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니스에 남긴 쪽지
지금 나는 커피 한 잔을 식혀가며 앉아 있다. 창밖에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바람이 지나가고 그늘에 앉은 고양이는 햇살이 조금만 움직이기를 기다리고 있다. 무심한 하루의 정오 흐름이 없는 듯 이어지는 이 조용한 시간 속에서 나는 불현듯 서랍 하나가 열리는 감각을 느낀다. 마음의 안쪽에 아주 깊이 감춰둔 서랍 그 안에 무언가가 살짝 바스락이고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너무도 잘 안다. 그건 그 사람과 함께했던 베니스의 오후 곧 무너질 것 같은 고요를 가만히 품고 앉아 나는 그와 곤돌라를 탔다.
말이 없었다. 그는 나를 보지 않았고 나는 그 침묵 속에서 그의 마음이 나를 향하고 있지 않다는 걸 알아챘다. 바람은 천천히 흘렀고 햇살은 물결 위에서 반짝였으며 곤돌라를 젓던 사내가 들려준 옛이야기는 아무도 다치지 않는 목소리로 우리 사이에 놓였다. 카사노바는 바람둥이였지만 그는 단 한 여인을 조용히 기억했다고 했다. 그녀는 낮의 여인이었고 그 빛 아래에 있었지만 어느 그림자보다도 깊은 사람이었다고 그래서 그는 다가가지 못했다고. 나는 조용히 그를 바라보며 속삭였다. 당신도 언젠가 그런 여인을 기억하게 될까. 그는 한참을 말이 없더니 짧게 웃으며 말했다.
나는 이미 기억하고 있어. 내 안에서 무언가가 무너져 내렸고 그는 나를 사랑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이 말없이 확실해졌다. 사랑이란 가끔은 멀어지기 전에 이미 끝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서점에 들렀다. 그가 서점 밖에 있는 동안 나는 그에게 주지 않을 편지를 썼다. 사실은 나에게 쓰는 글이었다. 나는 그의 이름을 쓰지 않았고 나의 이름도 쓰지 않았다. 다만 이렇게 시작했다. 당신에게. 우리는 사랑했습니다. 하지만 끝까지 닿지는 못했죠. 당신이 나를 두려워한 순간부터 나는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 여인이었을지도 모르죠. 당신이 다가가지 못했던 그 고요. 지금 이 쪽지를 꺼내 든 당신이 우연히 이 페이지를 펼친 것이 아니라면 당신도 아마 누군가를 여전히 잊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겠죠. 그러니 이 사랑을 믿어주세요. 우리는 끝나지 않았고 기억 속에서 계속 숨 쉬고 있습니다.
베니스 어느 오후. 나는 그 쪽지를 시집 한 권에 조용히 밀어 넣었다. 책 제목은 그림자의 말들 "Le parole dell’ombra" 였다. 창틀에 앉은 햇빛이 딱 그 페이지를 비추고 있었다. 책장을 깊숙이 눌렀고 그와 나의 사랑도 아무도 모를 문장 사이에 숨기듯 말없이 접었다. 그는 나를 기다리고 있었고 나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그에게 걸어갔으며 그날 나는 사랑을 붙잡지 않았고 붙잡지 않은 채 사랑했다. 그리고 나는 가끔 생각한다. 그 시집 Le parole dell’ombra는 아직도 그 서점 어딘가에 있을까. 누군가 발견하지 않았을까. 아니면 그가 다시 그곳에 가게 된다면 그 책을 펼쳐보게 될까. 아니면 나 자신이 언젠가 다시 그 책장을 찾아가 손끝으로 눌러본다면 아직도 그 쪽지가 거기 있을까. 아직도 살아 숨 쉬고 있을까.
지금의 나는 그날보다 조금 더 조용하게 사랑한다. 누군가의 눈빛에 마음이 닿을 때 그것이 사랑이라는 걸 단번에 알아채지만 먼저 말하지 않고 오래 바라본다. 나는 이제 누군가를 붙잡는 대신 머물게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고 사랑을 설명하는 대신 그 사람이 나와 있을 때 따뜻해지도록 조용히 곁을 내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내 안의 감정은 여전히 깊고 날것이며 여전히 격렬하지만 그것을 조심히 다듬고 천천히 꺼내는 법을 나는 그날 이후로 배워가고 있다. 사랑을 증명하지 않아도 된다는 걸 이제는 안다.
그 사람 앞에서 내가 어떤 존재이고 싶은지를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사랑은 이미 시작되고 있다는 것을. 그래서 나는 애써 다정하지 않아도 다정함을 잃지 않고 말하지 않아도 전달되는 마음을 믿게 되었다. 기다려달라고 부탁하지 않아도 나를 기다려주는 사람 앞에서 나는 비로소 고요한 마음을 배웠고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내 옆에 머물러주는 사람 앞에서 나는 처음으로 나 자신을 더 사랑하고 싶어졌다. 사랑이라는 말은 너무 쉽게 소모되지만 어떤 이의 하루에 내가 조용히 녹아 있다는 걸 느꼈을 때 나는 그 말보다 훨씬 오래가는 감정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당신은 내게 조급해하지 않아도 괜찮은 시간을 주었고 나는 그 시간 안에서 나를 천천히 건져 올릴 수 있었으며 당신이 내 손을 먼저 잡지 않아도 괜찮다는 걸 알았을 때 나는 비로소 누군가의 손을 따뜻하게 잡을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우리는 말이 적지만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걸었고 약속을 하지 않아도 서로를 잊지 않는 마음의 패턴을 지니고 있었으며 나는 그것이야말로 가장 깊은 신뢰라는 것을 깨달았다. 사랑은 꽃을 피우는 일이 아니라 그 꽃이 시들어갈 때 곁을 내주는 일이라는 것도 이제야 나는 안다. 우리는 지금 그 꽃잎이 바람에 흔들릴 때 서로를 바라보는 사람이고 당신이 나의 이름을 부르지 않아도 나는 내 이름을 당신의 시선에서 듣고 있으며 당신이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아도 나는 당신이 그 말보다 더 무겁고 고요한 방식으로 매일 내 곁에 머물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
그래서 나는 더 조용히 사랑하게 되었고 더 조용한 사랑일수록 오래 가리라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 편지를 쓰는 대신 하루하루가 쪽지처럼 기록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나는 오늘도 물컵을 하나 더 꺼내고 창문을 조용히 닦으며 한 사람을 위한 자리 하나를 늘 비워둔 채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