렌조 미키히코라는 다소 낯선 일본 작가의 이름을 접하고 읽어볼만할까? 괜히 시간 낭비하는건 아닐까? 했다. 그러다, '29쇄'라는 판쇄를 보고, 나름 인기를 끈 이유가 있겠지, 하고는 조금은 얄팍한 마음으로 책을 펼쳤다. 꽤 두툼한 분량의 이야긴데도 거의 지루함없이 술술 읽히는 가독성에 일단 탄복하고 인간심리의 다양한 분석과 형상을 그려낸 데 다시한번 감탄하면서 와, 대단한 작가구나 했다.
미키히코는 대학 전공인 정치경제학 대신 한때 프랑스 파리에서 영화시나리오를 공부하기도 했고 가풍을 이어 1년 동안 사찰의 승려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이후, 그는 서정적 문체 뒤의 충격적 반전과 치밀한 심리묘사로 일본 대중문학의 꽃이라 불리는 나오키 상을 수상하는 등 드넓은 명성을 얻었다. 그러다 위암이 간으로 전이되면서 65세라는 다소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이 <백광>을 요약하자면 ‘전쟁의 폐해’와 ‘인간의 배신’으로 나뉠수 있다. 게이조라는 75세 노인의 남태평양에서의 한 소녀에 대한 살인의 기억이 주된 요소로 작용한다. 그가 징집돼서 출정하던날 전처로부터, 친딸로 알고 키운 당시의 딸이 실은 불륜의 씨앗이라는 말을 듣고 그는 황망히 전장에 투입된다.
오래전 일임에도 게이조는 그당시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전장에서 그또래 한 소녀를 보고는 자신의 부정한 아내와 ‘의붓딸’에 대한 보복으로 그녀를 죽인다. 그러나 전쟁은 무수한 죽음을 전제로, 때로는 그것이 마땅한것으루 치부돼, 전쟁이 끝난뒤 귀국한 게이조는 남과 다를바없는 일상생활을 하고 재혼해서 아들을 두고 평범한 가장으로 살아간다.
그러나 그의 뇌리속엔, 그리고 기억과 혼미한 무의식 속엔 늘, 전장에서 자신이 죽인 그 소녀의 악령이 쫓아다니고 지금의 아내가 병으로 먼저 간 뒤, 그의 증상은 더욱 심해져, ‘가짜 치매’ 연기를 하면서도 ‘실제 치매’와 같은 망상과 기행을 수없이 되풀이한다.
그 외에 이 책이 드러내는 것은, ‘가족’이라는 울타리의, 그 유닛의 부조리함, 모순, 갈등과 애증이다. 처제와 형부의 불륜, 자매간의 증오, 애매한 사랑과 그에 따르는 책임, 이런것들이 뒤범벅돼 과연 누가 진짜 범인이고 그 이유는 무엇일까, 하는 긴박감을 계속 유지하면서 후반을 향해 치닫는다.
그 어떤 추리소설도 이 두가지에서 자유롭지 못할텐데, 그것은 바로 who done it,과 why done it, 일 것이다. 이 두가지 모두에서 성공해야 비로소 장르소설로서의 성공여부가 달린건데 내가 보기에 이 <백광>은 놀라우리만큼, 수많은 트릭과 반전의 결합으로 이 두가지에서 대단한 성과를 냈다고 생각된다. 이 두가지의 답은 실제로 책을 읽음으로서 밝혀내길 바란다.
전장을 경험한 대다수의 사람들이 정신적 외상, 즉 trauma를 겪는다는건 익히 알려진 일이다. 그 대표적인 예로 영화 <디어 헌터>를 들수 있다. 그 영화의 가장 충격적 장면은 바로 일상에서조차 ‘러시안 룰렛’게임을 하며 생명을 ,죽음을 마치 놀이처럼 한다는 것이다.
렌조 미키히코 1948-2013
이처럼 전장에서 수많은 주검을 목격한 이들은 평생을 정신적 외상과 두려움에 시달리는데 그 가장 큰 원인은, 대상으로서의 주검을 목격해서라기 보다, 실제로 자기가 죽인 주검들에 대한 자책과 회한에 기인한다고 한다.
이 <백광>에서 게이조 역시 같은 맥락에서 풀이 될수 있을 것이다. 전쟁은 그만큼 이성을 마비시키고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는 무조건적인 살상이 허용되는 어쩜 ‘기회’인지 모른다. 평소 쌓아온 울분을 애먼 대상에게 쏟아내고 학대하고 죽일수 있는 그런 기회...
게이조의 죽은 아내 아키요의 속삭임처럼 죄사슬과 업보에 묶여 살아가는 중생인 인간은 살인을 정당화하기 위해 그것을 어쩌면 신 (부처)의 의지라고까지 부르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봤다.
“...당신손을 움직이는 건 부처님의 힘이지요. ..섬에서도 그랬어요...당신의 의지가 아니라 좀더 거대한 의지가 그 아이의 죽음을 원했던 것이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