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인간관계의 모든 층위를 부모와 자식의 구조로 본다."
모든 생자가 두 명 이상 모이면 그 안에는 보이지 않는 서열이 정해진다. 나는 그 모든 관계의 수평적인 도식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고 결론 내리게 되었다. 모든 관계라는 직조는 결국 어미와 자식의 역할이 정해져 있다. 누군가는 한없이 사랑하고 들어주고 보듬어주며, 성장하기를 바라며 기다려 준다. 누구는 그 보살핌 아래서 실수하고 되돌이키며 성장한다.
한쪽은 어미의 역할을 하기에 늘 배고픔을 해결해주고, 목마름을 덜어주며, 배설물을 치워준다. 그리고 외부의 위험한 요소에 노출되지 않도록 막아주고, 변호해주며, 감정마저도 하나하나 의미를 부여해주고 이름을 불러주며, 다정을 건넨다. 관계의 어느 한쪽은 자녀의 역할을 담당한다. 부모의 역할을 하는 자의 보살핌과 애정과 헌신을 받으며, 그 안에서 자기 존재를 증명한다. 이렇듯 관계의 모든 도식은 부모와 자녀의 역할로 점철되고 만다. 그러나 이것은 비극이 아니다.
관계의 손익을 따지는 쪽은 결코 부모의 자리에 설 수 없다. 그들은 늘, 죽어도 그것이 남지 않는다는 장사인 것을 뻔히 알면서도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고, 살점마저 떼어주며, 없는 열정을 박박 긁어 그에게 용기를 준다. 인간관계의 모든 그림은 이와 같이 설계되어 있다. 이것은 꼭 부모와 자식의 관계뿐 아니라 사회에서 만나는 모든 관계를 망라한다. 남녀 관계도, 친구 관계도, 스승과 제자의 사이도 마찬가지다.
동물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어미 사자는 새끼를 위해 사냥을 멈추고 스스로 굶주리며 새끼에게 먼저 먹인다. 펭귄은 눈보라 속에서 알 하나를 품기 위해 죽음을 무릅쓴다. 까마귀는 아직 날지 못하는 새끼에게 몇 날 며칠을 입으로 먹을 것을 물어다 준다. 모든 생존의 시스템은 강자와 약자, 지키는 자와 보호받는 자, 어미와 새끼의 구도로 나뉘며 이어진다. 인간이라 해서 그것을 초월한 존재는 아니다. 우리는 더 복잡한 언어와 제도로 포장했을 뿐, 여전히 사랑은 위계 속에서 작동한다.
어떤 사람은 늘 손해를 보면서도 사랑을 선택하고, 어떤 사람은 그 사랑을 당연히 받아들이며 자라고, 또 어떤 사람은 그 사랑을 의심하고 배신하고 떠난다. 그럼에도 어미의 자리에 선 자들은 다시 그 자리를 지킨다. 그들이 이기적이지 않아서가 아니라, 사랑이 그들에게는 이미 생존의 언어이고 존재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관계를 이야기할 때 수평의 정의나 형평성만을 논할 수는 없다. 진짜 사랑은 손익을 따지지 않는다. 진짜 사랑은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끌어안고, 모든 것을 내어준 뒤에도 남은 자리를 지킨다. 그들은 조건 없는 이타성의 뿌리를 안고 살아가는 이들이다. 때로는 미련하다 여겨지고, 손해를 감수하며, 자기 한 몸을 끝없이 던지는 자들이지만, 결국 세상을 지탱하는 힘은 바로 그들이 만든다.
이 글은 그 사랑의 구조에서 어미의 자리를 선택한 모든 이들을 위한 위로이자 증언이다. 그들이 선택한 사랑은 결코 약한 것이 아니며, 그 고독한 자리야말로 가장 위대한 자리임을 말하고 싶다. 그리고 언젠가 그들의 다정이 돌아오지 않더라도 누군가의 삶을 바꾸었다는 것을, 나는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