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evi

by 마르치아


이탈리아의 소도시들을 휩쓸고 다녔던 그 시절. 돌이켜보면 참 잘한 일이었다. 나는 그때 제주에 음악학교를 설립하려는 꿈을 안고 있었고 누군가의 소개로 트레비에 있는 파이프 오르간 장인 핑키와 그의 아내 시모나를 만나게 되었다.


그들을 만나기 위해 찾아간 골목. 마을 중심의 오래된 레스토랑에서의 점심은 네 시간이 훌쩍 넘게 흘렀다. 핑키는 내 긴장을 눈치채고 웃으며 말했다. "결혼식에선 하루 종일 먹어. 네 시간은 금방이지." 그 한마디에 긴장이 풀렸고 식사와 대화는 마치 물이 흐르듯 우리 사이를 흘렀다.


레스토랑은 오래된 와인 병과 장인의 도구들이 장식처럼 놓여 있는 따뜻한 공간이었고 창밖으로는 담쟁이가 담장을 타고 흐르고 있었다. 우리는 핑키 부부가 단골로 찾는다는 테라스 가까운 자리에 앉았다. 첫 번째로 나온 것은 형형색색의 제철 채소로 만든 샐러드였는데 붉은 무화과와 보랏빛 양상추 노란 치커리와 잘게 썬 오렌지 필이 어우러져 있었고 그 위로 고트 치즈가 부드럽게 흩뿌려져 있어 한 접시의 정물화 같았다. 향긋한 발사믹 드레싱이 이 화려한 샐러드에 생기를 더했고 핑키는 와인을 따르며 말했다. "이건 우리 친구가 재배한 포도로 만든 거야. 자 건배."


메인 요리는 염소고기와 토끼고기였다. 염소고기는 로즈마리와 마늘 올리브 오일에 재워 천천히 오븐에 구워냈고 겉은 바삭하고 속은 놀랍도록 부드러웠다. 향은 진했고 육즙은 고요한 대화처럼 스며들었다. 토끼고기는 레드 와인 소스에 졸여져 있었고 담백하면서도 깊은 풍미가 있었으며 입안에서 은은하게 퍼지는 육향이 마치 오래된 악기의 울림 같았다. 요리 하나하나엔 긴 시간과 정성이 깃들어 있었고 우리는 말없이 그 풍미를 음미하며 그날의 대화를 천천히 이어갔다.


마지막으로 티라미수와 과일이 나왔다. 티라미수는 촉촉한 마스카포네 크림 사이로 쌉싸름한 에스프레소가 적셔진 비스킷이 부드럽게 녹아 있었고 그 위엔 고운 카카오 파우더가 얹혀 있었다. 과일은 잘 익은 무화과와 복숭아 오렌지와 자두가 투명한 유리 접시에 담겨 있었고,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모습은 한 접시의 작은 정원 같았다. 그 달콤함은 식사의 끝이라기보다 긴 여운처럼 우리 대화의 마지막을 감싸주었다.


핑키는 열다섯 살부터 아버지에게 파이프 오르간 제작을 배웠다고 했다. "처음엔 고역이었지. 학교 끝나면 친구들 대신 작업장으로 갔으니까. 그런데 어느 날부터 그 소리들이 내 심장처럼 느껴졌어." 그의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깊었고, 나는 그 말에 담긴 세월과 사랑 그리고 장인의 침묵을 천천히 음미했다.


시모나는 로마에서 활동하는 변호사였다. 말수가 적었지만 한마디 한마디가 깊고 단단했다. "사람이 자기 직업을 통해 삶을 살아간다는 건 결국 그 안에서 자신의 정의를 지켜내는 일이에요." 그녀는 핑키가 삶으로 빚어낸 악기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 말도 그녀처럼 정확했고 아름다웠다.


나는 조심스럽게 제주행을 제안했고 핑키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우리는 행복이 있는 곳으로 언제든지 갈 준비가 돼 있어. 그게 이탈리아든 한국이든 상관없어." 시모나는 말없이 웃었다. 그 미소는 무언보다도 선명하게 그렇다고 말해주었다.


나는 그 부부를 한참 동안이나 바라보았다. 말없이 그저 활짝 웃으며 바라보았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존경심과 어쩌면 경외심 같은 것이 조용히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들이 내게 보여준 삶의 태도 그 고요하고도 단단한 용기는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깊은 울림이었다.


나는 그날 삶이란 매 순간 선택이라는 것을 그리고 행복을 선택하는 용기만큼 값진 일은 없다는 것을 배웠다. 익숙한 세계를 뒤로하고 낯선 곳으로 나아가는 그들의 태도는 그 자체로 하나의 예술이었다.


그리고 지금 삶이 다시 나를 시험하고 무언가를 포기하거나 다시 시작해야 할 기로에 서 있을 때면 나는 문득 트레비에서의 그 네 시간의 식사를 떠올리곤 한다.


햇살이 창가에 번지고 조용한 식당 안 와인 잔이 부딪히며 울리던 소리 핑키의 "우리는 행복이 있는 곳으로 언제든지 갈 준비가 돼 있어."라는 말 그 말 뒤에 따라오던 시모나의 고요한 미소 그리고 나의 웃음 그 모든 장면들이 마치 천천히 흐르는 음악처럼 내 안을 감싼다.


삶이 다시 나를 겁줄 때마다 나는 그날의 핑키를 시모나를 떠올린다. 그들이 보여준 용기와 여유는 내게 단지 추억이 아니라 살아가는 방식에 대한 대답처럼 남아 있다.


용기가 필요할 때면 나는 트레비의 그 식탁으로 돌아간다. 시간이 천천히 흐르던 그 네 시간 그 속에서 나에게 말을 걸던 음식과 사람과 침묵과 눈빛들 그건 나에게 여전히 세상의 소란 앞에서 흔들리지 않게 해주는 조용한 등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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