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를 향한, 마음지도>22
“풍물에 관심 있으세요? 우리 서클로 오세요!”
“하나님의 품에서 대학 생활을 만끽하세요!”
“신입생이죠? 영어는 필수입니다. 우리 서클에 가입하고 함께 공부해 봐요.”
3월 대학 환경에 적응해 갈 무렵 대학 캠퍼스에는 새로운 유혹의 마당이 펼쳐졌다. 이른바 축제.
축제 마당이 펼쳐진 학교는 시끌벅적했다. 째째의 마음도 덩달아 부풀어 올랐다.
서클 가입은 새로운 가능성으로 입장이었다. 정해진 학과를 벗어나 새로운 동기와 선배를 만날 수 있는 세계. 새로운 세상을 알게 될 가능성의 조우.
저녁 6시가 되어서야 수업이 시작되는 야간대학이긴 했으나, 학교에는 학생들이 많았다. 일하지 않아도 되는, 혹은 아르바이트로 시간이 남은 학생들이었다. 돈 벌지 않아도 되는 대학생이 된 째째는 자연스럽게 그들 틈에 섞여 들었다.
째째는 낯설지만 열정 넘치는 선배들의 호객을 즐겼다. ccc클럽도 기웃, 풍물 서클에도 기웃, 시 동아리에도 기웃. 그들 모두는 관심 보이는 째째에서 열정적으로 설명했다. 째째는 그런 풍경이 새로웠고, 재미있었다. 게다가 왠지 으쓱해지는 기분은 덤.
한 번도 누군가의 열정적 프러포즈를 받아본 적이 없는 째째에게 선배들의 가열찬 구애는 쑥스럽고 당혹스러웠지만 설레는 일이었다.
다섯 개쯤 설명을 듣고 자리를 옮기던 째째에게 누군가 불쑥 다가왔다. 그가 작은 책자 하나를 내게 내밀며 말했다.
“우리는 시를 쓰고 사회에 대해 공부하는 서클입니다.”
키가 크고 마른 남자는 청자켓을 입고 있었다. 귀공자 느낌의 선배였다. 그가 덧붙였다.
“우리 서클에서 발간한 작품집입니다.”
째째는 책자를 펼쳤다. 시집이었다.
“신입생 맞죠?”
째째는 고개를 끄덕였다. 펼친 책자 속 시 제목이 달려들 듯 째째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노동자의 삶’
고개를 들어 그를 봤다.
“나는 영문과 2학년 정민. 영화 하나 안 볼래?”
친근한 반말로 그가 제의했다.
“영화요?”
째째의 되물음에 선배는 앞장서 걷기 시작했다. 째째는 아직 보겠다고 말하지 않았는데. 하지만 째째는 그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선배가 대학 건물의 후미진 한 방 앞에 멈추더니 뒤를 살폈다. 째째도 그의 시선을 따라 제 뒤를 돌아다보았다. 서너 발자국쯤 뒤에 세 명의 남자가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선배가 그들에게 물었다.
“없지?”
“어, 없어.”
암호를 주고받듯이 그들의 말은 짧고 간결했다. 알 수 없는 긴장감이 그들 사이에 흐르는 것을 째째는 느꼈다.
“들어와.”
선배가 문을 열었다. 열린 문 앞에 검은 장막이 쳐져 있었다. 사람들 함성이 장막 안에서 새어 나왔다.
“뭐…… 예요?”
두렵지만 째째는 물었다.
“들어와 보면 알아.”
째째는 장막 안으로 들어섰다. 교실 안에는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여자도 있고 남자도 있었다. 스크린에서는 총을 들고 스크럼을 짠 군중들이 모여 함성을 지르고 있다.
째째는 그들 뒤에 자리를 잡았다. 선배는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째째는 스크린에 상영되는 영상의 정체를 알지 못한 채 보기 시작했다.
군중들의 함성은 곧 비명으로 바뀌었다. 화면에 등장한 중무장한 군인들은 곧 무자비한 진압을 시작했다. 이어지는 잔혹한 장면들…… 죽은 채 두 다리를 잡혀 끌려가는 사람, 젖무덤이 도려진 채 죽임 당한 여자, 산처럼 쌓인 시체들, 늘어선 주검들 앞에 통곡하는 어머니들…… 그리고 새벽 적막한 도심을 돌며 저항에 참가해 달라 울부짖는 처절한 여자의 목소리…….
째째는 차마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죽은 자들의 고통은 째째 것이 되었다.
이제까지 안 째째의 세상이 산산이 부서지고 있었다.
그때의 충격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5.18 광주 민주화 항쟁의 진압을 기록한 영상을 보던 대학교 1학년, 19세에 맞닥뜨린 잔혹한 진실은 나의 많은 것을 바꿔놓았다.
퍼즐이 맞춰지듯 마산 한일여실고 기숙사에서 겪은 일들이 떠올랐다. 79년, 외출금지령에 모든 기숙사 방들에 커튼을 내리고 불마저 끄게 했던 일, 태권도 도장을 가던 길에 보았던 거리에 엎드려 통곡하던 사람들의 모습……. 그저 하나의 풍경이었을 뿐이던 과거의 단편들이 부마사태와 10.26과 연관된 풍경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우물 안 개구리’인 내가 보이기 시작했다. 꼭두각시처럼 살아온 내가 느껴졌다.
나는 참담함에 분노하다가, 허우적대다가, 침잠하기 시작했다.
세상 모든 것을 알고 싶다는 열망이 샘솟기 시작했다.
중학교 때 마음속에 그려졌던 커다란 나무, 무수히 달린 나뭇잎 같은, 세상의 모든 것을 알고 싶다는 욕구가 솟구쳤다.
‘세상 전체를 알아야 자유로울 수 있지. 그럴 수 있지.’
‘궁금해! 세상은 어떻게 생긴 거지? 어떻게 돌아가는 거지?’
내게 5.18 광주 민주항쟁의 진실을 알게 해 준 동아리는 문학서클이었다. 시를 쓰고 사회과학을 공부하고, 이를 바탕으로 행동으로 나서 세상을 바꾸는 것을 꿈으로 간직한 동아리.
나는 동아리에 가입했고, 선배 동기들과 어울리며 공부했다. 시를 쓰고, 운동가를 불렀다. 조금씩 우물 밖 세상의 형체가 뭉개진 수채화에서 세밀화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세상의 얼개가 조금씩 보이기 시작하자, 세상 근본으로 시선이 향하기 시작했다.
이 세상의 시작을 알 수 있다면, 그렇게 된다면 끝도 알 수 있을 것이고, 아수라 같은 세상도 보일 것이라 희망했다.
세상의 시초, 이 세상을 움직이는 무언가가 있을 것만 같았다. 그것을 찾게 된다면 지옥 같은 지금의 모습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고, 고쳐나갈 방법도 알 수 있을 것 같았고, 알지 못해 안절부절 불안한 마음의 평화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음이 그것을 찾으라, 채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