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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나무는 기다려주지 않았다

by 마음의여백

몇 주 전부터 노란 은행나무를 보러 가고 싶었다.

차일피일 미루다, 큰맘 먹고 새벽 다섯 시로 알람을 맞췄다.

하지만 책을 읽다 새벽 한 시가 넘어 잠들었고, 결국 두 시간 늦게 출발했다.


출근길 차량이 길게 정체되었고, 문광저수지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아침 열 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뚝 떨어진 기온과 세찬 바람이 온몸을 휘감았다.

은행잎은 이미 바람을 견디지 못하고 떨어진 뒤였다.


막상 마주한 풍경은 생각보다 더 앙상했다. 탁 트인 저수지 위로 몰아치는 바람이,

두 줄로 식재된 은행나무 잎을 떨구게 만들어 버린 듯했다.


리즈 마빈은 「나무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에서

“은행나무는 수려한 외관에 강인한 생명력까지 겸비한 나무”라 했지만,

오늘의 은행나무는 황금빛이 아닌 쓸쓸함만 안고 있었다.


머릿속으로 그려두었던 촬영 포인트, 황금시간대, 구도.

완벽한 장면은 이미 바람에 날아간 뒤였다.


그나마 남아 있는 잎을 파란 하늘을 배경 삼아 순광으로 담고,

은행나무와 저수지를 한 앵글로 담아 보았지만 아쉬움이 남았다.


<문광저수지 은행나무와 산막이 옛길 수종사 앞 은행나무>


나무 의사 우종우는 「나는 나무처럼 살고 싶다」에서

“은행나무는 예나 지금이나 변치 않고 인자한 모습으로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나무”라 했다.

가을이면 연인들의 쉼터가 되는 나무라고도.


하지만 오늘의 은행나무는 쓸쓸함 그 자체였다.

찬 바람에 얼굴은 시리고 불어오는 맞바람에 눈물이 났다.


나무들을 바라보고 있자니 고향의 은행나무가 떠올랐다.

어릴 적 집 앞에 백 년도 넘은 큰 나무.

우리는 그 나무의 열매와 잎을 팔아 학비에 보탰다.


어느 해 명절, 고향을 찾았다가 그 나무가 밑동만 남은 것을 보고 말문이 막혔다.

아랫집 사람이 자기 집으로 열매가 떨어진다며,

부모님께 한마디 양해도 없이 은행나무를 베어버렸다는 말을 듣고 마음이 쓰렸다.


허전한 마음을 달래고자 30분 떨어진 '산막이 옛길'로 향했다.

괴산호수에서 불어오는 찬 바람을 맞으며 보트를 타고,

출렁다리를 건너 붉게 물들어 가는 산길을 한참 걸었다.

문광저수지에서 시작된 허전함이 조금씩 바람에 씻겨 나갔다.


걷다 보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무가 잎을 떨구는 건 겨울을 버티기 위한 생존의 몸부림이 아닐까.

우리 삶도 비바람에 흔들리다 어느 순간 무거운 짐을 하나둘 내려놓을 때,

그때서야 비로소 다시 살아갈 새 힘이 생기는 지도 모르겠다.


새싹이 돋는 봄도,

계곡과 숲이 시원한 여름도,

붉게 타오르는 단풍도,

눈 내린 겨울도.


마음의 소리를 들으며

모든 계절을 건넌다

마음에는 또 한 페이지의 삶을 적어 넣었다.


나무와 자연을 깊은 눈으로 바라보며,

그렇게 또 조용히, 한 계절을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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