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운세

어깨춤을 추는 오늘의 승자

by 김광희

퇴직을 앞두고 가계부 한쪽에 퇴직하면 매일 해야 할 일을 적었다. 첫 번째 칸을 채운 건 ‘현관을 날마다 나서기’였다. 무하는 동안 휴일이나 방학이면 거의 거실, 부엌 그리고 안방 붙박이였는지라. 출근 없는 세상에선 고립이라는 단어가 나를 짓눌러버릴 것 같았다. 그래서 무조건 집 밖을 나가봐야겠다고 주먹을 꽉 쥐었다. 작년 퇴직 후 나는 거침없는 몸놀림으로 노력했다. 카페, 놀이터, 동네 영화관으로. 또는 아파트 관리실 옆 독서실, 평생교육원, 그리고 시립도서관까지.


그렇게 싸 돌아다니다가 평생교육원에서 인연을 만났다. 연애소설처럼 로맨틱한 만남은 아니었다. 그래도 나보다 출생 연도 앞자리가 뒤쪽인 젊은이가 내 삶 속으로 들어왔다. 그녀의 농막에서 책 읽기를 시작했다. 앞뒤 글자를 뒤죽박죽 섞어서 읽으면서 우리는 서서히 합을 맞춰갔다. 그리고 올봄부턴 재미 가득한 쿼클 보드게임을 책 옆자리에 앉혔다.


오늘은 그녀와 만나기로 한 날이다. 아침 6시 30분. 안방 창가에 들이닥친 햇살로 일찍 눈을 떴다. 밤새 ‘열대야 취침’으로 가동하던 에어컨을 끄고 이부자리 정리를 했다. 그렇게 많이 움직이지도 않았는데 뒤 머리카락이 닿는 목에서부터 등줄기를 타고 땀이 흘러내렸다. 나는 이왕 이렇게 된 거 뜨거운 커피를 한잔 마시려고 부엌으로 갔다. 부엌 창가가 요란했다. 어제저녁 고요한 집안에 들어선 내가 불러들인 새끼 거미들이 내는 소리였다. 내 손짓이 벌써 ‘情集’이라고 소문이 나버렸나 보다. 식탁 의자를 밟고 싱크대로 올라갔다. 창틀에서 방충망으로 왔다 갔다 하며 나와 눈을 맞추려 하는 새끼 거미들을 향해 부채로 바람을 보냈다. ‘미안! 어제 내 손짓은 실수였어. 이젠 너네 집으로 갈래.’라며.


소란스러운 창가를 정리한 후 홀가분해진 마음으로 집을 나섰다. 아파트 정문 앞에서 그녀의 차를 탔다. 조수석 시트 위에 ‘교차로 신문’이 펼쳐져 있다. 그녀가 '오늘 찾아볼 내용이 있어서'라고 한다. 나는 신문을 무릎에 올리고 페이지를 넘겼다. ‘오늘의 운세’가 눈에 띄었다. 오래전 흐릿한 희망으로 날마다 신문을 펼치며 내가 찾던 페이지다.


10년을 가정주부로 살던 내가 가장이 되어 친정 곁으로 이사를 오던 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멍한 상태로 시간을 보내며 지냈다. 그런 나에게 공무원이던 여동생이 ‘등용문 학원 1년 치 수강증’을 내밀었다. 학원을 놀이터로, 쉼터로 생각하면서 바깥을 나다니다 보면 길이 보일 거라면서. 초등학교 1학년에 입학한 딸아이가 등교하면 나는 학원으로 갔다. 수업에 집중하지 못하고 휴게실에서 시간을 자주 보냈다. 그렇게 시간을 소비하던 어느 날 책꽂이에 가지런하게 정리된 신문을 보다가 ‘오늘의 운세’를 발견했다. 그날부터 나는 매일 학원 휴게실에 들려 신문을 펼쳤다. 가장이 된 나의 두려움을 날려줄 문구를 찾았다. 오늘은 까치가 행운의 열쇠를 내게 갖다 주기를 바라면서…


시간이 흘러 재취업한 나는 신문만 보면 집착하던 ‘오늘의 운세’ 읽기를 멈췄다.


농막에 도착한 그녀가 탁자 위에 담요를 깔았다. 혹시, 게임중독이 아니냐는 서로의 눈빛에 책 읽기 전 입과 머리의 예열을 위한 거라며 웃었다. 첫판을 내가 이겼다. 그다음 판부턴 그녀의 질주가 이어졌다. 게임 점수를 기록하던 노트 마지막 페이지인데. 이기고 싶었다. 손에 땀이 났다. 결과는 5전 1승 4패. 나의 완패였다. 그녀가 어깨춤을 추면서 시원한 에어컨보다 더 큰소리로 웃으며 소리를 질렀다.

“쌤! 제가 착하게 살아서 그래요. 그래서 이렇게 좋은 일이 있는 거예요. 아! 너무 좋아요."

요란하게 손뼉까지 쳤다. 패한 나는 오늘 아침 해처럼 뜨겁게 달아오르는 얼굴을 식히며 오늘의 운세를 펼쳤다. 그녀의 운세가 적중했다. ‘조용히 기다리면 광명이 찾아올 것이다.’ 나의 운세는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꽝이다.


착하게 살아 게임에 이겼다는 그녀 덕분에 나는 집 밖을 자주 나선다. 그런 그녀와 ‘벽돌 깨기’라는 이름으로 읽어 낸 책이 벌써 15권을 넘어섰다. 꼬이던 혀도 이제는 술술 풀린다. 쉬어가는 코너로 시작한 게임 점수를 기록하던 노트는 앞 뒷장 한 권을 꽉 채워버렸다. 대략 780회를 둘이 주거니 받거니 했던 거다. 그래도 ‘중독은 아니야. 그냥 즐기는 거야.’라며 그녀와 눈을 맞췄다. 패자인 내가 노트를 사기로 했다. 덕분에 내일 문방구라는 집 밖을 나설 이유가 생긴 나는 그녀처럼 어깨를 흔들었다.


이렇게 퇴직 2년 차인 나의 시간은 책 속뿐만 아니라 보드게임 속까지 느긋하게 익어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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