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텀블러와 종이컵
며칠 전 아침, 종이컵에 블랙커피 한잔을 텀블러에 부어서 한 번에 온전히 한 잔을 다 마시며 든 생각이 있다.
계영배... 커피를 맛있게 한 잔 할 수 있게 하는 것도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중용이 필요하구나!
매일 마시면서도 몰랐던 깨달음이다.
회사에 오면 하루에 통상 4~5잔의 블랙커피를 마신다. 고혈압과 고지혈증을 진단받고 약을 먹고 난 뒤부터는 달달한 믹스보단 블랙을 선호하게 되었다. 고요한 아침에 출근하면 기분이 참 좋다. 그런 적막함 속에 한 잔, 업무시작을 알리는 8시가 되면 한 잔, 현장을 돌아보고 또는 현장에서 동료들과 한 잔, 사무실에 복귀해 한 잔, 그리고 오후에 나른한 시간에 한 잔.
나에게 너무 행복한 이 시간에 한 가지 단점이 있다. 환경을 보호한다는 자기 위안 삼아 사용하는 텀블러이다.
텀블러에 스틱커피를 찢어 용기에 담아서 뜨거운 물을 붓고 흔들어서 마신다. 그런데 물 양을 얼마나 조정할지를 몰라 대충 눈대중으로 한다. 그리곤 자리에 앉아 마시는데 매번 맛도 다르고 남기게 된다. 식게 되면 화장실에 버리곤 한다. 항상 그러하다.
근데 이번에 놀라운 발견을 한 것이다. 종이컵에 커피를 타고 이걸 텀블러에 부어마시니 엄청 맛있는 것이었다. 어! 뭐지? 하면서 한 번에 다 마셨다. 양도 적당했다. 지금껏 무심코 지나친 종이컵에 숨어있는 과학을 알게 되었다. 종이컵의 용량은 대략 180~185ml, 스틱커피의 권고하는 물 양은 100~120ml, 이걸 정할 때 단순히 정해지지 않았을 것이다. 한 손에 잡히는 사이즈, 한 번에 마시는 용량, 제작+소비+폐기+재활용 비용 등등을 고려해서 최종 고안되고 생산되었을 것이다. 거기에 숨어있는 메커니즘(사물의 작용 원리나 구조)을 몰랐다. 아! 세상에 모르는 게 너무 많다.
그러면서 다시 돌아보게 되었다. 최인호 작가가 쓴 '상도'에서 주인공인 조선 후기의 무역왕 임상옥과 관련된 큰 줄기는 '사람'이다. 그리고 본인이 먼저 '더 나은 인간'이 되기 위해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게 '과유불급', '안분지족', '애민'이다. 그중에서 난 '과유불급'이 제일 와닿는다. 내성적인 성향이자 조금만 잘하면 우쭐대고 싶어 하는 나 같은 가벼운 사람에겐 가슴에 콕 박힌다.
앞으론 텀블러와 종이컵의 공존을 통해 일상을 조금 더 행복하게 즐겨야겠다. 그리고 늘 '중용'에 대해 생각하고, 뭘 마시기 전에는 '계영배'를 떠올려야겠다. 이런 큰 가르침이 있는 일상이 고맙다.
*계영배: 술을 많이 마시는 것을 경계하기 위하여 특별하게 만든 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