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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수정 May 01. 2022

06. 코코의 자리

1.

이상한 순간들이 있다. 잘 지내고 있다고 이 정도면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순간들 사이로 불쑥 공허가 도끼

처럼 들어설 때가 있다.    

  

이대로 괜찮다고 이정도면 충분하다고 감사하다고 일상과 생과 내가 화해하는 순간들 중에도

마치 그 순간들을 칼로 찢어버리듯, 커다란 공허가 침입할 때가 있다.      


내 안에서, 그 무엇으로도 채워질 수 없는 빈 공간이 자신의 존재를 알리면서 황야의 모래 바람을 퍼 올리는 순간들...      


오래 그것들을 모른 척 했다. 긴 밤, 꿈속에서 폭풍우치는 바다처럼 사납게 철썩거리지만

아침이면 태양 빛에 물러서는 유령 같은 그것들을 나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밀어내며 일상을 수거해왔다.      

그런데, 그 시도가 먹히지 않는 순간들이, 소낙비처럼 던질 때가 있다.      


나는 사실 괜찮지 않다고 실은 너무 힘들다고 절규하는 목소리를 도저히 외면하지 못할 때가 있다.     


사랑만이 그것을 채워 줄 수 있음을 나는 안다. 다만 모른 척 할 뿐. 사랑이 대수롭지 않다 주장할 뿐.     


내 마음 깊이깊이 날마다 패이고 패이면서 깊이를 알 수 없게 깊어지고 있는 늪..      

그 곳에서 쇳바람이 부는 날. 나의 생은, 폐허다.      


사랑만이 폐허를 허물고 새 왕국을 건설할 수 있음을 나는 왜 이리 간명하게 알고 있을까.  

그럼에도 왜 나는 그 소리에 귀 기울이는 대신 서둘러 폐기처분하고 아침 햇살에 그 소리를 소독시켜 버리는 것일까.   

  

내 안에서 사랑을 달라고 사랑만이 나를 살게 한다고 나를 치료해준다고 이리 오래 아우성을 보내는데도. 

나는 왜 그것들을 이리도 냉정하고 어리석게 무시하는가.      


너를, 어떻게 사랑해야 할지 모르겠다. 사랑만이 내 생을 구원할 수 있다는 것을 알지만 사랑하는 방법을 

모르는 나에게 그 사실은 독이다. 

그래서 나는 매일 매일 독을 품고 산다. 사랑만이 해독해주는 독을 날마다 생산하며 산다.      



2. 

너와 우리로 살던 시간들이 문득문득 나를 찾아온다. 여전히 현존하는 그 시간들이 봄이면 찾아오는 꽃처럼 나를 찾아온다.      


그렇게 사는 동안 나는 무엇을 했던가. 확실한 것 중 하나, 나는 성실하게 상처받았다.  

    

이름을 지어주는 일. 내가 너를 만나는 첫 번째 방법으로 정했다. 이 방법이 효과적일지는  알 수 없지만 나는 지금, 뭐라도 해야 한다. 너는 파랑새 같다. 다가가기 어렵지만 다가오도록 유혹하고 죽을힘을 다해 다가가면 달아나버린다. 너는 결코 내 손에 잡히지 않는 밤하늘의 별 같다. 그럼에도 나는 너에게 이름을 지어주기로 했다. 너를 사랑하기로 결정한 이상, 나는 너를 찾을 것이다. 비록 실패하더라도.      


너의 이름에 대해 생각할 때마다, 상처가 말을 건다. 언젠가 너와 나 사이, 에 상처가 꽃처럼 피어 있었다. 나는 상처가 꽃일 리 없다고 단언했다. 나는 상처가 흉측한 몰골의 괴물일거라 단언했다. 상처는 늘 어딘가에 숨어 누구 피, 누구 살이 맛있을까 음흉한 미소를 띠며 침을 흘리고 있다고 단언했다. 그래서 나와 너 사이를 이어주는 사다리를 발견해도 건널 수 없었다.      


코코는 이뻤다. 불쌍했지만 그 와중에도 도도한 꽃처럼 이뻤다. 그래서 처음에는 코코가 상처와 닮았다는 것을 몰랐다.       


처음엔 그저 코코를 안고 있는 것이 좋았다. 든든했다. 코코를 안고 있으면 내가 좀 괜찮아져 보였다. 코코가 와준 내 생은 멀쩡해보였다. 때로 근사해보였다.     

 

코코의 상처는 이뻤다. 상처가 이쁠 수 있다는 것을 코코에게서 배웠다. 모든 상처가 같은 얼굴인 줄 알았다. 보는 것만으로 생을 주저앉히던 그 얼굴이 실은 다양한 이면을, 매력적인 표정을 갖고 있음을 나는 오래 몰랐다.      


코코를 사랑하면서 생이 좀 쉬워졌다. 사랑이 쉬울 수도 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너도 그냥 사랑해버리면

 사실 게임 오버다. 너가 어떤 지랄을 하던 내가 그냥 사랑하면 그걸로 끝이다. 그래서 나는 용기를 얻었다.       

내가 승낙하기 전에는 세상의 그 어떤 것도 내게 상처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진작 알았다면 어땠을까. 내 생은 달라졌을까. 이제 고백한다. 상처를 오해한 건, 사랑하지 못한 것은 내 잘못이었다. 


내 생이지만 나는 아는 것이 별로 없다. 코코가 자신 생에 대해 말이 없듯이. 내 생도 과묵하다.      


이제는 코코도 있다. 나는 날 믿기 어렵지만 코코는 믿을 수 있다. 이유는 모른다. 언제 이유를 알고 생이 진행되었는가. 상처도 코코를 거쳐 내게 오면 봄꽃처럼 친근하다. 한때 메두사의 머리 같던 상처가 때때로 개나리, 진달래 같다.      


코코가 온 후, 나는 알았다. 상처 받지 않은 생은 생이 아니라는 걸. 상처 받지 않고 사는 생은 생명의 생이 아니다. 무생물은 상처받지 않는다. 느끼고 생각하는 존재만이 상처를 받는다. 그러니 상처는 모욕이 아니라 실패의 상징이 아니라 훈장이다. 자신을 찾으라고 신이 쥐어준  무기, 자신을 향해 나 있는 지름길. 나는 그 길들을 거부하고 엉뚱한 길들로 돌아가기 위해 그동안 혼신의 힘을 다해왔다.      


코코의 상처는 온화하고 말랑말랑하고 때로는 귀엽고 때로는 사랑스럽다. 상처는 이 지구의 통행증 같은 것. 코코는 온 몸으로 내게 상처에 대한 새로운 이야기를 들려준다.      


코코 덕분에 알았다. 내가 사랑을 할 수 있는 존재라는 걸. 그 사랑에 위로받는 건 정작 나라는 걸. 코코에 대한 내 사랑은 결코 상처받지 않는다. 코코는 나를 하찮게 여기며 내 사랑의 고백을 들은 척도 하지 않지만 오늘도 내 옆에 누워 있다. 내 손이 닿으면 성가셔하면서 옆으로 몸을 옮기지만 코코는 언제나 늘 내 곁에 있다. 아무리 무관심하고 시큰둥해하면서 지멋대로 굴어도 코코는 내 사랑을 서럽게, 아프게 하지 않는다. 사랑이 상처와 직결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코코는 내게 알려주었다. 만약 상처와 직거래하는 사랑만 했었다면 그건 사랑 탓이 아니라 내 탓이었다.      


이제 되돌아갈 수 없다. 코코를 내 생에서 내보낼 수 없기 때문에. 내가 코코를 사랑하지 않고 이 생에서 무엇을 하겠는가. 코코처럼 그냥 한순간 단번에 훅! 너를 사랑할 순 없을까. 어떻게 하면 그렇게 될까. 코코야 넌 아니? 제발 알려주라. 응? 난 오늘도 자고 있는 코코의 몸을 주무르면서 칭얼댄다. 코코는 자면서도 짜증의 감탄사 크르릉!을 격하게 내뱉는다.      


내 생은 코코 이전과 코코 이후로 나뉜다.      


내 멋대로 코코의 자리를 만들었다. 나와 너 사이에. 그래서 너의 첫 번째 이름은 코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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