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뉴얼의 진화론
경영 기법의 하나로, Plan-Do-See라는 방법이 있다. MBA과정에서도 중요하게 다루는 아주 단순하지만 확실한 방법이다. Plan-Do-See는 말 그대로, 우선 ‘계획’을 세우고, 계획에 따라 ‘실행’, 그리고, 결과를 ‘관찰’해 계획이 얼마나 효과적이었나 확인하여 다시 새로운 계획을 입안하는 사이클 구조를 가지고 있다.
때론 See단계를, 결과를 평가하는 check단계, 그리고 개선안을 마련하는 Action단계로 조금 더 세분화하여 Plan-Do-Check-Action로 나누는 경우도 있다.
이런 PDCA 원리는 경영에만 국한되지 않고, 개발의 기법으로도 활용된다. 아니, 최초는 오히려 제조업의 문제해결법으로 고안된 것이 경영의 원리로까지 전개되었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 PDCA는 말 그대로 실험 계획을 세우고, 계획이나 가설에 따라 실험을 실시한 후 만들어진 결과물을 평가, 그리고 예상과 얼마나 다른지 체크하고, 차이점을 보완할 새로운 액션플랜을 마련하는 것이다.
흔히 연구나 개발(R&D)은 창의력이 필요하다고 하지만, 위의 네 가지 혹은 세 가지 단계 중 창의력 보다 다소 정형화되고 철저한 절차가 필요한 단계가 있다. 바로 평가(see 혹은 check) 단계이다. 실험의 결과가 이전 실험에 비해 개선되었는지를 평가하려면 일관적이고, 객관적인 평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가령 차가운 물에 더 쉽게 녹는 아이스커피믹스를 새롭게 개발했다고 하자. 더 쉽게 녹을 수 있는 아이스커피믹스의 방법을 고안하고 제조한 후 평가의 단계에서 누구는 냉장고에 들어있던 차가운 물을 사용하고, 누구는 그냥 식탁 위에 있던 물을 사용해 얼마나 쉽게 녹는지를 평가한다면, 새로 만들어진 아이스커피믹스가 정말로 더 쉽게 녹는지 어떤지 알 수가 없다.
또는 같은 온도의 물을 사용하더라 어떤 이는 빠른 속도로 열 번을 휘저은 후 평가하고, 또 다른 이는 느릿느릿한 속도로 다섯 번만 휘저은 후 평가를 하는 경우도 그 결과를 제대로 확인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만들어진 것이 바로 평가 ‘매뉴얼’이다. 평가에 대한 변수를 없앨 수 있도록 소소한 부분까지 자세히 평가법과 순서를 기록해 두는 것이 보통이다.
아이스커피믹스를 타먹는 물의 온도, 물의 양, 컵에 넣는 순서, 그리고 섞는 속도와 힘, 시간 등 커피가 녹는 것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모든 요소를 하나하나 점검해 규격화해 둘 수록 좋은 매뉴얼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언제나 문제는 사람이다. 좋은 약은 입에 쓰다고 했던가, 좋은 매뉴얼은 많은 내용을 담다 보니 문서가 길어질 수밖에 없다. 직장인들의 대부분은 매뉴얼을 한 자 한 자 읽어보고 평가하기보단 소위 ‘사수’의 지시에 따라 평가법을 배우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다 보면 사수에 따라 소소한 부분을 말해주지 않는 경우가 발생하고, 새롭게 배운 후배는 자신만의 디테일로 최초의 평가 매뉴얼에서 미세한 부분이 다른 새로운 평가법을 만들어 내게 된다. 때론 매뉴얼을 보고 따라 하더라도 오랜 세월이 지나 평가법이 전수되다 보면 사람들에 따라, 그리고 세대가 지남에 따라 그 평가법은 천차만별이 되어 있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라면을 끓일 때 스프를 먼저 넣는 사람, 라면을 먼저 넣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컵에 커피믹스를 먼저 넣는 사람, 물을 먼저 받은 후 믹스를 넣는 사람이 나누어지는 것이다.
이런 평가법의 차이가 평가결과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 정도의 차이라면 여전히 유효한 평가법으로, 그런 차이가 있는지도 모른 채 시간은 지나가기 마련이다. 그러다 어느 순간 역치를 넘어, 이상 결과가 발생하게 되면 평가법을 다시 세세히 비교해 보는 시점이 발생한다.
그 순간이 바로 ‘평가법 진화론’의 결과물을 맞이하는 순간이다.
19세기 비글호를 타고 세계를 유람한 찰스 로버트 다윈은 코페르니쿠스 이후 인류에게 또 한 번 커다란 충격을 주는 이론을 발표한다. ‘진화론’ 지구상의 다양한 생물들은 모두 진화의 결과로 조금씩 분화되어 환경에 적합한 생물이 대세가 되어가는 과정과 결과라는 이론이다.
태초에 만들어진 매뉴얼이 사람들에 따라 각자의 취향과 귀차니즘에 의해 조금씩 변주되어 내려온 것처럼 말이다.
진화론을 발표할 당시에는 DNA나 유전학도 제대로 알지 못하던 시절이었지만, 이후 발달한 인류유전학에 의하면, 미토콘드리아 DNA는 난자에서 유래하여 할머니에서 어머니, 그리고 딸로 모계 유전한다는 사실이 알려지게 된다. 이런 논리에 기반해 미토콘드리아 DNA를 역추적하다 보면 인류 최초의 어머니에 다다르게 된다. 이를 ‘미토콘드리아 이브’라고 한다.
평가법의 미세한 차이들을 면밀히 비교해 평가법을 역추적하다 보면 드디어 최초의 ”미토콘드리아 매뉴얼“과 조우하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사실 잘 관리된 조직이라면 이런 매뉴얼 관리도 꼼꼼히 이루어지므로, 평가 매뉴얼의 첫 장에 상황과 여건에 따라 개정된 평가법의 일시와 내용을 간략히 요약해 놓는 편이다.
자! 과연 우리 회사는 어떤지 실험실로 달려가 보자. 한눈에 ”미토콘드리아 매뉴얼“을 발견할 수 있는지, 아니면 유전공학자가 DNA를 조사하듯 신중히 조사해야 하는 다채로운 자연이 펼쳐져 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