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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이수 Jun 27. 2022

성공과 명성을 유지하는 법_ 공성이불거(功成而不居)

머물러 있지 않았던 한나라 소하 이야기

내가 찾고 싶었던 인물이 있었다. “공명(公名)하고도 종명(終命)한 사람”이다. 최고의 인생 아닐까. 세상에 자신의 이름을 널리 알릴 정도로 성공하고, 어떤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자신의 명성을 유지하며 잘 살아낸 사람이다. 하지만 그런 인물을 찾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역사 속에 없진 않았다.

소하


한서 <소하 조참 전>에서 반고가 평하기를 “공명을 이루고, 모든 신하 중에 최고에 자리에서 명성을 얻어, 후세에 이어진 인물”이라고 말한 인물이 있다. 소하이다. 그는 한나라 개국공신으로 활약하고, 이후 백성들에게 인정받는 한나라 최고의 현상(賢相)이 되었고 천수를 다 누리고 살았으며, 후대까지 명성이 변치 않고 유지된 인물이다. 그가 어떻게 살았을까? 그 삶의 비법은 무엇일까?


소하는 진나라 때 지방 관리였다. 그는 법률지식을 가지고 있던 일 잘하던 관리였다. 하지만 여기저기서 진나라에 반기를 들자, 그는 일찍이 유방의 비범함을 알아보고 유방을 도왔다. 그리고 유방이 기의하고 패현 지역 패공이 되었을 때, 소하는 유방을 도와 패승으로 후방에서 여러 일을 맡아 했다. 그러다 유방이 관중 지역으로 들어가 진을 격파하고, 항우보다 먼저 진나라 수도 함양 궁에 들어갔을 때, 유명한 일화가 있다.


함양 궁에 입성하자 다른 장수들은 앞 다투어 재물 창고로 달려가 서로 재물을 탐할 때 소하는 달랐다. 그는 진나라 승상 어사대부 관청에 들어가 진나라의 율령과 도서를 먼저 챙겨 보관했다고 한다. 그는 재물 욕심이 없어서 그랬을까. 아니다. 그는 아마도 신하로서 또 관리로서 다음 계획을 생각하고 이성적으로 판단하여 행동을 한 것이리라. 아직 전쟁은 끝나지 않았고 승리를 위해 여러 정보가 필요했고, 더 나아가 새로운 나라를 추후 통치할 때도 자료가 중요함을 그는 안 것이다. 그래서 그는 함양 성에 들었을 때 탐욕에 빠지지 않고, 차분하게 다음 스텝을 위해 행동했던 것이다.   

     

하지만 당시 더 막강했던 초나라 항우에 의해 유방은 결국 파촉 지역의 한 왕으로 봉해지고, 유방과 소하는 전략적 후퇴를 위하여 험준한 한중 지역으로 들어간다. 이때 소하는 이후 전쟁의 신이라 일컬어지는 초한전의 영웅인 한신을 대장군으로 추천해서 여러 전투에서 승리하도록 돕는다. 그리고 자신은 승상으로서 한중 땅을 지키며 백성을 안정케 하고, 군량을 원활히 공급하며, 후방지원을 충실히 해낸다. 이렇게 백성들로부터 신망이 높아지자, 유방은 소하에게 봉읍을 내리고 포상을 했다. 하지만 이것은 승상으로 명성이 높아지는 소하에 대한 유방의 의심과 견제임을 그는 알아채고 결단을 내린다. 자신의 가족과 지인들을 모두 전장으로 보내는 것이다. 이런 결단은 소하가 유방에게 자신이 후방에서 어떠한 사적인 세력도 키우고 있지 않음을 보이고, 왕의 불안을 해소시켜서 안정적으로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그의 노력이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공명을 바라보는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하고, 그것으로 인해 자신이 위태롭지 않기 위한 방법을 찾아 실행해야 했던 것 아닐까. 그래서 그는 자신의 유능함과 그 성과와 보상에 만족하고 있을 수 없었던 것이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왕 5년에 서초 패전에서 한 왕 유방이 승리하고 논공행상을 할 때, 유방은 소하를 단연코 일등공신으로 인정한다. 이에 다른 장군들이 불만을 보이자 유방은 “소하가 사낭꾼이고, 나머지 장군들은 사냥개와 같다”라고 말하며 몸에 상처가 70군데나 입은 조참보다도 높게 소하의 공을 최고로 인정했다. 말처럼 공(성과)은 드러내지 않는다고 가려지는 게 아닌 것이다.     


그리고 소하는 한나라 초기에 통일된 한나라를 안정적으로 지키기 위해 불의함에도 여태후를 도와 한신을 결국 토사구팽 하게 만든다. 그 일로 한고조 유방은 소하를 또 상국으로 승진시키고, 그를 위한 호위대도 늘려준다. 그러나 소하는 역시 자신에게 추가로 내려진 봉읍을 받지 않고, 자신의 사재도 군비로 돌린다. 이 또한 소하가 백성의 신의가 높고 존경을 받으니 겉으로는 포상을 해도 왕의 마음속으로는 더욱 견제하는 마음이 크리라는 것을 소하는 안 것이다. '지인자지 자지자명(知人者智 自知者明)'이라는 도덕경 구절처럼 그는 타인의 마음을 아는 지혜가 있었던 듯싶다. 이렇듯 그는 왕의 인정과 보상을 받고도 쉽게 자만과 교만에 빠지지 않았다.         


그러나 어느 날 한 과객이 소하에게 또 “당신의 집안의 멸족이 멀지 않았다. 왜 스스로를 더럽히지 않느냐”라고 충고했다. 그러자 소하는 그 말 뜻을 새겨듣고 또 행동한다. 이번에는 말도 안 되게 헐값에 백성들의 토지를 마구 사들이고, 자신의 신망에 해가 되는 행동을 일부러 한다. 그러자 백성들의 상소가 고조 유방에게 올라가게 되고, 한왕은 그제야 “상국이 이제야 백성을 이롭게 하는구나”라고 흡족했다고 한다. 그는 백성들의 신망받는 승상으로서의 '자신의 명성'조차도 내려놓은 것이다. 자신을 좀 더럽혀서라도 나라가 안정되고, 자신도 덜 위태로운 것을 선택한 것이다. 그는 명성 그것에도 집착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왕은 또 사소한 이유를 들어 그를 형틀에 묶어 옥에 가둔다. 그토록 자신의 욕심을 내려놓고, 나라의 안위와 왕을 보필하는 신하를 의심하다니 한 왕 유방도 이제 나이가 들어 약해진 것이다. 이에 다른 신하가 상소를 올리자 한 왕은 마지못해 그를 사면했고 소하는 풀려났다. 그렇지만 그 이후에도 소하는 더욱더 행실을 조심하고 공손히 행동했다고 전한다. 그래서 그를 "한나라를 수성(守成)하도록 한 현인 재상”으로 백성들은 평했다. 그러고 나서 늙은 소하는 한 왕이 죽고 혜제 2년에 생을 마쳤다. 그리고 대를 이어 소하 상국의 후손들은 찬 후에 봉해졌고 소하를 위해 제사를 지냈다.        


이렇듯 능력 있는 신하로, 지금으로 말하면 '최고의 행정가로 한 나라의 총리'의 역할을 잘 해내어 공을 인정받아 '공명'을 이룬 인물이다. 하지만 그는 한 번도 자신의 "공명을 드러내거나, 애써 그것을 지키려고" 한 적이 없다. 오히려 필요하다면 명성이든, 재물이든, 가족이든 집착하지 않고 내려놓았다. 그의 이런 처신이 그가 공명을 이루고 오래 살아남을 수 있게 한 것 아닐까.


당시 한나라 초기에는 진나라 때의 잔혹한 정치로 피폐한 백성들을 쉬게 하는 “황제/노자 사상”이 유행하고 그에 따르는 정치를 펼쳤다. 그래서 우리가 알고 있는 '문경지치'란 것도 황노 사상으로 다스려진 한나라 문제, 경제 때의 무위 정치를 말한다. 그래서 나는 상상해 본다.


그 문경지치 시대를 앞서 이끌었던 리더로서, 공명(公名)하고 종명(終命)한 소하, 그의 삶의 비법은 '머무르지 말라'고 이르는 이 도덕경 한 구절이 아닐까.   


공성이불거 부유불거 시이불거
 (功成而不居 夫唯弗居 是以不去)

공을 이루고 대저 그것에 거하지 아니하니 사라지지 않는다.

- 노자 도덕경 2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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