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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환 Jun 20. 2023

내게 구름은 네가 자장면 만들면서 내는 그리운 회상.

- 공백의 10대, 너를 보내고, 추억 -

사랑은 추억을 남기고 우정은 그리움을 남긴다.


 2020년 8월, 동네 꽃집에서 난초와 백일초, 그리고 안개꽃을 포장한 가방에 적힌 문구였다. 그래. 그날은 그때로부터 딱 1년 하고 2개월 전이었다.


 2019년 2월, 한 달 동안 철원에서 신병 교육을 마무리한 나는 포천과 철원의 경계에 있는 자대에 배치받는다. 입대 전에 적어놨던 소중한 사람들의 번호. 하나하나 수신용 휴대전화로 눌러서 연락해 본다. 부모님과의 통화를 마치고 친구들의 연락을 기다려본다. 걔들 중엔 장난만 치고 연락은 안 하는 괘씸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다들 한 번에 오랫동안 기다린 친구의 연락을 받아줬다. 유독 띄는 한 사람. 나는 그의 번호로 문자를 날려본다. 이내 통화가 걸려왔다.


 11년 3월. 황지중학교 1학년 2반. 꽃샘추위대신 안면에 휘몰아치는 눈꽃이 3월의 시작을 알렸다. 동네가 좁으니 다들 아는 얼굴들. 정시보다 5분 정도 지나서였을까. 등산객 한 명이 어깨에 눈을 수북이 쌓은 채 뒷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그는 원래 나와 같은 고향 사람이 아니었다. 서울에서 살다가 가정사로 인해 태백에 정착한 거였다. 피부는 눈처럼 하얗고 덩치는 여간 큰 게 아니었으니 흡사 북극곰과 같은 인상. 하지만 목소리는 얇으니 상당한 괴리감이 든 첫인상. 그것이 그와 나의 첫 만남이었다.


 그 나이는 다들 사소한 걸로 싸운다. 그 친구와 쌈박질을 했다. 학교에서 한 덩치 하는 사람끼리 맞붙으니 세간의 관심사일 수밖에. 그러나 그런 걸로 서먹해지지 않았다. 뒤탈 없이 둘도 없는 막역한 사이였기에 훌훌 털고 음악 얘기를 하며 집에 간다. 그가 좋아하던 metalica. 내가 좋아하던 my chemical romance. 둘이 지향하는 음악도, 집도, 학교도, 취향도, 같은 방향이었다. 내 10대가 썩 밝진 않았지만 그래도 손바닥으로 두 눈을 가려도 손가락 사이로 들어오는 빛 같은 존재. 그게 그였다. 그런 빛으로 하나 하나 점을 찍어보니 10대의 기억은 마치 까만 우주에 조용히 빛내는 별들과 같은 형상을 보였다.


 그와의 이별이 찾아온 건 14년 2월, 요리, 그중에서도 중식을 만드는 걸 좋아했던 그는 꿈을 위해 한국조리과학고등학교로 진학을 결정짓는다. 잠시의 이별일 뿐 슬퍼할 필요는 없다. 그의 삼촌이 운영했던 '백야성'에서 그의 자장면을 먹어본다. 아직은 완성되지 않은 맛이지만 그래도 뭐가 중요한가. 단지 '우정'을 표현하는 것이니 웃으며 삼켜낸다. 밤새 놀고자 했지만 통금이 엄격했던 그가 먼저 집으로 가버리는 바람에 우리는 그를 이내 보내줬다.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나서도 매 여름마다 놀러 왔다. 우리 집에서 자는 대신 록페스티벌에 가서 내가 좋아하는 밴드의 영상을 컴퓨터에 담아주는 걸로 거래를 했다. 그렇게 성인이 되고 우리는 군인이 됐다.


 오랜만에 들어보는 그의 전화. 그는 지금 군 병원이라고 했다. 배가 아파서 입원했다는 얘기를 이어나가는 그의 모습에 나는 별 신경 쓰지 않았다. 그 해 혹한기 때 노로바이러스니 위염이니 하면서 전염병이 퍼져 우리도 한 바탕 난리가 난 상황이었다. 그래서 그도 그런 병에 걸려서 병원에 있겠거니 싶었다. 일개 이등병이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겠는가. 탈영이라도 하면 관심병사로 낙인찍힐 게 뻔했다. 위로나 실컷 하고 다음 만남을 기약하며 끊었다. 어차피 이런 고통도 찰나일 뿐이다. 나는 내 영내 생활만 신경 쓰면 된다. 저 녀석은 강하니 잘 이겨낼 거다. 일종의 믿음이었다. 그렇게 5개월이 지나 6월 30일. 그날은 날이 밝았고 돼지 축사 악취가 코를 찌르는 사단 훈련장 위병소였다.


페이스북 들어가 봤어? 걔 소식 올라와서 연락해 봤다. 확인 안 했으면 지금 확인해 봐라.

  사단 훈련장 위병소 근무를 서며 휴대전화를 만지던 중 학생회장을 지냈던 고등학교 동창의 연락이었다. 이윽고 걸려오는 지난날 동창들의 전화와 문자. 다들 울면서 연락이 온다. 떨려오는 호흡과 손, 머리가 백지처럼 되는 기분을 참아가며 페이스북을 들어갔고 나는 이내 멍해진 채 휴대전화를 떨어뜨렸다. 그가 죽었다. 불과 5개월 전만 해도 다음 약속을 기약하며 웃던 그가 그렇게 떠났다. 허공을 유유히 떠다니는 구름은 내가 뭔 기분인지 알긴 할까. 하늘을 쳐다보던 내 얼굴 위에 나비 한 마리가 스쳐가다가 이내 거미줄에 걸려 잡아먹힌다. 다음 근무자에게 인수인계를 마치고 다시 막사로 돌아와 삼겹살 파티를 준비하는 전우들의 모습이 지금의 나와 상반된 상태를 보이고 있다.


 화장실 문을 걸어 잠그고 숨죽여 울었다. 그에게 갑작스럽게 찾아온 의문의 죽음은 나를 혼란스럽게 했고, 신이 있다면 진짜 잔인하고 인정머리 없는 작자라고 생각했다. 아직 술 한잔 안 걸쳐봤는데 도대체 뭐가 급해가지고 그를 데려갔냐고. 너무 울다가 화장실에서 삼겹살도 게워내고 해가 지고 어둠이 내린 막사를 계속 돌며 엄마 잃은 애처럼 방황한다. 우주와도 같다고 생각한 내 유년기는 이젠 빛나는 별조차 없는 심연이 됐다. 그런 슬픔을 간직한 채 전역날이 찾아왔고 그의 어머니께 연락을 드렸다. 나를 기억하고 계시는 어머니. 길안내해 줄 삼촌께 연락해 놓을 테니 잘 만나고 오라고 했다.


 신이라는 작자가 참 밉다. 그들끼리 재밌는 파티를 하겠답시고 2018년에는 가장 존경하는 디제이였던 아비치를 하늘로 데려가질 않나. 이번엔 아직 젊은 나이인데 중국 음식이 먹고 싶은지 자기들 배고프다고 내 친구를 데려가버렸다. 신화에 등장하는 그들의 영웅담은 멋지지만 그들 개개인의 생활을 싫어하는 건 아마 이때 즈음인 걸로 기억한다. 아리아드네를 데려오기 위해 기꺼이 지옥에 발을 내딛는 오르페우스의 여정은 그의 실수로 끝났지만 그는 도전이라도 하지 않았는가. 내게도 그런 기회를 주면 잘 살릴 수 있는데. 왜 나에겐 시도조차 못하게 하는 걸까.


 영월군 남면 북쌍리 문개실길. 장릉에서 왼쪽으로 쭉 가다 보면 드넓은 강 위로 놓인 다리를 통해 외딴 지역과 내륙이 연결된 고독한 장소. 나름대로 예의 좀 차려보겠다고 정장에 구두를 신고 왔더니만 삼촌께서는 들어가는 길이 짐승길도 안 나있어서 다른 신발을 빌려줄 테니 갈아 신고 따라오라고 하셨다. 오면서 풀에 베이고 들어오니 다른 무덤과는 다르게 우뚝 튀어나오지도 않았다. 그 옆에 누워있는 비석만이 그의 자리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오면서 사 온 술과 오징어, 그리고 사과. 이곳은 가족묘라고 얘기를 해주신다. 예의가 아닌 걸 알지만 나는 내 답답함을 풀고 싶은 일종의 이기심에 삼촌께 여쭤봤다. 그는 내게 배가 아파서 입원했다고 했고 조만간 나을 거라고 얘기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세상을 등지고 갔는데 혹시 실례가 안 되면 무엇 때문인지 여쭤봤다. 암이었다. 간부터 시작해서 통증이 느껴질 즈음에는 위, 췌장, 폐 등 걷잡을 수 없이 퍼진 상태였다고 한다.


 장지에 오면 울지 않기로 다짐했다. 그래도 이젠 진짜 몇 없던 고향 친구를 만나는 자리에서 눈물로 인사하기엔 그간의 좋았던 기억들이 슬픈 추억으로 변질될까 봐. 2월의 연락을 마지막으로 그렇게 떠나기 전까지 한 번을 연락 안 한 내 모습이 혐오스러워서 울지 않기로 했다. 그러나 그런 다짐은 이제 '괜찮아졌다.'라고 생각해서 눈물 안 나올 거라 생각했던 나만의 확신이었을 뿐. 무뎌진 내 감정과 나름 단단했다고 생각한 다짐은 그간의 진실을 듣고 풀벌레 우는 산에서 목이 찢어져라 울어댔고 다리에 힘이 풀려서 쓰러진다. 나의 자기혐오와 그것에서 비롯된 전날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죄의식은 장지를 마주 보고 있을 때, 꽁꽁 숨기고 있던 내 모습과 나를 직면케 했다.

군대도 전역 못해서 전역모를 씌워줬다.

 삼촌과 간단한 식사를 하고 태백행 열차를 탄다. 진정되지 않는 속은 암이 퍼진 그의 내장보다 새까맣게 타들어간 채 밑도 끝도 없는 수렁에 나를 집어넣었고 태백에 도착하고 난 이후엔 내가 다녔던 중학교를 찾았다. 그와 배드민턴을 하던 체육관, 그와 나의 귀갓길을 거슬러 내려가며 그리움에 젖는다. 산이 많은 태백은 어딜 가나 풀벌레가 운다. 그렇게 울음소리를 들으며 얼굴에 그리움과 슬픔이 드리운 채 집에 온 나는 나름 걱정되는 의미에서 그만 좀 울라는 아버지와 진탕 싸우고 다시 집을 나갔다. 혼자 걷다가 예전 백야성이 있던 자리엔 삼겹살집이 들어왔다. 그와의 추억을 새겼던 동네의 장소들이 정리되는 것이 서러웠는지 또 눈물이 난다. 아버지와의 대화를 통해 오해를 풀고 그렇게 1년이 또 지나고 21년 8월. 막노동을 끝내고 받은 돈으로 꽃집을 들어간다.


 작년보다 죄의식은 덜했다. 매년 6월 30일이 그의 기일이었지만 장지를 들르는 건 8월 말에나 간다. 부모님은 장릉 보리밥집 단골이다. 점심 먹을 겸 그의 장지도 같이 가자고 하셔서 영월에 재방문하기로 했다. 여전히 좁은 북쌍리로 들어가는 다리. 구석진 곳에 있는 외딴 비닐하우스. 비닐하우스 뒤로 나있는 여러 개의 무덤. 모든 게 그대로였다. 다만, 처음 갔을 때 느낀 감정도 그대로였다는 게 옥에 티였지만 말이다. 그의 죽음 이후로 넓고 얄팍한 인맥 만들기에 몰두했던 내 태도는 큰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좁지만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우정. 이젠 그게 목적이었다. 고향친구들에게 굳이 먼저 연락하진 않는다. 걔들이야 필요할 때만 찾는 녀석들이니 속 터놓고 편하게 있을 종자들은 못된다. 걔들은 그에게 한 번이라도 와봤을까. 어머니께서는 태백 사람들 중에서는 내가 계속 오는 친구라고 말씀해 주셨다.


 어머니는 유독 나를 신경을 많이 쓰시는 듯했다. 살아생전 그의 모습과 음악 취향, 인상 등 많은 요소가 겹쳐 보이는 게 한 몫하는 듯했다. 아직 실제로 보진 못했지만 단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새로운 유대감의 형성. 이번에도 그를 찾았다. 매년 오징어와 소주와 사과를 들고 왔지만 내 물건 하나를 더 챙겨 왔다. 전역모. 군생활의 종지부를 증명해 주는 일종의 증거품이었다. 나는 그보다 늦게 입대했지만 그보다 빨리 나왔다. 전역도 못한 채 그렇게 나온 그에게 전역한 기분 좀 내보라는 의미였다. 비석 위에 놓은 전역모. 소주 한잔을 채우고 근처에 뿌려본다. 하늘에는 구름이 떠다니고 매미와 풀벌레가 그 해 여름 추모곡을 연주하고 있다. 조용히 지난날을 회상하고 다음 만남은 취업을 하면 찾아오겠노라고 약속하고 자리를 떠난다. 어머니께 연락을 드리니 그를 생각해 줘서 늘 고맙다고 하셨다. 어찌 보면 아들 같다고 얘기하시는 어머니의 문자에 괜스레 눈물이 흘렀다.


먼 산 언저리마다 너를 남기고 돌아서는 내게 시간은 그만 놓아주라는데

 

너를 보내고 커버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영월과 태백을 연결하는 함백산을 통해 돌아왔다. 국내에서 도로로 갈 수 있는 가장 높은 산이자 태백에서 가장 높은 산. 헤드폰을 쓰고 노래를 듣던 내 귀에는 윤도현 밴드의 노래가 나온다. 너를 보내고. 록 음악을 좋아했던 그는 해외 밴드는 metalica를 좋아했다면 국내 밴드 중에서는 윤도현을 좋아했었다. 그의 시원시원한 발성과 서정적인 음악은 한국 록만이 가질 수 있는 색채라면서 좋아했던 기억이 난다. 날씨도 슬슬 중천에 떠있던 해가 뉘엿뉘엿 그 고개를 까딱거리면서 졸음을 쏟아내는 시간이 됐다. 바람이 솔솔 불어오고 그의 인상처럼 푸근한 석양이 안면을 쬐는 시간.


 이 나이 먹고 노래를 다시 듣다 보니 알 수 있는 건 헤어진 애인을 놓아주는 것이 아닌, 세상을 떠난 친구에게 보내는 마지막 노래였음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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