짝사랑, 메아리 없는 가슴앓이

<자유를 향한, 마음지도>23

by 이기담

이야기


째째는 공중전화기 안에 있었다. 전화기의 수화기를 들었다 놓기를 벌써 몇 번째.

상대는 같은 학과 동기. 나이로는 두 살이나 많은 사람. 그는 째째가 태어나 가까이서 처음 접한 도회적인 사람이었다. 세상의 혼탁한 이익 따위에는 관심 없는, 그따위 것에는 시크한 웃음을 날리는 사람. 그는 우울 커튼을 두른 채 은둔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는 학교에 자주 오지 않았다. 어쩌다 한 번, 학교에 나와 수업을 들었고, 시크한 표정을 지은 채 학과 점수 따윈 관심이 없다는 식의 여유를 부리다 사라져 버렸다.


째째는 제 마음을 빼앗겨버렸다. 온종일 그의 등장을 기다리다 지치고, 그의 사라짐에 절망했다. 거부할 수 없는 이상한 예감이 째째를 휘감았다. 1학기를 마치고 여름 방학을 앞두고서였다. 예감을 굳이 말로 표현한다면 이런 것.


‘그 사람은 다시 학교에 오지 않을 거야.’

‘다시는 못 만날 거야.’

‘짝사랑도 여기서 끝이 나.’

‘내 마음도 변할 거야.’

‘이런 사랑은…… 다시 하지 못할 거야.’


이는 본능이 알려주는 신호였고, 가 닿을 수 없다는 마음이 알려주는 예감이었다. 강력한 마음의 소리였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느라 우울 보다 들뜸이 많았던 째째의 마음이 조금씩 가라앉기 시작했다. 문학동아리에서 시를 쓰고 사회과학 서적을 읽으며 공부할수록, 인간에 대한 희망보다는 절망이 커졌다. 그럴수록 째째는 중학교 2학년 때 경험했던 대자유의 각성을 부여잡았다. 그것은 째째가 이 세상에서 난파당하지 않고 육지에 가닿게 할 조각난 부유물이었다.


세상 전체를 알고픈 갈망은 커져만 갔다. 그러자 모든 존재가 물음표를 달고 째째 앞에 섰다. 속담도 그중 하나.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

‘하나를 알면 열을 알 수 있다.’


오랜 시간을 이어오며 살아온 인간들 지혜인 속담은 나름의 진실을 품고 있으되, 상반된 의미를 담고 있었다. 째째는 그 다른 의미들이 품고 있는 진짜 인간 삶의 진실을 파고들었다. ‘왜 다르지?’ ‘왜 이렇게 서로 다른 속담들이 만들어진 거지?’


‘나는 뭐지?’

‘인간은 왜 태어난 거지?’

‘생명은 왜 생겨난 거지?’

‘우주는 어떻게 태어난 거지?’

‘인간을 있게 한, 생명을 탄생시킨, 이 세상의 처음은 뭐지?’


그러다……! 째째의 마음에 해답 하나가 떠올랐다.


‘무(無)’

‘없음.’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아주 작은 무엇 하나가 생겨나고, 그 생겨남에서 다른 무엇이 다시 생겨나고…… 지금의 세상이 되고…… 생겨난 것들은 다시 사라지고, 무가 되는!


그러나, 이 같은 마음이 건져 올린 해답은 째째에게 기쁨보다는 허무로 다가왔다.


‘무(無)야. 텅 빈 없음이었어.’

‘그토록 알고 싶었던 세상의 처음, 세상의 끝, 세상 전체가 이 순환이라니! 챗바퀴라니!!’


째째는 지독한 우울에 풍덩, 빠져버렸다.





덧붙이는 생각


그때의 예감은 현실이 됐다. 지독한 짝사랑은 처음이자 마지막이 됐다. 어느 유행가 가사처럼 ’앉으나 서나 당신‘ 생각뿐이었던, 깨어 있을 때나 잠을 잘 때나 꿈을 꿀 때도 '그대' 생각뿐이었던 사랑. 내 몸을 감싸는 모든 공기가, 내 몸에 흐르는 모든 피가, 내 생각을 이루는 마음의 인자들이 오직 ’그‘로 가득 찼던 마음은 떠났다.


혹, 그 예감이 원인이 되었을까?

예감은 현실이 되었고, 그는 내 곁에서 사라졌다. 가끔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설렜던 사람은 이후 내 삶에서 사라졌다. 소문으로도 그의 소식은 들리지 않았다. 그에 대한 나의 마음도 사그라져 기억으로만 남았다.


살면서 많은 사계절을 겪었다. 반복되는 순환, 반복되는 인간의 삶, 반복되는 감정들. 지구 위 생명들은 태어남과 죽음을 반복하고, 그 수레바퀴에 올라탄 나의 삶도 죽음을 향해 순항 중이다.

반복되는 인간의 삶만큼, 35억 년 전 지구 위에 태어나 긴 세월 DNA를 물려주며 살아가는 모든 생명들도 이어달리기 중이다.


이런 생각을 할 때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다. 선.


어머니 아버지에서 이어진 나의 삶을 이루는 시간의 선, 시간 위에 찍힌 경험, 감정 같은 삶의 점들. 반복되는 인간이 겪는 삶은 같은 종(種)이라는 '거시'에서는 같으나, 어떤 것도 같지 않은 개성의 점들로 이루어진 선이라는 이미지.


내가 살아온 선 위에 찍힌 점들을 뒤돌아본다. 방점처럼 큰 점과 보이지 않은 무수한 작은 점들. 앞서 찍힌 점들은 이후 찍힐 점들에 스며들어 뿌리가 되었다.


그 시절 내가 겪은 짝사랑의 점은 제법 크다. 그때 겪은 사랑이 지금의 남편을 만나게 했나?


그랬을 것이다. 사소한 어떤 것도 의미 없는 것은 없으니까, 저 홀로 존재하는 법은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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