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증과 반려견은 상극이다.
나의 하루는 남들보다 조금 늦은 해를 보며 너와 함께 시작한다.
애석하게도 나의 에너지는 남들이 100이라면, 30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잠깐 일어나 늦지 않게 너의 밥을 챙겨주고 너를 쓰다듬다가 다시 잠든다.
내가 너를 위해 하루에 꼭 해야 하는 일.
한 시간 이상 산책 가기.
밥과 물그릇 설거지하기.
영양제 챙겨 먹이기.
배변 패드 체크하기.
자기 전 양치시키기.
사실 자잘한 것들을 나열하자면 수도 없이 많다.
내 에너지가 30이라도, 나는 너에게 20을 할애하는 하루가 아깝지 않다.
30, 그 숫자 넘게 모두 주고 쓰러지는 날에는 오히려 기쁠 따름이다.
그러나 이렇게 되기까지 기나긴 서사와 우여곡절이 있었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2019년 1월, 나에게 그해 겨울은 꽤나 혹독한 날들의 연속이었다.
제일 큰 이유는 성인이며 5년 동안 대학과 공부를 핑계로 타지와 타국에 살던 내가 부모님 집에 살게 된 것이다.
대외적으로 좋은 사람이고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분들이다.
금전적으로 충분한 지원을 받았지만, 정신적으로 가난했고 박약했기에 나와 성향이 맞지 않았다.
그래서 난 정신적으로 충만히 사랑 줄 수 있는 너를 데리고 왔지만, 너의 성격과 나의 병은 상극이었다.
너는 나를 정서적, 육체적 보호자로 삼았지만, 나는 그 준비가 안 되었다는 게 문제였다.
너를 온전히 받아들일 준비가 없었다.
누구보다 사랑해주고 산책 잘 시켜줄 자신은 충분했지만,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그때 약물 중독이 시작되었다.
의식하는 모든 행동이 고통스럽기에 내가 선택한 도피처였다.
그런 와중에도 넌 내 옆에 꼭 붙어 나를 지켜주었지만, 나는 사실 너와의 거리가 필요했다.
그래도 나는 그런 너를 지키기 위한다는 이유로 위험한 산책길에 올랐다.
다행히 큰 사고는 발생하지 않았지만, 여차하면 네가 위험해질 뻔했다.
그 당시를 떠올리면, 네게 아직도 가슴 쓰리게 미안하다.
하지만 가슴 무너지게 미안한 건 따로 있다.
너를 위하겠다고 다짐했던 나는 한 달도 채우지 못하고 약물 중독과 과다 복용, 자살 기도로 입원을 해야만 했다.
온전히 널 사랑하기 위해 널 만난 게 아니라 내가 우울증에서 벗어나기 위해 널 데려왔다는 게 확실했다.
어떤 무지한 이가 반려동물이 환자에게 긍정적인 효과를 준다고 했을까.
단기적으로는 긍정적인 효과를 줄 수 있지만, 일주일 이상은 불가능하다.
그중 강아지는 특히 챙겨줘야만 하는 게 너무 많다.
산책보다 더 힘든 건 집으로 돌아와서 씻기고 말리고 빗기는 일이다.
산책은 네가 제일 좋아하는 일과지만, 이후 일들은 싫어한다.
사람도 하루 3분의 1은 유희를 즐기는데, 강아지도 그럴 줄 몰랐다.
너를 가장 예뻐해 줄 수 있다는 오만함과 산책은 잘할 수 있다는 어리석음이 눈을 가리고 있었다.
그보다 더 어리석은 나는 왜 긍정적이란 그 말을 믿었을까.
세상 제일 나약하고 불쌍한 건 내가 아닌 너였다.
나 같은 사람을 믿고 마음을 열기 시작했던 너.
오늘의 나를 살게 만드는 것도 너지만, 오늘의 내가 힘든 이유도 너다.
나의 우주에서 가장 사랑스럽고 자랑스러운 존재가 너인 만큼, 그만큼의 죄책감을 안고 살아간다.
그리고 이 글이 너에게 쓰는 사랑 고백이자 고해성사이며,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
어디에선가 나 같은 파렴치한 생각으로, 버려지고 있을지 모르는 또 다른 너의 존재를 막기 위한 최선.
절대 눈곱만큼의 사랑과 산책만으로 반려동물의 하루를 모두 채울 수 있다는 착각을 하지 않길 바란다.
그리고 공허한 마음을 반려동물로 채우려 한다면, 그 뒤에 맞닥뜨릴 현실은 정해져 있다.
지금의 나는 눈이 멀고 몸과 마음이 부서져도 기어이 너의 우주가 되었지만, 또 다른 나는 기꺼이 같은 선택을 할지 장담할 수 없다.
암담하게도 항상성을 유지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그렇고 우울증 환자는 더욱이 바뀌어가는 자신의 우주를 경험할 여유가 없다.
반려동물은 반려자이자 보호자의 초단위로 반복되는 관심과 시선 속에서 살아간다.
그러니 내가 때로는 극단적인 우울증에 집에만 있는다고 해서 누군가 이 글을 읽고 ‘환자도 키우는데 동물 키우기 쉽네’ 혹은 ‘나 정도면 쉽게 하지’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반려동물을 키우는 게 이렇게나 힘든 일’이라 말하고 싶으니 말이다.
나는 반려견을 맞이할 때 가족과 함께 했으며, 남편(당시 남자친구)과 매주 반려견과 시간을 보냈다.
반려견과 남편은 매우 애틋하고 각별한 사이다.
10년 동안 없었던 가족 단톡방은 내가 결혼 후 반려견을 신혼집으로 데리고 오면서 생겼다.
웃기게도 나의 가족에게 가장 강력하게 화를 내는 방법은 백설이를 안 보여주는 일이다.
이 말인즉슨, 나의 반려견이라 말해도 온전히 나 혼자 키우는 아이가 아니라는 말이다.
나는 우울증과 신경정신적 아픔을 갖고 있지만, 내가 아프거나 자살시도를 해도 백설이를 바로 데리러 와줄 사람들이 있다.
나는 경제활동을 하지 않아 손 벌려도 기꺼이 받아주는 가족이 있다.
아프지만, 시간 많고 경제적인 어려움이 전혀 없는 사람이 바로 우울증 개집사의 여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