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전 아내의 친척분들께 인사를 드리러 가는 일은 언제나 어려운 일이었다. 처음 뵙는 어른들께 '제가 새로운 가족입니다'라는 말을 꺼내기가 어찌나 힘들었는지 모른다. 혹시나 실수하지는 않을까, 나쁜 인상을 주지는 않을까 조마조마하며 행동 하나하나, 말 한마디 내뱉는 일에도 온 신경을 다 해야 했다.
그중에서도 아내의 외할아버지 댁에 가는 일은 특히나 어려웠다. 아내에게 대충 이야기를 들었을 때 월남전에 참전하셨던 엄한 할아버지와, 집안의 대소사를 결정하는 최종 결정권자이자, '실세'인 외할머니가 계시다는 무시무시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루고 미루다 결혼 직전에야 명절을 맞이하여 첫인사를 갔다.
"안녕하세요. ㅇㅇ(아내)랑 결혼하는 김민기라고 합니다!"
우려와는 달리 할아버지, 할머니는 손주 사위라며 찾아온 나를 반갑게 맞이해주셨다. 장인어른과 성이 같다는 이유로 '작은 김서방'이라는 애칭도 생겼다. 처음엔 어색했지만 시간이 지나며 긴장도 조금은 풀어졌다. 그러자 집을 꾸미고 있는 예스러운 가구와 오래된 물건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중 눈길을 사로잡는 수납장이 있었다. 안이 훤히 보이는 오래된 수납장 안에는 종류도, 색깔도 다양한 외국 술들이 줄지어 서있었다. 언제부터 모아둔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몇몇은 색이 바랬을 정도로 오래된 듯 보였다. 할아버지는 그만큼 술을 좋아하시는 분이었고, 외국에 나갈 때마다 기념으로 한 병씩 들고 오셨다고 했다.
궁금했다. '저 아까운 술을 왜 안 드시고 모아만 두시는 거지?, 나중에 편해지면 물어봐야지'라고 생각했다.
혹시 집안에 아픈 사람 있어요?
결혼 1년 차, 코로나로 인한 집콕 생활에 익숙해질 무렵 새해를 맞아 아내와 철학관에 갔다. 결혼 날짜를 잡으러 방문했던 것을 인연으로, 새해가 될 때마다 같은 곳에 신년운세를 보러 가자고 약속한 터였다. 그런데 아내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혹시 집안에 아픈 사람 있어요? 올해 운세에 상(喪)이 보이네"
아무리 고민해보아도 당장 올해를 넘기지 못할 만큼 아픈 사람은 없었다. 찝찝했지만 운세가 틀렸겠거니 생각하며 일상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몇 개월 후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다. 새롭게 생긴 할아버지, 즉 아내의 외할아버지가 암에 걸리셨다고 했다. 그것도 말기상태의.
아내와 급히 할아버지 댁에 갔다. 할아버지는 언제나처럼 곧은 자세로 반갑게 맞아주셨지만, 수척해진 외모마저 숨기지는 못했다. 이지경이 될 때까지 왜 아무도 몰랐던 걸까. 다들 대놓고 이야기하지는 않았지만 속으로 안타까워하고 미안해했다. 하지만 정말 아무런 증상이 없었다. 불과 몇 주 전 찾아왔을 때만 해도 할아버지는 내게 술을 권할 정도로 정정하셨다.
"김서방, 자네도 소주 한 잔 해야지."
"죄송합니다. 제가 오늘 차를 들고 와서 다음에 같이 하겠습니다."
"할아버지 집에 올 때는 차를 놔두고 와야지!! "
"네! 다음에는 꼭 차를 두고 오겠습니다!"
너무나 당연히도 '다음'이 있을 줄 알았다. 그래서 다음에 올 때를 대비해 할아버지의 정치성향부터, 명절 때 자주 오시는 친척들을 부르는 호칭, 분위기를 띄울만한 농담 등을 준비했다. 하지만 결국 할아버지와의 술자리는 결국 이뤄지지 못했다. 다시 2개월 뒤 할아버지는 짧은 만남을 뒤로하고 세상을 등지셨다.
삶의 흔적을 남긴 다는 것.
할아버지는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할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었던 2년 남짓한 짧은 인연에 대한 아쉬움을 삼키며 장례를 치렀다. 모든 절차를 마친 후, 온 가족이 할머니 댁에 모여 저녁을 먹게 되었다. 고생한 가족들은 서로를 다독이고, 특히 홀로 남겨진 할머니를 위로했다. 그런 분위기 뒤로 할아버지의 양주 수납장이 눈에 들어왔다. 생전의 모습 그대로였다. 불현듯 속상한 생각이 들었다.
'저 많은 술을 먹지도 못하고 결국 버리게 되었구나.'
안타까웠다. 마시지도 못할 거 왜 그렇게 열심히, 또 많이 모아두신 것인지. 먼지 쌓인 양주 병을 보며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삶도, 사람도, 물건도 참으로 부질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또다시 7주라는 시간이 흘러 할아버지의 49재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곳에는 이제는 눈에 익은 아내의 친지분들과 함께 처음 뵙는 고령의 어르신이 한 분 계셨다. 그분은 할아버지의 오랜 친구분인데 임종 당시 객지에 있어 오지 못했고, 49재에 맞춰 찾아오신 것이라 했다.
그런데 그 친구분은 49재가 끝나고 할아버지의 양주 한 병을 달라고 하셨다. 양주 수집을 좋아하신다거나 마시려는 의도가 아니었다. 알고 보니 할아버지의 친구분 역시 투병 중이라 술은 입에도 못 대시지만, 가져간 술을 할아버지의 분신이라 생각하고, 가끔 할아버지를 떠올리기 위해 그 증표로서 한 병들고 가고 싶다고 했다. 그때 느꼈다.
'아 수납장 안에 저 술들은 단순히 '술'이 아니었구나. 할아버지의 인생이고, 살아온 흔적이었구나.'
또 다른 친지분은 명절마다 다같이 모여서 양주 한 병씩을 꺼내어 나눠 마시자며, 그러면서 할아버지를 추억하자고 했다. 아마 누군가가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양주를 마실 때면 자연히 할아버지를 떠올리게 될 것이다.
물론 개인적으로는 아직도 아까운 생각이 든다. 나였으면 힘들게 모은 술을 다 마시지 못하고 떠나면 너무 아쉬울 것 같다. '차라리 다 마셔버릴걸...', '괜히 모으느라 쓸데없이 돈, 정성 쏟지 말걸...'이런 후회가 밀려올 것 같다.
하지만 이제 그 수집의 의미를 조금은 알 것도 같다. 사람이 마음을 다해 무언가를 모으면, 그것은 원래의 의미 이상의 가치를 지니게 되는 듯하다. 그것이 양주든, 우표든, 또 다른 형태의 물건이든 상관없이 모으는 사람의 흔적이 되고 발자취가 된다. 문득 만약 할아버지의 양주처럼 내게 무언가 남길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무엇을 남기는 게 좋을지, 사람들이 어떤 물건을 보고 나를 떠올리게 만들면 좋을지 의문이 들었다.
만약 내게도 그런 기회가 있다면 책이든, 메모든, 문서든 나의 '기록'을 되도록 많이 남기고 싶다. 그 기록을 통해 나는 이런 사람이었고, 이런 생각을 했었다고. 또 이런 삶을 살길 바랐었다고 누구 하나 기억해주었으면 좋겠다. 그렇다면 떠나는 길, 마음이 조금은 편해질 것 같다. 이 글을 쓰며 다시 한번 할아버지의 명복을 빌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