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황, 혼술

<자유를 향한, 마음지도>25

by 이기담

이야기


깊은 밤, 텅 빈 거리를 비틀비틀, 누군가 걸어온다. 한껏 구부린 어깨에 푹 떨군 고개. 째째다. 네 걸음쯤 뒤, 누군가 뒤를 밟고 있다. 남자다.

한 걸음, 둘 사이가 좁혀진다.


“저벅.”


다시 한 걸음, 그만큼 좁혀지고.


“저기요.”


째째를 남자가 불렀다. 째째는 알아듣지 못한다.


“저기!”


남자가 째째의 앞을 가로막는다. 째째가 비로소 고개를 들어 그를 봤다. 째째가 물었다.


“뭐죠?”


째째가 남자를 바라보며 시선으로 다시 물었다. 누구냐고, 왜 그러느냐고.


“저기…… 그러니까…… 한 번도 고개를 들지 않았어요. 술집을 나서서부터 지금까지 죽.”


망설이고 더듬거리는 남자의 말은 그러니까 술집에서부터 쩨째의 뒤를 따랐다는 의미. 째째가 말하는 남자를 똑바로 응시했다.


“그런대요?”


두려움 없는 눈빛이라고 남자는 생각했다.


“그쪽 같은 여자를 본 적이 없어요.”


남자를 바라보는 째째의 눈빛이 다시 물었다. ’그래서?‘ 남자가 잠시 주억거리더니 말했다.


“갈게요…….”


남자가 째째 앞에서 물러났다. 째째가 남자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잠시 후, 집 앞.


“이놈의 기집애!”


소리 죽인 엄마의 목소리가 째째를 향해 날아들었다. 공용 대문 앞에서 서성이던 엄마가 째째에게 달려 나와 딸의 팔을 붙잡았다.


“어, 엄마.”

“대체 지금 시간이 몇 시인데.”


이어지는 엄마의 소리.


“술 마셨어? 이놈의 기집애,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누구랑 마셨어?”

“혼자.”

“뭐? 혼자? 혼자서 기집애가 술을 마셔? 이렇게 취하도록?”


엄마는 경악했다.


“여자가 혼자 술을 마시다니. 남자들이 집적거리지 않았어?”

“아니.”

“이놈의 기집애가.”

“정말이야. 한 사람도 그런 사람 없었어.”


째째의 말은 정직한 것이었다. 조금 전 자신을 따라온 남자는 술집 안이 아니니까.






덧붙이는 생각


휴학 뒤 반년 동안의 시간은 내게 온전한 사색의 시간이었다. 정독도서관에서 책 보기, 무작정 걷기, 술 마시며 새로운 감각으로 사색하기, 음악감상실에서 의문에 집중하기.


음악감상실이 생각난다. 살던 방이 있던 안암동 사거리 지하에 있던 찻집의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디제이는 생각난다. 걸을 때 한쪽이 기우는 사람이었다.


가끔 생각에 잠겨 있다가 정신을 차리면 4시간 여가 훌쩍 지났고, 그럴 때면 교대를 하고 나오는 디제이가 보였다. 그때 나는 절박했으므로, 눈치 같은 건 보지 못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명상, 혹은 선을 하였던 듯싶다.


당연히 술집에서 혼술을 하면서도 두려움은 없었다. 위험이나 죽음 따위 상관없을 정도로 절박했으니까. 희롱을 하는 사람도 겪지 못했다.


목숨 건 일탈, 목숨 건 집중이었다. 내게는 살아가야 할 이유, 허무를 넘어설 근본적인 해답이 절실했다. 세상 근본이 무(無)이되, 그 없음에서 만물이 생겨났음에도 살아야 할 이유.


엄마는 '여자가'라는 말로 나의 미래를 한정 짓는 사람은 아니었으나, 나쁘고 힘 센 남자들 많은 위험한 세상에서 조심해야 할 여자의 위치를 상기시켰다. 그리고…… 엄마는 길을 걸을 때도 남자보다 여자가 앞서 걸으면 안 된다는 교육을 받고 자란 전주이씨 효령대군파 딸이었다. 넘어서지 못할 관습의 벽을 엄마는 가슴에 품고 있었다.


휴학을 한 1년여 시간, 엄마는 나로 인해 많은 애를 태우셨다.

외출한 식구 중 누구라도 오지 않으면 잠들지 못하던 엄마를 보고 자란 탓인가. 나 또한 남편이든 자식이든 귀가 전에는 잠들지 못한다. 그런 내가 좋기도 하고, 부담스럽다고 말하는 남편의 양가적 감정을 이해하면서도 바꾸지 못한다. 뭐, 나이 든 지금이야 그럴 일이 거의 없긴 하지만.


스스로의 고민에만 빠져 일탈했던 나로 인해 마음 썩혔을 엄마를 생각한다.

오랜만에 집안 족보를 꺼냈다. 찾아보니 엄마는 벽진이씨 충숙공파 33대손인 아버지 이름 곁에 작은 글씨로 남아있다.

’配全州李氏辛未日九三日年八月二十日生父元春祖禹鼎曾祖芳權外祖朔崔克老‘


그러니까 엄마는 '전주이씨이고, 신미년인 1931년 9월 20일에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이원춘이고, 할아버지는 이우정이며 증조할아버지는 이방권'이다. 또 엄마의 외할아버지는 '삭녕최씨 최극노이다'


이것이 벽진이씨인 아버지와 혼인해서 나를 낳고 살다가 돌아가신 엄마의, 남편 가문의 족보에 남긴 흔적이다.

족보에는 엄마 이름이 없었다. 엄마의 이름은 '이분순'인데.


기록을 보다 나는 잠시 멍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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