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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환 Apr 20. 2023

우울할 때 더 우울하면 해소된다.

- 21살의 나, avicii - the nights, 그리고 구원 -

 바다를 떠다니는 여러 잔해. 인터넷은 그런 잔해들이 모이는 바다다. 수많은 잔해들 중 하나의 잔해를 건져보노라면 누군가가 적어놓은 짤막한 글이 있고 그곳엔 시기별로 겪는 병이 적혀있다. 중2병, 고2병, 대2병 등...그냥 그런 것들은 우스갯소리 정도로 넘겨 들으며 살았다.


  21살. 그해 4월의 봄은 유독 꽃샘추위가 심했다. 20살의 시행착오과정은 끝났지만 1년이 지나도 꽃은 필 생각을 하지않았고, 문득 닥쳐오는 앞날의 공포로 인해 일단 살고보자는 식으로 겉으로는 꽃봉오리를 만들어냈지만 그 안으로는 깊이를 모를 차디찬 심해를 만들어 겨울의 분위기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렇게 형성된 내 마음의 블루스는 끝없는 우울감을 형성했고 바깥으로 나가는 것이 싫었다. 학교도 안나갔고, 사람을 만나는 그런 과정들을 싫어하게 된 내 모습들이 작년의 내 모습과는 확연히 달라진 나를 발견하게 됐다. 고독함을 싫어하면서도 고독에 사로잡혀선 그런 감정들을 잊어보려 내 비어버린 독에 술을 가득 부어보지만 이내 깨져버린 독에 헛된 채움만을 반복하는 '중독'에 빠지게 된다. 그런 중독에 허덕이면서 침대에 누워 한숨만 푹푹 쉬는게 이젠 일상이 됐다. 이젠 원동력이 없다. 우스갯소리 정도로 여겨졌던 '대2병'은 대인 관계에서의 도태됨, 협업의 실패, 여러 경험들에서 찾아오는 정서적 결핍 등 여러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합쳐서 내게 닥치니 감당할 수 없는 쓰나미가 됐다.


 이런 무력함을 탈출하기 위해 좋아하는 것을 해볼까했다. 집에 마련했던 40만원 짜리 디제잉(Djing) 장비. 사용한지 2년이 넘은 15만원 가량의 소니 헤드폰. mp3에 저장된 3000곡 정도되는 음악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어차피 순간의 충동과 속히 '간지' 좀 부려보고 싶은 마음에 샀던 것들이다. 특히, 그해 MT때는 대중 분위기 파악에 실패했던, 아집에 사로잡힌 나를 직면케했던 매개물들이 아닌가. 좋아하는 걸 찾아보고자했던 나의 시도는 지난 날 시행착오의 결과물들을 다시금 마주치게 했다. 기계에 손대는걸 주저했다. 하지만 계속해서 음악을 듣고 찾는 건 포기하지 않았다. 이마저도 놓아버리면 정말이지 내 인생이 절벽 아래로 떨어질거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실낱같은 희망을 쥐고 있음에도 힘이 더 빠진다. 뙤약볕이 들어오는 원룸 창가를 보노라면 누군가의 무덤이 위치하고 있다. 어디를 가더라도 푹푹 꺼진 분위기의 상징물이고 꽃봉오리에 잠깐 나비가 왔지만 다가오는 나비를 잡아먹는 네펜데스같은 식물로 개화했다.


 그런 무의미한 시간을 보내면서 출석을 안해서 성적은 망했어도, 조직 내의 동질감이라는 것을 조금이라도 가져보기위해 강의실을 가든 도서관을 가든 어디가 됐든 가서 사람들 무리 속에서 '시험공부'를 해보기로했다. 침대 위에 홀로 누워 밤새 허덕이며 '왜 살지'라는 생각을 떨쳐버리기위해, 시궁창같은 인생의 종지부를 찍어보는 처음의 시도를 의미있게 해보기 위해, 단지 그 뿐이었다. 군중 속에 섞여 펜이라도 잡아보면 그런 우울감과 잡념을 떨쳐낼수있을거라는 나름의 기대였고 확신이었다. 고민할 틈이 없었다. 곧장 노트북과 책가방을 챙겨서 강의실로 발걸음을 향했고 강의실에 들어온 나를 신기하게 쳐다보는 학과 사람들의 시선을 잠깐 의식한 이후에 가만히 앉아 시험을 대비하기 시작했다. 확실히 공통의 목적을 가지고 대중들과 하나된 행동을 하니 집에서 품고 있던 잡념은 없어져갔다. 하지만 그 기대는 처절한 우울감으로 다시금 찾아왔다.


 그날은 4월 20일. 아비치(Avicii)가 죽었다. 사인은 자살이었다. 살인적인 스케줄을 못이긴 그는 술병을 깨서 자신의 앞날을 자기 손으로 그어버렸다. 이 기사를 접한 건 새벽 3시. 군중 속에서 몰입하던 나는 간만에 하는 공부에 그새 집중력은 바닥을 치게 됐고 휴대폰을 끄적이던 중 커뮤니티나 뉴스에서 계속 떠오르는 주제들이 다 한 사람의 죽음을 가리켰다. 이내 우울을 이겨내보고자했던 나의 작은 시도는 끝까지 잡고 있던 한 가닥의 실마저 앗아가버렸다. 가방을 쌌다. 노트북도 접었다. 아무런 말도 하지않고 강의실을 나가서 자취방으로 향했다. 새벽 4시반. 방에 들어오고 정면에 보이는 건 바깥에 자리를 가만히 지키고 있는 누군가의 무덤이 오늘따라 월광을 받아 뚜렷하게 나를 쳐다보고있다. 그렇게 내가 동경했던 이가 죽었다. 이 음악을 사랑하게 만든 사람 중 하나가 죽었다. 고등학교 1학년부터 일렉음악을 사랑하던 나를 신기하게 생각해서 사줬던 아버지의 블루투스 스피커가 눈에 들어온다. 밤새 그의 음악을 틀어놓을 각오였다. 이윽고 신기한 경험을 체험한다.


 우울감과 낙담에 빠져살던 날에도 눈물 한번 흘리지 않았다. 그런 나날을 보내면서 실낱같은 희망이랍시고 잡아본 게 음악을 계속 듣는것이었고 그의 음악을 계속 들었지만 그 때는 울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새벽은 이전과는 달리 눈물을 계속해서 쏟아내고 있었던 나를 발견하게 됐다. 잠에서 깨어나고도 울었고 해가 질 때까지 눈물은 멈출 생각을 하지않았다. 그러나 평소였으면 이렇게 극단적인 감정에 치우쳐진 나였으면 술을 찾았겠지만 더 이상 찾고 싶지 않게 되었고 머리가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지금와서 돌이켜보면 '해소'였다고 느낀다. 그의 노래 'the nights'의 가사는 지난 날의 내가 우울에 사로잡혀 허덕이던 음지에서 다시 양지로 올려보내준 노래다. 지금도 그의 노래의 가사는 인생의 가치관으로 삼고 있다.


 '아들아. 인생을 그냥 흘려보내지 마라./네가 나이가 들면/젊은 시절을 그리워하며 살거란다./너도 언젠간 이 세상을 떠날 테니/기억에 남을 만한 인생을 살거라/오늘 밤은 영원히 가슴 속에 남을 거라고'. 이는 'the nights'의 가사이다. 기존의 노래들은 사랑에 대해 노래하는게 주류를 이뤘다 그는 인생을 노래하는게 그만의 특별한 상징이었다. 하지만 우리들 사는 인생을 노래하던 그가 그의 인생은 그의 손으로 직접 끊어버리니 개탄스러울 따름이었다. 하지만 동물의 사체나 변이 흙 속의 양분으로 돌아가 식물을 키우고 그걸 다시 동물이 먹으면서 순환을 이루듯 아비치의 죽음은 죽음이 아닌 셈이다. 단순히 청중들이 그의 노래를 들으면 그가 우리 가슴속에서 다시 살아나는 수준을 넘어서 삶의 원동력과 활기를 잃은 나는 그의 허무한 죽음과 숭고했던 음악을 먹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을 얻은 것이다.


 더 이상 기계를 만지는 일이 두렵지 않다. 다른 대학교에는 나와 같은 취미를 공유하는 친구들을 만들어 넓은 인맥을 꾸리고 서울로 종종 공연을 감상하러가는 일도 생겼고 불규칙적이지만 자체적으로 믹싱도 하고 있다. 그리고 이제 단순히 아집으로 뭉친 노래 구성이 아닌 청중을 생각해서 '나'만 신나는 노래가 아닌 '모두'가 신나는 노래를 지향해서 음악활동을 하고 있다. 더 이상 바다를 떠다니는 잔해 하나하나에 휩쓸리는 존재가 아니라 돌아보니 그런 바다를 유유히 헤엄치면서 목적을 찾고 있는 고래가 되어있었다.


  슬픔을 억지로 기쁘게 하려는 시도도 좋지만 스스로 나의 상태를 관조하면서 더 깊은 우울로 끌고가는것이 때로는 훨씬 도움이 된다. 수학 기호에도 있지 않은가. 음수와 양수를 곱하면 음수가 되지만 음수와 음수를 곱하면 양수가 되는 개념처럼. 막상 좋아하려는 걸 시도했던 지난날의 시도는 되려 물거품이 되어 쓸모가 없어졌지만 한껏 울고나니 응어리가 다 풀어지고 삶의 불꽃을 다시 찾게 된 경험을 겪은 나처럼.  구름이 번개와 비를 쏟아부어도 절대 꺼지지 않는 불을 지펴 빛나는 별들에 너의 이름을 새기라는 Avicii의 'the nights'의 가사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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