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연애 이야기
신나는 음악 소리가 심장을 울리고 웨이터 이병헌의 손에 이끌려 안내받은 룸에 여기저기 남녀가 짝지어 앉아 서로의 매력을 발산하고 있는 강남의 M 나이트 현장
한 남자가 군인처럼 바른 자세로 앉아 앞만 주시하며 맥주를 홀짝홀짝 들이켠다. 남자 옆에 앉은 여자는 말이 없는 그 남자에게 궁금증이 생긴다.
오늘 물광 피부 표현이 덜 됐나? 나한테 관심이 없나?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자세를 남자 쪽으로 고쳐 앉아
여자는 질문하기 시작한다.
어떤 유형의 질문에도 단답형으로 짧게 대답하는 모습도 대단한 능력으로 여겨질 만큼 지금 이 여자는 남자가 흥미롭다. 다리를 꼬고 허리를 숙여 남자에게 더 밀착해 앉은 여자는 점점 더 느낌표가 생기기 시작했다. 뭐지 이 남자!
이제 자리를 떠야 하는 여자는 이 남자가 아직 전화번호를 묻지 않았다는 사실에 마음이 조급해졌다.
그동안 나이트에서 그 여자와 하룻밤을 같이 하기 위해 세상에 존재하는 온갖 칭찬의 말로 유혹하던 여느 남자들과는 결이 달라 이 남자의 머릿속을 파헤쳐야 겠다는 탐구심과 오기가 발동했다.
떠나기 전 여자는 그 남자에게 한마디 던졌다.
“ 제 전화번호 궁금하지 않으세요?”
나이트에서 처음 남자에게 적극성을 보였던 그녀는 부끄러운 마음에 잽싸게 던지듯 전화번호를 주고는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그런 계기로 7년을 연애한 여자와 남자는 어느 날 모텔 침대에 누워 뜨겁게 몸을 섞고 난 후 왜 서로에게 빠지게 되었는지 생각했다.
남자는 자신이 7년 동안 여자와 해왔던 추억을 상기시키며 여러모로 진짜 남자가 된 것에 대해 흡족한 웃음을 지었다. 이 여자를 만나기 전 남자는 여자와 극장에 영화 보러 간 것 외에 딱히 기억나는 추억이 없었고 심지어 그 여자와도 사귄 것인지 아닌지 모를 정도의 애매한 썸 타기에서 끝났었다.
여자는 연애를 많이 해본 고수였다. 나름 밀당의 귀재라고 자부심이 컸던 여자는 티 안 나게 남자를 유혹하는 법을 일찍이 터득했고 친한 나이트 동기들과 서로의 노하우와 기술을 공유하며 연애의 기술을 고도화시켰다. 그렇게 만든 그녀들의 어록과 특별한 암호는 길이길이 보전할 가보로 남기고 싶을 정도라나
남자는 여자보다 6년 늦게 세상 밖으로 나왔으며 이유식 시작을 기준으로 따지면 5,475그릇의 밥을 자신보다 더 먹은 그녀가 밥그릇의 개수만큼이나 아는 것이 많아 매력적이지 않은 구석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완벽했다. 남자보다 누적된 식사 횟수가 많다는 게 조금 걸리긴 했지만…
미대를 졸업한 여자는 흰 도화지 같은 남자를 보며 전투력이 상승했고 연필을 잡고 남자와 함께 추억을 그려나갔다. 세상의 모든 재미있는 것들을 남자와 같이 그리며 인생 가이드를 자처했다. 여자는 남자에게 옷을 골라주고 남자는 점점 세련되어졌다. 여자는 남자에게 흑인 음악을 들려주었고 발라드만 듣던 남자는 점점 여자의 힙한 세계로 들어왔다. 여자에게는 차가 있었고 남자를 태우고 주말마다 강변을 따라 드라이브를 하며 서울 외곽 데이트를 즐겼다.
남자는 조수석에 앉아 운전하는 여자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바람에 날리는 머리카락이 그녀의 볼을 때릴 때마다 차를 멈추고 두 손으로 그녀의 볼을 잡고 키스를 퍼붓고 싶었다. 스키니 청바지를 입은 여자가 액셀러레이터와 브레이크를 번갈아 밟을 때 허벅지 근육의 움직임이 무척이나 섹시하다고 느껴졌지만 이미 본인이 섹시한 걸 아는 이 여자에게 굳이 얘기해주고 싶진 않았다. 남자는 여자에게 빠지는 것이 두렵기도 했다. 그러나 너무 늦었다. 남자는 이 여자를 사랑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여자는 연애 고수였고 남자는 연애 하수였다.
여자는 연애 고수답게 아주 당연하게도 그 남자만 바라보지 않았다. 소위 잘 나가는 직업과 집안이 빵빵한 남자들을 몰래 만났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해바라기 같은 순박하고 순수한 그의 얼굴이 늘 떠올랐다. 그는 늘 그녀를 향해 웃고 있었고 여자는 그의 웃음을 볼 때마다 슬퍼졌다. 어느샌가 발걸음이 그에게 향해 있었다. 여자가 독한 마음을 먹고 헤어질 결심을 했을 때, 남자가 기르던 강아지의 죽음으로 인해 슬픔을 애도하며 다시 만나게 되거나 여자의 엄마를 통해 둘은 다시 연결되었다.
남자는 여자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다른 남자를 만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여자에 대한 사랑이 질투나 분노보다 컸기 때문에 용서가 되었다. 어느 날 여자가 헤어지자고 했을 때, 밤새 여자의 집 옥상에서 날을 새며 다음날 외출하는 여자를 멀리서 아련하게 지켜보기도 했다. 남자는 여자가 떠나려고 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성공해야겠다는 의지를 다잡을 수 있었다. 남자는 여자 앞에서 떳떳하고 당당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렇게 자신을 버리려는 여자 덕분에 삶의 목표가 생기고 그게 원동력이 되어 남자를 어느 순간 급성장시키고 있었다.
여자는 ‘언제라도 어디서라도 당신만을 바라본다’라는 해바라기의 꽃말처럼 어떤 시련이 몰아쳐도 자신만을 바라보는 그 남자에게 마음이 조금씩 열리기 시작했다. 결국, 자신도 그 남자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때 깨달았다. 나는 연애의 고수가 아니라 연애 하수라는 사실을… 나를 만나는 남자들은 언젠가는 떠날 것이라는 굳은 믿음이 있었고 그 불안은 만나는 남자를 깊게 알기도 전에 정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었다. 내가 어떤 사람이어도 언제나 나를 사랑해 줄 수 있는 남자는 세상에 없다고 확신했던 나는 7년이라는 세월 동안 원색의 노란빛으로 감싸 안아준 그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이제는 그 남자 없이는 내가 살 수 없을 것 같았다.
나는 하수였고 그는 고수였다.
그에게도 내가 보였지만 나에게도 그가 보였다. 우리는 비슷한 사람이었다. 그의 겹핍과 나의 결핍이 맞닿아있어 우리는 서로를 깊이 있게 알게 되었다. 그리고 언제나 나를 웃게 만드는 그의 매력은 웃기는 것이다. 그가 진짜 배꼽 빠지게 웃기다는 것은 나만 안다. 아무도 모르는 그의 매력을 내가 알 듯, 그도 나의 모든 매력을 다 알고 있다.
남편이 된 그 남자는 지금 소파에 앉아 나 따위는 이제 관심 없다는 듯 핸드폰을 보고 있다. 나는 안방 침대에 기대어 앉아 있다. 한때 섹시하던 허벅지를 긁적이며 리모컨을 들어 텔레비전을 켠다. 리얼리티 연애프로그램에 채널을 고정하고 히죽 웃으며 어리숙하고 순수한 남자 광수님을 응원하고 있다. 해바라기 같은 순수한 남자의 사랑을 바라보며 미소를 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