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끼 거미를 키워볼까
이른 아침을 먹고 설거지하는데 부엌 방충망 구멍으로 뭔가 꿈틀거리는 게 보였다. 수돗물을 잠그고 고개를 앞으로 내밀어 방충망을 살폈다. 볼펜 심만큼 작은 벌레 한 마리가 머리를 들이미는 게 보였다.
느릿하고 조심스럽게 구멍을 빠져나오려고 애쓰는 벌레를 향해 나는 물방울이 맺혀있는 오른손을 내밀었다. 앞이 보이지도 않을 것 같은 벌레는 내 손이 닿기도 전에 창문 뒤로 숨어버렸다. 내 손보다 날쌘 작은 녀석이 궁금해 난 싱크대 위로 올라섰다
방충망을 열고 창밖을 둘러봤다. 건물 양쪽 모퉁이를 기둥삼은 거미집이 보였다. 창틀엔 내 손끝에서 떨어졌을 것 같은 물방울들이 까맣게 옹기종기 모여있다. 쭈그려 앉아 작은 것들을 손가락 끝으로 툭 쳐봤다. 움찔하며 까만 것들이 순식간에 벽을 타고 위아래 옆으로 흩어졌다. 자세히 봐도 알아보기 힘든 새끼 거미들이었다.
양쪽 모퉁이 거미줄을 찬찬히 바라봤지만, 27층에 둥지를 튼 어미 거미는 보이지 않았다. 꽁지에 불이 붙은 것처럼 달아난 새끼 거미들이 사라진 창틀로 습기 머금은 더운 기운이 '훅' 들어왔다.
나는 약속 시간에 늦지 않으려 준비하는 동안 내내 부엌 쪽을 흘깃거렸다. 내가 새끼들을 쫓아냈다고 혹시 어미 거미가 들이닥칠까 봐 화장하던 손가락 끝도 떨렸다. 숨을 깊이 들이마신 후 숲길 걷기에 편한 옷으로 단장했다. 선크림과 자동차 열쇠, 핸드폰, 립스틱을 넣은 가방을 들고 조용히 현관문을 열었다.
엉덩이를 뒤로 뺀 채 문을 여는 내 뒤통수로 거미 식구들이 몰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신발을 벗어던지고 부엌으로 달려가고 싶었지만, 약속 시간에 늦을 것 같아 나는 그대로 집을 나왔다.
엘리베이터 벽에 부착된 거울에서 내 오른쪽 입술 위로 뻗쳐있는 립스틱 자국을 발견했다. 웃음이 나왔다. 설거지하다 마주친 작은 벌레 한 마리에 홀려 시간 가는 줄도 모르다니. 손목시계를 봤다. 9시 05분. 지금 출발해도 27년을 달렸던 익숙한 길이니 늦지 않을 것 같다. 나는 능숙하게 오른손 집게손가락으로 번진 립스틱을 닦았다. 가방에서 선크림을 꺼내 입술 주변에 한번 더 발랐다.
며칠 전 동료에서 친구가 된 L에게서 숲길을 걷자는 연락을 받았다. 여유롭게 천천히 피톤치드를 먹자는 말에 P와 셋이 만나기로 했다.
L의 연락을 받던 날. 나는 매주 한편씩 쓰던 글의 30회 마지막을 브런치에 올렸다. 미숙하지만 꼬박꼬박 써냈다는 것에 히죽거리고 있는 나를 본 듯 초대장이 날아왔다. 날씨가 덥지만, 나는 날아가겠다고 했다. 가뿐한 마음으로 여수에 도착한 나는 L의 아파트 앞에서 기다리던 P와 셋이 만났다.
우리는 아파트 뒤쪽으로 이어진 산길로 들어섰다. 여름 열기 덕분에 더 푸르고 싱싱하게 자란 나무들이 줄을 지어있었다. 등산 안내도 앞에선 L이 우리가 걸어갈 코스를 알려줬다. 매주 화요일마다 그 길 끝에 있는 공단 사택으로 손녀를 만나러 간다는 L이 앞장서 걸었다. 푹신한 흙길을 다람쥐처럼 사뿐하게 걷는 그녀 뒤를 P와 나는 숨 가쁘게 따라갔다.
1시간 정도 걸어 오늘의 목적지인 돈가스집에 도착했다. 이제 11시 10분. 점심을 먹기엔 이른 시간이다. 그래도 계획대로 해야 한다는 L의 말에 우리는 자리를 잡고 앉았다.
L이 돈가스와 시원한 맥주를 주문했다. 대낮부터 맥주라니. 놀란 내가 눈이 커졌다.
“오늘 이 자리는 널 위해 마련했어. 30주 동안 고생했어. 홀딱 한 잔만 해. 낮술은 퇴직자들에게 주어진 특권이야."
가슴에서 뜨거운 뭉텅이가 차올랐다. 부끄럽기도 했고.
산길을 걸어온 우리 셋은 냉기 가득한 맥주 한 병을 나눠마셨다.
L 은 숨어있는 내 글 독자였나 보다. 내 글 어디에도 그녀 흔적은 없었으니깐. 그런 그녀가 아직은 미숙한 30주를 알다니. 의아한 표정으로 독자인 P를 바라봤다. P는 대낮 파티를 알고 있었다는 미소를 내게 보냈다.
이른 점심에 취한 우린 다시 챙 넓은 모자를 썼다. 싱싱한 이파리들이 춤추는 흙길을 밟으며 출발 장소였던 아파트로 돌아왔다. L의 집에서 ‘누구나 품고 있을 상처가 꽃이 되는 건 각자의 몫’이라는 이야기를 끝으로 우린 퇴근 시간인 5시에 헤어졌다.
나는 혼자여서 두려웠던 지난 시간을 보상해 줄 만큼의 뜨거운 사랑을 L과 P로부터 또 받았다. 거미줄처럼 얽히고설킨 끈끈했던 직장에서 바둥거리며 시간을 함께한 우리였는데. 퇴직한 지금은 팔을 펴면 어디든지 날아갈 것처럼 편안하다. 나는 아침에 들이마셨던 숨을 뱉어냈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부엌 방충망부터 살폈다. 내가 없는 사이 부엌을 차지한 거미들이 펼쳤을 일들이 궁금했다. 창문을 열어 밖을 살폈다. 아무것도 눈에 띄지 않았다. 다만, 새끼 거미들이 있던 창틀엔 여전히 습기를 머금은 더위가 매달려있었다. 안쓰러운 마음에 창문을 활짝 열어 집안으로 불러들였다. 고요한 시간과 손잡은 더위가 창틀로 스멀스멀 넘어오고 있다. 나는 숨어있는 새끼 거미들에게도 들어오라고 손짓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