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언젠가는 로또를…
아무리 내 몸의 70%가 물이라도 그러지. 집주인인 나를 흠모하는 제습기까지 滿水다. 심지어 오늘 아침엔 제습기 주변이 물웅덩이였다. 어제저녁 빨래 건조용으로 제습기를 틀었는데 심통이 났는지 물이 샜다. 빨래 건조기를 살까 말까 망설였던 순간을 후회하며 물을 닦았다.
나는 고등학생 때부터 갖고 싶거나 가고 싶은 곳을 노트에 기록했다. 가장 절실한 순서대로 10개만 적었다. 이루어지면 즉시 그 번호를 엑스로 표시했다. 빈 번호는 다시 채워 넣었다. 늘 10개를 유지하던 나의 소망 노트는 완행열차처럼 더디 갔다. 그래도 종점에 기차가 도착하듯 내 바람도 하나둘 이루어졌다. 애지중지 아끼던 그 노트는 이젠 추억에 잠긴 기억이 되었다.
순번이 앞쪽이던 제습기를 벼르고 벼르다 샀던 그해 여름방학. 나는 매일매일 이방 저 방 끌고 다니며 온 집안 물을 먹여줬다. 배부르다 투정하지 않고 당당하게 물을 먹던 것이 나이 들었다고 조금씩 무너지나 보다. 저물어 가는 나를 보는 것 같아 씁쓸했다. 나는 빨래를 개며 15년 가까이 함께 한 제습기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혼잣말을 했다. '물이 샜다고 너무 심란해하진 마. 일단 서비스센터에 맡겨볼게. 긴 시간 넌 열심히 할 일을 했어. 고마워.'
부산했던 아침을 정리하고 롱 원피스를 차려입었다. 퇴직 후 편한 옷만 입던 내가 멋을 부렸다. 갤러리(라 쓰고 우리들 놀이터라고 읽는다.^^)를 운영 중인 친구 H가 초대한 ‘노년식(老年式)’에 가기 위해서다.
그제 저녁 그 친구로부터 초대 전화를 받았다.
“내 노년식에 너도 초대하고 싶어. 목요일 괜찮으면 프랑스 요릿집에서 점심 먹자.”
뜬금없이 ‘노년식’이라니. 돌잔치, 성인식, 졸업식 등은 들어봤지만, 노년식은 처음 들어본 단어다. 이해하지 못한 나에게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오라면서 약속 장소 주소를 보내왔다. '염불보다는 잿밥'에 눈이 먼 나는 무조건 가겠다고 답장을 보냈다.
전신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그럴싸했다. 오래간만에 구두까지 신었으니. 볼만해서 입을 실룩거리며 집을 나섰다.
친구가 보내준 주소대로 갔지만, 약속 장소는 찾기가 힘들었다. 내가 자주 다니던 길이 아니라 이 골목 저 골목 헤맸다. 다행히 약속 시간엔 늦지 않게 찾아 들어갔다. 식당은 일본식 집을 개조한 건물 2층이었다.
우리 집 작은방 크기 정도로 아담했다. 창문을 바라보며 큰 테이블과 작은 테이블이 1개씩 있다. 중앙 천장에 매달린 전등 불빛이 테이블 위를 은은하게 비췄다. 나는 프랑스 시골집을 방문한 여행객 같아 설레는 표정으로 인사했다.
큰 테이블에 둘러앉아 있는 오늘 주인공 H와 그녀의 지인 3명. 나까지 여자 5명이 모이자마자 그곳에 딱 어울릴만한 주방에서 음식이 나오기 시작했다.
꽃이 그려진 앞치마를 입은 사장님이자 주방장이 음식 이름과 함께 먹는 방법을 설명해 줬다. 내 눈에는 여러 가지 채소를 섞은 것들과 빵인데 이름이 생소했다. 발음하기도 힘든 음식들이 줄을 지어 식탁 위에 채워졌다. 손이 왔다 갔다 바빴다. 입은 먹으라고 있는 도구인 듯. 이야기도 미루고 다들 먹는 데 집중했다.
야무지게 먹는 우리에게 주방장이 빵을 리필해 주며 행운 넘치는 말을 했다.
“다섯 분 모두 먹는 모습에 복이 가득하시네요. 이 여세를 모아 오늘 로또 한 장씩 사시죠. 1등 먹을 것 같아요.”
우린 당첨되면 이 건물을 사겠다며 입안에 든 빵이 튀어나올 정도로 웃었다.
특별 서비스인 커피를 마시려는데 일행 중 화가라는 분이 친구에게 물었다.
“세상에 국민연금 수령 대상자가 됐다고 우리를 초대하다니. H 관장님 대단하세요. 그래 연금은 얼마나 됩니까?”
커피잔을 들던 눈들이 친구에게 향했다.
“내가 30년 전에 딱 10만 원씩 10년 조금 넘게 부었는데. 글쎄 이번 달 25일부터…”
친구는 연금 액수를 목구멍으로 넘기며 소리 내 웃었다. 내가 생각했던 금액이 아니었다. 하루에 만 사오천 원 정도 사용하면 연기처럼 사라질 정도였다
내가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친구에게 물었다.
“그런데 노년식은 무슨 말이야?”
친구 설명은 이랬다.
태어나서 1년 동안 무사하면 돌잔치. 유치원이나 학교를 가면 입학식. 학교를 마치면 졸업식. 어른이 되었다고 축하하는 성년식. 직장에선 퇴임식… 을 하는데.
국민연금 수령 대상자라는 문자를 받자 ‘혹여 내가 약속 시간에 종종 늦어도 이해 바랍니다. 걸음이 점점 느려진 탓이니깐요.'라는 말을 하고 싶었단다. 그래서 좋아하는 사람들을 ‘노년식’이라는 이름으로 초대한 거고. 우린 ‘곱게 늙어가고 있어 좋아.’라는 친구에게 박수를 보냈다. 같이 맛있게 익어가자는 말도 건네면서. 친구 H의 노년식은 느긋하고 천천히 즐기는 점심으로 화려하게 마쳤다.
나는 오늘 복스러운 기운으로 로또를 사라는 프랑스 요릿집 주방장이자 사장님 목소리를 품고 왔다. 아파트 상가에 있는 복권 가게 앞에서 차를 멈췄다. 차에서 내려 징하게 내리쬐는 해를 피하며 상가 쪽으로 걷는데 굉음이 들렸다.
끈적거리는 땀을 날려버릴 정도의 소리와 함께 뻥튀기가 마치 UFO처럼 하늘을 날았다. 고소하고 달콤함이 함께했다. 나는 홀린 듯 침을 삼키며 트럭으로 향했다. 복권방으로 달려가던 지폐를 꽉 쥔 채 튀밥, 옛날과자, 볶은 보리 앞에 섰다. 과자 앞에만 서면 눈이 돌아가는 내 손엔 어느새 뻥튀기 3봉이 들려있다.
소망 노트가 사라진 나에겐 두근거리며 기다릴 로또보다는 즉시 먹는 뻥튀기가 우선이었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점심 소화도 시킬 겸 제습기를 들고 서비스센터를 갈까 하다 관뒀다. '나에겐 내일 외출할 이유가 필요하니깐.'라고 변명하면서. 나는 거실 창을 때리는 쨍한 오후 햇빛의 뜨거움에 더 바삭거리는 뻥튀기를 입안 가득 밀어 넣었다. 덕분에 오늘 하루가 꽉 차올랐다.
<그날 내 뱃속으로 이사한 뻥튀기 3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