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은 오랜 시간 교류가 없었던 친구들을 만나 여러 대화들을 나누던 시간이었다. 같이 한 집에서 지내고 자주 보기도 했었기에 1년 이상이 지나 오랜만에 보아도 가족처럼 어색함이 크지 않았다.
"잘 지냈어?"
"요즘은 뭐 하고 지내?"
계획적인 친구들은 이미 결혼도 했고 직장 생활도 하고 있다. 그 와중에 새로운 배움, 시작을 하기도 했다. 이전보다 더 좋아 보인다는 말 한마디와 함께 지금이 너무 좋다 하고, 다른 누구는 결혼이라는 것으로도 좋아하는 것 같았다.
그들이 왜 좋아 보이나?
자신이 좋아하는 가치를 선택함으로써 스스로가 좋은 생각을 많이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안에 여전히 갈등과 어려움이 마주친다지만 그럼에도 스스로가 채워지고, 행하고, 배우고, 나누며 보내는 시간을 통해 계속 나아간다고 하였다.
이들의 직종은 사람을 돌보는 일이다. 자신이 먼저 채워지고, 나누면서 그 사람 안에 이 일을계속할수있도록 동기를 스스로가 만들어가는 것이었다.
기다리는 가족들과 다음날 출근을 위해 자신을 아끼고, 관리하는 것이었다.
예수님이 인간으로 오셨을 때가 생각이 난다.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분이셨다. 목수이시고, 미친 사람, 거짓말쟁이라는 소리도 들으셨고, 낮은 자들과 함께 하시고, 병든 자들도 고치시고, 비유의 이야기를 하시며 들을 수 있는 귀 있는 자들은 들으라고 이야기하셨다. 그리고 자신의 이익을 챙기신 모습은 그저 기도하는 모습 이외에는 나눠주시고, 공감하셨던 것만 같으시다.
성경 1독만했던지라 정독과 공부가 아닌읽기였기에 심도 있게 알 지는 못한다. 예수님은 신 그리고 동시에 사람이셨기에 기도 이외에는 어떤 걸 나누시고, 챙기셨는지 성경을 읽을 때마다 찾아야겠다.
교회 목회자, 사역자분들이 재정을 모으기 위한 사회 활동은 과거에는 거의없으셨다. 그러나 지금은 경제 활동으로도 재정을 버시는 일들도 하고 계신다. 유튜브 발달로 유튜브를 이용해 수익 창출의 컨텐츠도 만드시는 분들도 계시다. 자신의 창조물이 재정을 모으는 활동이 될 수 있는 시대이다.
나는 목사님, 사역자들이 재정을 버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것은 아니다. 시대가 점점 바뀌니 이 속에서 변하지 않아야 할 점이 무엇인지 찾고, 그것을 지켜나가야 하지 않을까 싶다. 당연히 변해야 할 개혁이 필요한 곳도 기독교이기에 새롭게 바꿔가야 하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짧은 지식과 지혜를 갖고 있기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원리는 변하지 않는 것일 텐데 이것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고민과 개혁이 기독교인이라면 생각을 하는 것이꼭 필요하다.
교회는 좋은 사람들이 많다며 세상 사람들이 기대를 한다. 그러나 이곳도 사람 사는 곳이므로 병원만큼 영적으로 아픈 사람들이 많이 있다. 서로 좋은 이야기 할 시간도 부족한데 서로의 열등감을 느끼면서행동하는 것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더 배우면 좋으련만 자신의 정당성만 추구하기에 바쁘기도 한다.
그런 가운데에도 자신이 가진 것, 배운 것을 더 늘리고 나누려고 하고, 개혁하려고 하는 자들은 꼭 필요하다.
나를 포함한 기독교인들의 모습도 예수님처럼 약한 자들을 이끄셨던 것처럼 미련해 보일 수도 있다. 안 믿는 자들이나 믿는 자들에게 상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되돌아보게 된다. 사회에서 실패한 사람들이 목회와 신대원을 많이 가기도 한다 라는 이 이야기는 당사자들에겐 아픈 말일것이다. 그래서 사업을 하시는 분들도 계실 테지만 재정을 추구하기 위한 목적이 나눔에 있다는 것, 말씀을 전하는 사역을 넓히는 이 불변이 포함된 것이다. 헌금을 교회 예산으로 사용되는 것도 이와 같은 것일 테지만 사업을 하느냐 마느냐의 이야기는 나도 잘 모르겠는 부분이다.
어찌 됐든 하나님을 믿는 교회 성도들은 자기의 재산의 창고를 어떻게 세상에 흘려보낼지에 선한 목표를 갖는 것에 더 마음을 두어야 하지 않을까.
마음이 있는 곳에 보물이 있다고 하셨던 말씀처럼 내 마음의 시선이 '사라져 없어질 것'에 초점보단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 그러려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을 해야 하는 것인데 그것은 내가 생각하기엔 많이 경험해 보진 못 한 것 같지만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과 나라를 이뤄가야하는 것임을 믿는다.
결론은 누군가가 그렇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모습이 나에게도 귀감이 된다. 그들과의 대화 시간이 나의 모습 속에서도 그것을 다시 구하고, 찾아가며 세상을 살아가야 함을 다시 느끼는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