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하루

그래도 봄은 온다

by 김광희

걷기를 마치고 왼쪽 다리를 미끄럼틀 계단에 올렸다. 오른팔을 들어 왼쪽으로 쭉 뻗었다. 오른쪽 옆구리가 펴지면서 시원했다. 이번엔 오른쪽 다리를 올리고 왼쪽 팔을 들었다. 왼쪽 옆구리를 쭉 펴는데, 오른쪽 옆구리가 약간 불편했다. 마치 늘어난 바지 고무줄을 자르고 다시 팽팽하게 만든 것 같다. 며칠 전부터 그러긴 했지만, 대수롭게 넘겼는데. 나는 다리를 내리고 조심스럽게 몸을 좌우로 흔들어봤다. 옆구리 쪽보다는 허리 쪽에 가까운 부위가 욱신거렸다. 평소에 잘하지 않던 옆구리 운동 탓이라 여기며 그 부위를 문질렀다.

오른쪽 허리를 주물럭거리는데 어제보다 불편함이 더한 것도 같다. 머릿속을 헤집는 걱정을 다독이며 집으로 돌아왔다. 전공 서적은 버린 지 오래라 기억을 더듬으며 인터넷 검색을 시작했다. 하필이면 부분 신장 절제술을 한 오른쪽이라 두려움이 내 뒤통수를 잡아끌었다. 이제 5개월 된 일상생활이 가능한 신장 암 1기 환자인데. 관련이 있지는 않겠지. 뜨거워지는 뒤통수를 긁적이다 창밖을 바라보는데 눈에 쏙 들어오는 벽시계와 드림캐처. 이름이 대통령 부인과 같아 유명세를 치르던 학생이 준 선물이다. 늘 '쌤! 만수무강하세요'라며 나를 놀리던 녀석은 내가 퇴직 전 마지막 수업을 했던 학급 반장이었다. 입춘이 지나더니 봄이 오긴 오나 보다. 따뜻한 바람이 방으로 들어오며 창에 걸린 드림캐처를 흔들어 깨웠다.


1학기 기말고사를 며칠 앞둔 더위가 하늘을 찌르던 날이었다. 6교시에 들어간 학급은 패딩을 입어야 할 정도로 추웠다. 바깥 기온이 30도를 오르락내리락하는데. 춥다는 단어가 나오다니. 놀란 나는 에어컨 온도를 좀 올리려 했다. 아이들이 소리를 질렀다. 배드민턴 게임을 하고 온 직후라 너무 더우니 그냥 두라고 애원하며 자습하고 싶단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지난 시간에 예고했던 인체 장기 중 심장을 파보자 했다. 다음 시간 심폐소생술 실습을 위한 첫 번째 단계였다.

자습하자던 아이들 바람과 다른 내 말이 시작 버튼이었는지 몇 놈이 바로 책상에 엎드렸다. 찬기가 돌아 입술까지 떨리던 나는 아이들 이름을 하나하나 부른 후 장기 위치가 그려진 그림을 화면에 띄웠다.

심방과 심실, 동맥과 정맥이 촘촘하게 보이는 심장을 확대했다. 수축과 이완을 내 주먹으로 쥐었다 폈다 하며 우심실과 좌심실을 거쳐 이루어진 폐순환과 체순환을 보여줬다. 설명을 들으며 자기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던 반장이 질문했다.

“쌤! 제 심장 크기가 요정도 합니까?”

쏟아지는 졸음을 물리치고 질문까지 해준 녀석에게 나는 미소를 건넸다. 텔레비전 화면에 다시 인체 장기 그림을 띄웠다.

“그림을 보면 간이 제일 크지. 그리고 위는 좀 길고. 그래도 너 몸에 있는 장기들이 그냥 너 주먹보다 크거나 작다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 장기들이 하나씩 자리를 잡고 있는데 신장만 양쪽에 하나씩 두 개지. 그래서 장기이식 중 신장 이식이 가장 많단다.”

한 학기씩 학급을 나눠 수업하던 나는 마지막 수업은 뜨거운 심장으로 했다. 전신에 혈액을 공급해 주는 심장처럼 우리도 뜨겁고 바르게 살자는 의미도 붙였다. 심폐소생술 실습까지 마무리하고 방학에 들어가면 나는 따뜻한 물로 목욕한 것처럼 개운했다.

그런데 그날은 ‘왜 신장만 두 개냐?’라는 반장 질문이 이어져 심장을 제치고 신장을 공부했다. 그 질문에 답하려 나는 왼발을 들고 한발 서기를 했다. 팔을 날개처럼 벌리고 균형을 잡아봤지만, 약간씩 흔들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반장이 박수를 치며 대답했다.

“아! 균형을 잡아주려고요. 그럼 다른 장기들은 왜 하나뿐입니까?”

녀석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질문을 퍼부었다. 나는 ‘심장에서 전신으로 퍼졌다 돌아오는 혈관(길이가 지구를 두 바퀴 돌고도 절반 이상은 남는다고도 했다)에 쌓인 노폐물을 치우려면 2개가 필요' 하다며 덕분에 우리가 몸 균형을 쉽게 잡는 거라고 했다. 6교시 끝 종이 울릴 때까지 신장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해 11월 녀석이 가슴에 무언가를 안고 내게 왔다. 특별 프로그램에서 만든 토끼(라고 주장하는^^) 벽시계와 제주도에서 사 왔다는 드림캐처였다. 인사를 꾸벅하면서 '2학년때는 더 듬직한 학생이 되겠으니 쌤도 만수무강'하란다. 내가 퇴직하는 걸 알고 있다며 선물을 들고 온 녀석의 인사가 날 울컥하게 했다. 올해 졸업했을 녀석이 주고 간 드림캐처를 보니 녀석과 주거니 받거니 했던 수업이 떠올랐다. 심장에서 신장으로 옮겨간 수업 주제. 혹시 그날 내 신장 한쪽에 이상이 올 거라는 걸 알았던 건 아닐까?

인터넷 검색을 하다 말고 혈압약 처방전도 받을 겸 근처 신장내과를 갔다. 오른쪽 허리에 다가온 묵직함에 정신을 집중했더니 혈압이 높았다. 두 손 모으고 공손히 진료실로 들어섰다. 허리를 만져보던 선생님이 ‘부분 절제한 오른쪽 신장 주변이 당기는 거’니 걱정하지 말란다. 혈압이 높으니 다시 한번 체크하고 두 달 후 피, 소변검사를 하자며 혈압약 처방전을 줬다. 내과를 나서면서 참았던 숨을 토했다. 장난스럽게 소리 지르던 녀석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다. 우렁찬 목소리에 기운을 얻은 나는 더 이상 불안이 다가오지 못하도록 손사래를 쳤다. 봄이 오는 길목에 서있는 오늘은 겨울밤 보다 더 긴 하루였다.

<시계 뒷면에 남겨놓은 녀석의 한마디>

https://brunch.co.kr/@93eae9a6a86f4ee/26


이전 18화딱 한 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