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소설을 주로 쓰는 혁기는 이따금 자신의 고향R시에 대한 글을 지역신문에 기고하곤 했다. 이달의인물 코너에 그가 좋겠다 생각한 지원은 그의 이메일을 알아내 인터뷰요청을 한다.
그러나 몇시간이 지나도 답이 없아 대신 무용가 Y를 섭외하려는데 뒤늦게 그에게서 답이 온다. 외곽의 자신의 작업실에서라면 가능하다고. 안그래도 코앞으로 다가온 R시 문화제준비로 추진위원들이 돌아가며 글을 쓰는 타임이어서 멀리 나갈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의 작업실과 지원의 잡지사는 차로 한시간을 달려야 하는 거리였다. 지원은 좀 귀찮다는 생각에 그럼 다음에 다시, 라고 인터뷰요청을 취소하려하지만 혁기는 오시면 맛있는 커피 드릴게요,라며 인터뷰의사를 밝힌다. 할수없이 지원은 전날 따온 신인가수 V와의 대담기사 정리를 후배에게 맡기고 차키를 들고 바삐 편집부를 나선다.
“어서오세요” 혁기가 조금은 초췌한 안색으로 지원을 맞는다.
“맛있는 커피 먹으러았어요”라고 그녀가 둘사이의 긴장을 어느정도 풀자, 그가 싱긋 웃으며 답한다. 인스턴트 커피밖에 없는데,라며.
그의 작업실은 3평 남짓한 아주 작은 규모였고 벽은 온통 책으로 가득하다. 작가의 방 맞구나, 지원은 새삼 실감한다.
“이번에 R시 문화제 이야기좀” 하고 묻자, 혁기가 대뜸 말한다. 초대할게요,라고. 그리고는 얼마전 R시 바다에서 발굴된 일제강점기 난파선 잔해며 왜곡된 지역감정으로 속앓이를 하는 지역주민들에 대한 이야기를 술술 쏟아낸다.
인터뷰를 마치자 어느색 창밖은 어둠이 내리고 있다.
“꼭 오세요 문화제에” 일어서는 지원에게 그가 팸플릿 한 장을 내민다. 문화제 팸플릿이다.
회사에 들르기엔 너무 늦어 데스크에 곧바로 퇴근한다는 연락을 하고 집으로 들어서는 순간 문자 알람이 온다. 누구지? 하고 보면 조금전 인터뷰한 혁기의 문자다. 꼭 오실거죠? ...이사람 나름 집요한 데가 있구나, 싶다.
간단히 샤워를 끝내고 그와의 인터뷰내용을 정리하던 지원의 머리는, 진짜 한번 가봐? 하는 생각이 스친다. 오랜만에 바다 구경좀 하고싶다는 생각이 든다. 바다에 가본 지 오래 됐다는 생각이 든다. 헤어진 그와 바닷가 펜션에서 묵었던 그 이틀이 지금은 아득하기만 하다. 데스크에서도 취재차 간다고 하면 굳이 말리지 않으리라 그녀는 생각이 든다.
감기몸살이 심해 지원이 회사를 결근한날 때맞춰 혁기로부터 전화가 걸려온다. 문화재 관련정보를 주겠단다. 웬만한 정보는 다 인터넷에 있는데 새삼...그녀는 혁기의 속내가 궁금하다. 그렇게해서 그녀는 아직 오한이 가시지 않은채 약속장소로 혁기를 만나러 간다. 혁기는 준비해온 두툼한 서류봉투를 내민다. 인터넷엔 없는 자료들이라며...
“고마워요”지원이 봉투를 받아들며 말하자 “어디 아파요?” 그가 묻는다. 별거 아니라고 지원이 말하자, 눈이 퀭하네,라며 그가 안됐다는 표정을 짓는다. 아프지 말아요,라며 그가 커피를 마신다. 그와도 이렇게 시작됐다. 난데없는 폐렴으로 일주일 휴가를 내고 누워있던날 그에게서 이렇게 연락이 와서 만났고 그도 똑같은 말을 했다. 아프지 말라고. 그렇게 시작됐던 연애...
헤어진 지 고작 두어시간이 흘렀을뿐인데 혁기는 그녀에게 이메일을 또 보내온다. 자신이 최근에 읽은 커트 보니것의 단편에 나오는 구절이라고. 사랑에 오랜 동안 노출되지 않은 사람은,이라고 시작하는 그 문장을 반복해서 읽다가 지원은 자기도 답메일을 보내기로 한다. 자기가 좋아하는 시를 적어보낸다. 비가 오는 골목에서 그녀가 내게 물었다...지금이 어느땐데 이런식의 연애를, 하는 생각에 웃음이 새나오면서도 뭐 그리 나쁘지 않다는 생각을 그녀는 한다.
혁기의 신간은 매대 앞쪽에 보란 듯이 진열돼있다. 서가에 기댄채 절반을 읽고나니 어느새 점심시간이 끝나간다. 지원은 그 책을 사기로 마음먹고 계산대로 향한다. 그러고 있는데 누군가 자기 어깨를 툭 친다. 그녀가 돌아보자, 여기서 또 보네, 하며 혁기가 웃고 있다. 재밌어요? 그가 조금은 쑥스럽게 물어온다. 이거 쓰고 쪽팔려서....라고 덧붙인다. 왜요, 재밌는데,라고 하자, 연애소설은 처음이거든요. 라고 한다. 그러면서 서평좀 써줘요,라고 그가 부탁한다. 그렇게 둘은 자판기 커피를 나눠마시고 헤어진다. 이렇게 우연히 만날 확률이 있기는 한걸까...
자신의 블러그가 한참 방치됐다는걸 지원은 확인한다. 처음 시작할땐 매일 한꼭지씩 올리기로 마음 먹었지만 회사일에 치여 살다보니 그게 말처럼 쉽지가 않았다. 이참에 블러그도 새로 꾸미고 글도 좀 올리자 싶어 그녀는 아이템을 찾다, 다 읽은 혁기의 신간 서평을 올리기로 마음 먹는다. 역사소설만 써온 작가가 처음으로 낸 연애소설임을 강조하면서, 그렇게 서평을 마치고 업로드를 마치고나자 벌써 새벽이다. 그녀가 기지개를 켜고 노트북을 접는데 문자 알람이 온다. 서평 잘 봤다는 혁기의 문자다. 빠르기도 하다...언제 그걸 다 읽었을까.
R시 문화제 참관 기사를 쓰겠다고 하자 데스크는 그닥 반기지 않는다. 요즘 그런거 안봐,라고 하지만 지원은 고집을 피운다. 그럼 짧게 써,라고 허락이 떨어지고 혁기에게 문자를 보낸다. R시 참관기사를 쓰게 됐다고. 그러자 잠시후 그에게서 문자가 날아온다. 멋진 경험이 될겁니다. 제가 에스코트 할게요,라고
그러나 R시로 출발하는 아침, 중견배우 P의 음독설이 알려져 지원은 병원으로 달려가야했다. 가는동안 혁기에게 사정을 설명 하니, 기대많이 했는데,라며 아쉬워하며 대신 유투브로 생중계한다는 말을 한다. 그럼 나중에 그걸 보고 기사를 쓰면 되겠다 생각한 지원은 혁기에게 잘 다녀오라, 인사하고 병원으로 차를 몬다. 다행히 P는 빨리 발견돼 목숨은 구했지만 걸려있는 광고위약금 수억을 물어내야 한다는 기사를 끝낼 즈음 사진몇장이 날아온다. 금방 비가 쏟아질것같은 어두운 하늘, 그래서 더욱 스산해보이는 바다...터너의 풍경화를 연상케하는 그림이라고 그녀는 생각한다. 혁기는 이렇게라도 피서를 즐기라고 말한다. 지원은 지금이라도 R시로 달려가고 싶다. 그가 있는 그곳으로.
혁기는 행사 내내 사진을 보내온다.씻김굿, 도예전시, 사진전, 그리고 R시관련 도서전, 그러고는 덧붙인다. 당신이 같이 왔어야 한다고. 순간 지원은 문득 불길해진다. 그와 헤어지기 직전같다는 생각을 한다. 그토록 둘의 앞날이 낙관적일때가 없었다. 그러다 한순간 깨져버린 그 연애...
그탓인지 지원은 혁기와는 이정도의 관계만 유지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또 겪고 싶지않은 실연.
그러고 있는데 혁기가 지원의 주소를 달라고 한다. 왜요? 하고 묻자, 지역특산물을 보내겠다고 한다. 안 지 얼마나 됐다고 주소를? 하는 생각에 정 그러심 만나서,라고 하자 소포로 부치는 맛이 또 있거든요, 라고한다. 우리가 벌써 이런 사인가,싶으면서도 지원은 자신의 주소를 알려준다.
그리고는 이틀후 그녀는 R시의 특산물을 잔뜩 받는다. 한 반년어치는 된다 생각하니 괜히 웃음이 나온다. 자기도 무언가를 보내야겠다는 생각에 혁기에게 전화를 걸어 주소를 묻는다. 그러자,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자기 주소를 알려준다. 보아하니 그의 작업실이 있는 그 근처인 듯하다. 받고싶은게 뭐 있냐고 묻자, 내가 요즘 피부가 안좋아서요,라고 대답한다. 그럼 화장품을 ? 하고 묻자, 피부에 좋은거 아무거나,라며 대답한다. 그래서 결국 그녀는 온라인으로 브로콜리, 아보카도, 올리브오일을 주문해 그가 알려준 주소로 보낸다.
지금쯤 받았다는 답이 오겠지,하고 기다리는데 그에게선 아무런 답이 없다. R시에서 아직 안 올라온걸까? 하고 그녀가 문자를 보내자, 올라왔다고 답문이 온다. 왜 받았다는 얘기는 하지 않는걸까, 하다 저기, 제가 보낸건, 하자, 그제야 생각난듯, 아 그거요, 왔어요, 한다. 대신 고맙다는 말은 생략된채. 둘 사이가 이렇게 어색한 적이 없었다고 생각한 그녀는 맛있게 드세요,하고 전화를 끊는다. 뭐지 이기분은?
그러고 있는데 데스크에서 R시 기사를 빨리 올리라고 한다. 그동안 혁기가 보내준 자료를 보다 유부트로 생중계 된다던 그의 말이 떠올라 지원은 검색을 해본다. 그의 말대로 문화제행사가 한시간 분량으로 녹화돼있다. 이걸 보면 되겠구나, 싶어 대강의 초고를 마친뒤 그녀는 화면을 재생시킨다. 그렇게 초반 10여분의 개막 공연이 진행되던 도중 그녀는 혁기를 본듯하다. 화면을 다시 뒤로 돌려 그 부분을 느리게 재생한다. 혁기는 뒤쪽 문화제 추친위원 자리에 앉아있다. 저깄다,하고는 클로즈업하는데 혁기가 그 옆의 어느 여자와 나란히 앉아서 그녀의 귀에 대고 속삭이는게 보인다. 그러자 그녀가 까르륵 웃음을 터뜨린다.
순간 지원은 그와 문자를 할 때 느꼈던 이상한 점들이 하나하나 떠오르기 시작한다. 앞뒤가 안맞는 내용을 보낸다거나 급한 듯 한 두자 적어 보내거나 자기가 한말도 기억하지 못한다거나. 그렇다면 자기가 받은 R시의 사진도 동시에 여러명에게 갔을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 "당신이 같이 왔어야 한다"는 그 말까지. 화면속의 그는 이젠 여자에게 손차양을 만들어주고 있다.
“정기자가 웬일로?”하며 혁기가 현관을 열며 적잖이 놀란다. “이거 , 저는 필요없네요”라며 지원이 그로부터 받은 특산물 꾸러미를 내밀자, “아, 미리 물어보고 보내는건데”라며 그가 받아든다. 그순간, “누구 왔어?”라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돌아서던 지원이 힐끔 돌아보자, 낯선 여자가, 유투브 속 그여자가 아닌 또 다른 여자가 그의 뒤에서 빼꼼 고개를 내밀고 있다. 누구? 하며 혁기에게 그녀가 입모양으로 묻는다.
그런거였어? 지원은 픽 웃음이 나온다. 그가 역사소설에서 죽어라 써대던 민중의 순결함, 아나키즘의 색다른 해석같은것들이 그녀의 뇌리를 스친다. 그를 읽으면서 파졸리니를 떠올리기까지 했던 자신이 한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저 여자는 과연 유투브를 봤을까, 싶다. 말이라도 해주고 싶지만 지원은 애써 참고 긴 복도를 천천히 걸어나온다. 뒤에서 혁기가 자기를 부르는 소리를 외면한채.
R시 기사를 안 쓰겠다고 하자 데스크는 잘생각했어,라며 되레 좋아하는 눈치다. 혁기의 인터뷰기사에 짧게 언급만 하라고 한다. 아예 혁기의 기사까지 안쓰겠다고 하자, 왜그래? 하며 데스크는 짜증을 낸다. 재미없어서요,라며 다른 기사로 대체하겠노라 한다. 이달의 인물,코너는 계속 해오던 꼭지라 펑크내면 안된다고 데스크가 걱정을 한다. 지원은 신인아이돌 E와 인터뷰 약속을 잡는다.
그때 혁기의 전화가 걸려온다. 책이 언제쯤 나오냐며 그가 한껏 기대감에 부푼 목소리로 묻는다. 지원은 곰곰이 생각하다 책은 곧 나올거라며 나오는대로 책 들고 찾아뵙겠다고 전한다. 그러자 혁기가 책 받는대로 자기가 점심을 사겠다고 한다. 대학로 근사한 프렌치 레스토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