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렌치코트"하면 생각나는 장면이 있는가? 필자는 오드리 헵번이 주연한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의 마지막 장면이 떠오른다. 도시 전체를 쓸어갈 듯 비가 쏟아지는 가운데 남주와 여주가 트렌치코트를 입고 서로를 부둥켜안는 장면이다. 이 영화를 보고 난 뒤, 트렌치코트라는 옷에 매료되었고, 결국 버버리 트렌치코트를 구매했다. 오늘은 왜 트렌치코트 하면 버버리인지, 필자의 구매 이유를 적어보겠다.
<티파니에서 아침을>, 1961
트렌치코트와 버버리의 역사 및 배경
트렌치코트하면 버버리, 버버리 하면 트렌치코트를 떠올릴 만큼, 두 조합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그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서 먼저 트렌치코트의 유래에 대해서 알아보자.
Charles Mackintosh(좌측)와 그가 개발한 소재의 고무 레인코트
버버리가 탄생한 영국은 우중충하고 비가 많이 내리기로 유명하다. 1800년대 초, 많은 이들이 이러한 기후 때문에 방수 천을 개발하기 위해 노력했다. 1823년 스코틀랜드의 화학자 찰스 매킨토시는 기존에 의학적 용도로 사용되던 고무를 천에 코팅하는 기법을 도입한다. 그렇게 매킨토시는 고무 코팅을 한 울(Wool) 방수 비옷을 만들게 되었다. 그러나 소재의 특성상 무겁고 통풍이 되지 않는 단점이 있었다. 이후 1843년 가황 공법(Vulcaniztion)으로 개선된 맥코트를 만들었다.
*가황 공법: 고무나무의 수액을 산으로 경화하여 얻은 순수 고무에 유황을 혼합 및 가열하여 고무 특유의 탄성을 가진 안정된 물질을 생산하는 공법으로, 미국의 굿이어가 발견함
Aquascutum 트렌치코트
이후 1853년 존 애머리(John Emery)는 다른 방법으로 더 개선된 방수 양모를 발명했으며, 자신의 재단사 경력을 살려 아쿠아스쿠텀(Aquascutum) 브랜드를 창립했다. 대중들의 인기에 힘입어 그 기능성을 인정받았고, 이내 군용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크림전쟁(1853~1856)에서 장교들은 아쿠아스쿠텀의 코트를 자주 착용했다.
좌측부터 순서대로 토마스 버버리, Smock Frock, 개버딘 원단
버버리의 창립자 토마스 버버리는 “개버딘(Gabardine)”이란 원단을 새로 개발한다. 이는 당시의 농부, 목동, 마부들이 애용하던 외투인 스목 프록(Smock Frock)에 착안한 원단으로 가볍고 방수에 용이하였고 버버리는 이 원단을 사용해 첫 버버리 코트를 만들게 된다. 이는 타 브랜드의 울/고무 혼방 소재에 비해 가볍고 통풍이 용이했다. 이전에는 고무 소재의 코트의 악취를 막기 위해 정기적으로 향수를 뿌렸다고 한다.
좌측부터 타이로켄, 버버리 타이로켄, 1차 대전 트렌치 코트의 그림 및 사진
가벼움과 실용성을 인정받아 미친 듯이 팔려나가던 이 버버리 레인코트는 보어전쟁 때 영국군으로부터 정식 군복으로 채택된다. 이때 단추 없이 허리끈을 졸라 묶는 형태의 코트인 “타이로켄”이 탄생한다. 보어 전쟁 이후 1, 2차 대전에도 군에 공급을 하게 된다. 1차 대전부터는 타이로켄에 실용적인 디테일들이 여럿 추가되게 된 트렌치코트가 탄생한다. 버버리와 아쿠아스쿠텀에서 트렌치코트를 발명했다고는 하나, 실제로는 원래 있던 형태의 의류를 두 브랜드가 널리 알리게 되었다고 한다.
트렌치코트의 다양한 실용적인 디테일들에 대해 알아보자
트렌치코트 디테일 명칭도 및 필자의 버버리 트렌치코트
1. 더블 단추: 허리끈만으로는 쉽게 풀리는 코트를 더욱 단단히 고정하기 위해 추가
2. 건 패치(Gun patch/flap): 총기 격발 시 반동으로 인한 손상을 줄이기 위해 어깨와 가슴 사이에 천을 한 겹 덧대어 보강
3. 손목의 벨트 버클: 참호(Trench)를 오가며 전투할 때 흙이나 다른 오염물이 소매 내부로 침부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
4. 견장: 계급장을 달기 위해 사용
5. 벨트의 D ring: 여러 소지품을 걸 수 있도록 추가
6. 뒤쪽 어깨의 천 덧댐: 비가 올 때 빗물을 빠르게 흘러내리게 하고 통풍을 잘하기 위함
7. 높은 카라: 독가스로부터 사용자를 보호
8. 긴 기장: 보통 착용자의 무릎 및 그 이하까지를 덮어 몸을 보호
가볍고 실용적인 기능 덕에 버버리 트렌치는 군대 외에도 탐험가들에게 사랑받았다. 남극에 여러 번 탐험을 나선 어네스트 섀클턴, 1911년 최초로 남극점에 도달한 아문센, 세계 최초로 대서양 횡단 비행에 성공한 알콕 경 등 많은 탐험가들이 애용했다고 한다. 버버리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시그니쳐 Nova 체크무늬는 이렇게 탐험가들에게 사랑을 받던 1920년대에 트렌치코트 안감에 추가됐다고 한다. 필자의 추정으론 구조를 요청할 때 옷을 뒤집어 구조대에게 잘 보이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싶다. MA-1 재킷의 안감이 비슷한 이유로 주황색으로 변경된 사례를 생각하면 제법 그럴듯하다고 생각한다. 버버리의 체크가 패션에 제대로 활용되기 시작한 건 1967년부터라고 하지만 그건 다른 얘기니 넘어가자.
<카사블랑카>의 Humphrey Bogart, <Kramer vs. Kramer>의 Meryl Streep, "Let's Make Love"의 Marilyn Monroe
아무튼 2차 대전이 종료되며 1940년대 군대의 실용주의 흐름에 따라 트렌치코트의 군용 유니폼으로써의 역할은 점점 줄어든다. 그 대신 할리우드 영화에서 배우들이 트렌치코트를 입고 기자, 갱스터, 탐정, 스파이, 매력적 여주인공 등의 다양한 역할로 출연하며 대중들에게 패션 아이템으로 널리 퍼지게 된다. 카사블랑카 등의 영화에서 할리우드 배우들이 영화에 입고 출연하기도 하며 패션 아이템으로 널리 퍼지게 되어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특징 및 장단점
꼭 버버리 사의 트렌치코트가 아니더라도 투자할만한 상위 라인의 트렌치코트들은 다양한 디테일들을 가지고 있다. 어떤 이유로 추가되었는지 아래에 나열해두었으니, 트렌치코트를 구매할 계획이 있다면 참조해도 좋겠다. (위의 내용과 중복되는 내용이 조금 있다)
1. 소재: 100% 면 개버딘 사용
2. 색상: 오리지널은 카멜/카키 색상이나, 첫 구매가 아니라면 검정/네이비도 좋은 선택이다.
3. 래글런 소매: 어깨에서부터 팔이 하나의 천으로 되어있는 디테일로, 워털루 전투에서 팔을 잃은 래글런 남작이 고안했다고 한다.
4. 더블브레스트: 가장 오리지널 형태의 트렌치코트는 더블브레스트로 구성되어 있으며, 당연하지만 보온성도 더 좋다.
5. 견장: 군용 의류에서 온 디테일, 장갑이나 마스크, 호루라기, 등의 소품을 고정하는 데 사용되기도 했다.
6. 건 패치/ Storm Flap: 위에서 설명한 대로 사격 시 반동이나 거센 바람으로부터 착용자를 보호하기 위해 추가됐다.
7. 목 부분의 후크: 카라를 더욱 단단히 고정하기 위함
8. 벨트의 D 링: 각종 소지품을 고정하기 위한 디테일이다.
9. 손목 벨트: 소매를 조일 수 있는 디테일
10. 뒤쪽 어깨의 천 덧댐: 비가 올 때 빗물을 빠르게 흘러내리게 하고 통풍을 잘하기 위함
11. 벨트 버클: 고급 라인의 경우, 손목의 벨트나 벨트의 고정 부분이 가죽으로 되어있다.
12. 안주머니
13. 내부 체크: 버버리가 아쿠아스쿠텀 사 모두 시그니처 체크 무늬가 안감에 사용되었다.
14. 영국산: 트렌치코트의 본고장
15. 버튼: 플라스틱이 아닌 고급 소재 사용
버버리 트렌치코트에는 4가지 핏이 있는데 첼시/샌드링엄/켄싱턴/웨스트민스터로 나뉜다. 순차적으로 더 여유로운 핏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기장도 엑스트라 롱, 롱, 미디움, 쇼트 등으로 나뉜다. 필자는 가장 슬림한 첼시 라인, 롱 기장을 선택했다. 롱이지만, 요즘 트렌치코트 자체가 짧게 나와 기장이 무릎 위까지만 내려온다.
단점은 언제나 그렇듯 가격이다. 사실 아쿠아스쿠텀이나 버버리 사 모두 최초부터 고급 라인으로 주머니 사정이 넉넉한 인물들만 구매가 가능했다고 한다.
개인적 의미 및 구매 이유
맨 위에서 말했던 바와 같이 필자도 옛날 영화를 보고 트렌치코트에 매료되었다. 허영심 가득 품고 트렌치코트를 입은 채로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셔보자. 마치 흑백 할리우드 영화에 나오는 듯 하다. 구매 이유는 항상 하나로 귀결된다. "좋은 옷 사서 오래오래 입자"
우중충한 가을날, 거센 바람이 불 때 트렌치코트 주머니에 손을 쑤셔 넣고 길가를 거닐며 펄럭이는 옷자락 사이로 체크무늬가 얼굴을 내밀 때 허영심이 차오르는 낭만을 한가득 품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