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이 건네준 시간~26화
기다림의 시간~능소화
여름 초입, 동네 골목을 걷다 보면 어느 담장 위에서 주황빛 꽃이 조용히 고개를 내민다. 능소화다.
가지 끝마다 종 모양의 꽃이 매달려 바람이 불 때마다 가볍게 흔들린다.
이 꽃이 피기 시작하면 아! 이제 여름이 왔구나 하고 계절을 짐작하게 된다.
능소화에는 오래된 이야기가 하나 따라다닌다. 옛날에는 이 꽃을 양반집 담장에만 심었다고 한다. 꽃이 질 때 꽃잎이 흩어지는 것이 아니라 꽃이 통째로 툭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꽃 아래를 평민이 지나가면 안 된다는 말까지 했다고 한다.
사람들은 담장을 세우고 꽃의 자리까지 나누려 했다. 그러나 능소화 가지는 담장을 타고 오르다 보면 어느새 담장 밖으로 고개를 내민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꽃은 담장 너머에서 흔들리고 있다. 마치 세상 쪽을 향해 조심스럽게 고개를 내미는 것처럼.
그 모습을 보고 있으면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기다림이라는 것은 언제나 슬픈 것만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다. 능소화를 바라보고 있으면 그 기다림의 시간이 조금은 다르게 느껴진다.
능소화는 담장을 타고 올라가 높은 곳에서 꽃을 피운다. 누군가 보아 주기를 바라듯
조용히 가지를 늘어뜨린다. 그러나 그 모습에는 조급함이 없다. 꽃은 그저 자기 자리에서 자기 시간을 견디며 피어 있을 뿐이다.
생각해 보면 우리 삶에도 기다림의 시간이 있다. 무언가 이루어지기를 기다리는 시간,
누군가의 마음을 기다리는 시간, 혹은 내 마음이 조금 더 단단해지기를 기다리는 시간.
그 시간은 종종 길고 때로는 답답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지나고 나면 알게 된다.
그 기다림 속에서 우리 마음이 조금씩 자라고 있었다는 것을.
능소화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다만 여름 햇살 아래 담장 위에서 꽃을 피우며
조용히 말해 주는 것 같다. 서두르지 않아도 괜찮다고. 꽃도 사람도 각자의 시간이 올 때 피어나는 것이라고.
그래서 나는 능소화를 볼 때마다 생각한다. 기다림은 시간이 우리에게 주는 또 하나의 선물일지도 모른다고.
사람들은 기다림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시간처럼 말하지만 능소화를 바라보고 있으면 그 말이 조금 다르게 들린다. 꽃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오랜 시간을 담장 위에서 보낸다. 그러는 동안 여름은 조금씩 깊어 간다. 기다림이란 멈춰 있는 시간이 아니라
조용히 자기 시간을 건너가는 일인지도 모른다.
능소화는 그 사실을 말없이 보여준다. 여름 햇살 아래 담장 위에서 천천히 꽃을 피우며
자기 시간을 살아가고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