고이고 옮기는 것에 동의했다.

  마지막 한 사람이 남았다. 그것은 바로 나였다. 나는 나름대로 조사를 시작했다. 이번에는 컴퓨터를 사용할 수 있었다. 전날 셋째 누나가 노트북을 가져왔기 때문이었다. 검색을 해보니. 지방에서 사람들이 너도나도 서울로 무작정 몰린다는 뉴스가 눈에 들어왔다. 왜 사람들이 모두 서울로만 올라가려 하는지 검색해 보았다. 내가 내린 결론은 이랬다. 사람들이 아주 적은 가능성의 차이에도 크게 반응한다는 사실이다. 목숨이 걸린 일이다. 그러니 1% 아니 0.1%라도 가능성이 높다면 그곳에 몰리는 것이다. 남들이 좋다고 하니 따라 하는 군중 심리도 어느 정도 작용했을 것이다. 나는 고민에 빠졌다.      


   ”나도 그들처럼 우선 서울로 가야 하는가? “     


  그러나 나는 이 질문에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대답을 했다.     


  ”나는 반드시 살아야 하는가? “     


  부민이는 자기 같으면 S 병원에 갈 것이라 말을 했다. 그러나 나는 두 번째 질문성 대답에 ”아니요”라고 나 자신에게 속삭였다. 나는 반드시 S 병원으로 갈 필요가 없는 사람이다. 내가 처음 병명을 전달받았을 때 무덤덤했던 것처럼 나는 삶에 대해서 그리 절박하지 않았다. 그러자 나는 쉽게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나는 1%의 가능성에 그런 부산을 떨고 싶지 않았다. 그 1%에 의해서 내가 설령 죽음에 이른다 하더라도 나는 그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나도 죽음이 두렵지 않은 것은 아니다. 나는 이것이 나를 시험하는 시험대처럼 느꼈다. 이 시험대에서 두려움에 압도되면 좋은 선택이 이루어질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내가 이런저런 고민에 빠져 있을 때, 간호사가 들어와서 수액을 바꾸기 시작했다. 나는 넌지시 간호사에게 물었다. 지금 내 몸의 이 히크만 카테터를 다른 곳에서도 사용할 수 있는지 물었다. 그녀는 일반 개인병원은 힘들고 대규모 병원은 가능하지 않을까요라고 대답해 주었다. 그런데 왜 그걸 물어보죠?라고 묻기에 그냥 궁금해서 그런다고 얼렁뚱땅 둘러댔다. 그런데 몇 분 뒤에 수간호사가 나를 찾아왔다. 그녀는 나를 찾은 목적이 따로 있었지만 가볍게 상태가 어떻냐고 물었다. 애피타이저 같은 질문이었다. 그러면서 내일 가족분들이 병원을 방문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러고 나서 나에게 물었다.     

 

   ”여기서 치료를 받으실 거죠? “     


 이것이 그녀가 나를 찾은 목적이었다. 방금 전에 히크만 카테터에 대해서 물어보았던 간호사는 바로 수간호사에게 상황을 설명했을 것이다. 그 간호사나 수간호사는 내가 물어본 행위에 다분한 의도가 있다는 사실을 감지했을 것이다. 그러면 수간호사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 165병동의 현장 책임자로서 나서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나는 잠깐 고민에 빠졌다. 그러나 나는 솔직해지기로 했다. 그것이 그들에게 보일 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라 생각했다. 내가 다른 병원으로 옮긴다고 하면 이상한 짓을 할 것이라는 망상에 빠져 그들의 뒤통수를 쳐서는 안 된다. 어떤 병원이 다른 병원으로 옮긴다고 이상한 행동을 하겠는가? 쓰레기 같은 병원이면 그것이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내 생각에 C 병원은 그런 쓰레기 병원은 아니다. 내가 설령 병원을 옮기더라도 그들은 그들의 직분에 충실할 것이다. 다만 그들도 사람이니 마음 상한 티를 내기는 할 것이다. 그것이 무서워서 뒤통수를 친다는 것은 진짜 쓰레기가 할 일이다. 나는 쓰레기는 아니고 싶다. 

  나는 누나들이 갑자기 S 병원으로 옮기자고 한다. 그러나 나는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궁금한 것이 있는데 이곳과 S 병원의 차이가 무엇이라 생각하냐고 나는 되물었다. 그러자 그녀도 솔직히 대답했다. S 병원은 경험도 많고 그에 따라 경험 많은 의사들도 많다. 따라서 돌발적인 상황이 발생하면 대처 능력이 더 뛰어 날 것이라 했다. 정확한 분석이었다. 나는 그녀의 솔직함에 마음속으로 감사의 말을 전했다.      


  ”관건은 돌발 상황이다. “     


나는 결정을 위해서 더 많은 자료를 수집할 필요성을 느꼈다. 우선 C 병원 의사의 실력이 궁금해졌다. 그래서 나는 병원 홈페이지에 접속해서 담당 교수의 프로필을 보았다. 이 병원 교수들의 대부분은 이 대학 의학과 출신이었다. 그들도 서울의 어느 병원 교수들 못지않게 실력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활동을 살펴보았다. 상당히 많은 논문을 내보내고 있었다. 다만 아쉬운 점은 이번 연도에는 결과물이 없었다. 나름대로 열심히 노력하는 모습을 논문 활동으로부터 알 수 있었다. 개인적인 능력만 놓고 볼 때 S 병원의 의사가 이 병원의 의사보다 월등히 뛰어나지는 않을 것이다. 워낙 최상층의 학생들이 의대를 지원하는 상황에서 그들 사이에 엄청난 차이를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S 병원의 경험치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하루에 10~12건의 골수 검사가 이루어진다는 자료도 있었다. 이 병원 하고는 숫자 면에서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그러나 이 병은 오래된 병이다. 이미 어느 정도 표준 치료 방식이 존재한다. 그러면 숫자의 차이는 어느 정도 극복될 수 있다. 공학적인 견지에서 천 번이나 만 번은 그리 의미 있는 차이는 아니다. 겉보기에 10배의 차이로 보이지만 만 번이 오히려 과한 것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천 번의 경험으로 충분하냐 아니냐다. 천 번으로 충분한데, 만 번을 한들 백만 번을 한들 차이는 없다. 공학적인 견지에서는 그렇다. 큰 숫자는 무의미한 숫자일 뿐이다.

  한편으로 날씨도 고려할 필요가 있었다. 이번 주 주말부터 눈이 오고 갑자기 날씨가 미친 듯이 추워진다고 한다. 영하 10도 이하로 떨어진다고 했다. 그런 상황에서 S 병원으로 이동하는 것이 도움이 될까? 그리고 중요한 사실이 두 가지 더 있었다. 첫째, 여기서는 당장 치료에 들어갈 수 있다. 하지만 S 병원에서는 당장 치료에 들어갈 수 있다는 보장도 없다. 이 병은 신속한 치료가 관건이라고 한다. 두 번째는 보호자의 불편함이다. 셋째 누나는 그 정도 불편함은 아무것도 아니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지만 논산에서 서울까지 오르내리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 나야 전혀 문제가 없다. 왜냐하면 나는 병실에 갇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호자는 계속해서 나에게 보급품을 보급해 주어야 한다. 나는 여러 가지 상황을 종합해 볼 때 이 병원에 남기로 결론을 내렸다. 

  누나들을 설득해야만 했다. 특히 셋째 누나를 설득해야 했다. 수간호사가 가족들의 방문을 요청했기 때문에 나는 둘째와 셋째 누나에게 병원에 들르라고 했다. 나는 누나들에게 이 병은 이미 치료의 절차나 틀이 갖추어져 있다고 우선 운을 띄웠다. 따라서 사람의 능력에 크게 좌우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이 병원 의사의 능력이면 충분히 감당하고도 남을 것이라 말했다. 그러면서 세상에는 두 가지 형태의 일이 존재한다고 말했다. 첫 번째는 이미 틀이 갖추어진 일이고 두 번째는 새롭게 틀을 만들어나가야 하는 일이다. 두 번째는 변수가 다양하기 때문에 사람의 능력에 크게 좌우된다. 하지만 첫 번째의 경우는 돌발 변수나 특이 사항이 없다면 사람의 능력에 크게 좌우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나의 설명이 그리 나쁘지 않은 듯했다. 누나들이 담당 교수를 만나서 결정하자고 했다. 나는 늘 설득에 젬병이라고 생각을 했다. 그런 기술을 누구한테도 배운 적이 없기 때문이다. H 중공업에서 나는 여러 가지를 배웠지만 남을 설득하는 기술은 관심도 없었고 배운 적도 없었다. 그런 점을 고려할 때 누나들을 설득한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었다. 사실 나는 누나들을 설득하기 위해서 준비를 좀 했다. 누군가를 설득하려면 준비를 철저히 해야 한다. 

   면담실에 교수는 둘이었다. 둘 다 젊은 교수 축에 들었다. 그중에 선임 교수가 말을 이어갔다. 아마 수간호사로부터 내가 병원을 옮길지 모른다는 정보를 전달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선임 교수는 자신의 직분에 충실했다. 책자를 내밀며 나의 병명을 정확하게 짚어 주었다. 예상대로 급성 골수성 백혈병이었다. 그는 치료절차에 대해서 간략하게 설명해 주었다. 관해라는 것이 있고 그것에 도달하기 위해서 치료가 1차로 이루어진다고 말했다. 나는 이미 남아 있기로 결정했기 때문에 교수의 말에 추임새를 넣기 시작했다. 나는 적어도 그 정도는 할 줄 아는 인간이었다. 나의 추임새가 있고 나서 누나들이 질문이 쏟아졌다. 이 병에 대한 표준적인 치료절차에 대해서 물었다. 그는 관해에 이르는 표준 절차는 어느 병원이나 동일하다고 말을 했다. 그러자 누나들이 반응했다. 그 이후로 나는 가만히 듣고만 있으면 되었다. 질문과 대답은 누나들과 교수 사이에 이어졌다. 점점 누나들도 여기서 치료하는 것에 동의하고 있었다. 선임 교수는 어느 정도 상담이 끝날 무렵 옆의 젊은 여교수가 나를 담당할 것이라 했다. 

  최종 치료를 위해서 조혈모세포 이식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예전에는 골수이식을 의미했다. 그러나 요즘은 기술이 발달해서 혈액에서 조혈모세포를 채취하면 끝이라 했다. 그러려면 유전자 비교가 필요하고 누나들은 채혈을 해야 했다. 며칠 후에 형과 넷째 누나도 채혈을 했다. 병에 대한 접근이 내가 예전에 알고 있던 상황하고 많이 달라져 있었다. 우선 고통스러운 공여자의 골수이식은 사라졌다. 너무나 간편해진 골수 채취에 나는 이미 놀랐었다. 그런데 더 이상 공여자의 골수를 채취할 필요가 없었다. 혈액에서 조혈모세포를 추출하면 그만이었다. 이는 형과 누나들에게도 엄청나게 부담을 줄여 줄 것이다. 세상이 그동안 많이 변해 있었다. 하영 선배의 말이 맞았다. 얼마 전에 항공우주연구원에서 백혈병을 치료를 마치고 나온 사람을 만났는데 백혈병이 여전히 위험한 것은 사실이지만 예전의 그 무시무시하던 명성의 병은 아니라는 말을 해주었었다. 이 병에 대한 치료제가 나온 뒤로 거의 40년 동안 치료제 개발이 거의 없다시피 했는데 2015년 이후로 새로운 치료제가 쏟아져 나왔다는 소리도 들렸다. 모두 다 호의적인 소리였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무덤덤했다. 

이전 17화 살아 있음을 느낄 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