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이 남긴 말~25화
봄은 낮은 곳에서 시작된다.~무스카리
이른 봄 산책을 하다 보면 사람들의 시선은 대개 위로 향해 있다. 막 피기 시작한 목련이나 벚꽃을 올려다보느라 바쁘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시선을 아래로 떨군다. 그때 비로소 보이는 것이 있다.
발치 가까운 흙 사이에서 작은 보랏빛 꽃들이 조용히 올라와 있다. 손바닥만 한 키로, 포도송이처럼 촘촘히 모여 피어 있다. 그 이름이 무스카리라는 것을 그제야 떠올린다.
무스카리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마음이 잔잔해진다. 꽃 하나만 떼어 보면 손톱만큼 작고 연약하다. 바람 한 점에도 쉬이 꺾일 것 같은 모습이다. 혼자서는 봄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할 것처럼 보인다.
그 조밀한 뭉침을 보고 있으면 문득 우리가 지나온 삶의 무늬가 떠오른다. 그런데 이 꽃은 혼자 피지 않는다. 작은 꽃봉오리들이 서로를 밀어 올리듯 어깨를 맞대고 하나의 줄기를 이룬다. 향기가 은은한 무스카리는 마치 포도송이를 거꾸로 든 듯한 모습이다. 자세히 볼수록 작은 꽃들이 만들어 내는 조화가 신기하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면 내 지나온 시간이 떠오른다.
살다 보면 내가 너무 작게 느껴지는 날이 있다. 거창한 꿈을 품기엔 현실이 낮고, 혼자 힘으로는 넘기 어려운 담벼락 앞에 서 있는 것 같은 날이다. 그런 날은 일이 마음처럼 풀리지 않아 괜히 기운이 빠진다. 그때 곁에 있던 사람이 툭 건넨다.
“다 그래요. 나도 그래요.”
길지도, 특별하지도 않은 말이다. 그런데 그 한마디가 오래 남는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는 사실, 누군가도 같은 자리에서 버티고 있다는 사실이 위로가 되고 마음이 놓인다.
생각해 보면 우리를 버티게 하는 건 늘 그런 말이다. 능력자의 손길이 아니라, 나와 닮은 사람들이 곁에 있어 주는 일. “나도 그래”라고 조용히 말해주는 사람들이 곁에 있다는 사실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봄도 그렇다. 화려한 꽃 한 송이가 계절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작은 꽃들이 먼저 땅 가까이에서 피어나며 계절을 밀어 올린다. 봄은 늘 작은 것들로부터 시작된다.
무스카리에는 ‘절망 속의 희망’이라는 꽃말이 있다. 긴 겨울 끝, 아직 다른 꽃들이 잠들어 있을 때 가장 먼저 땅 가까이에서 올라오기 때문이라고 한다.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 자리에서 조용히 피어 있다. 그래서 이 작은 보랏빛이 더 단단해 보인다.
낮은 곳에 피어난다고 해서 삶까지 낮은 것은 아니다. 서로를 기대고 있기 때문에, 모진 바람을 더 오래 견디는지도 모른다.
돌이켜보면 내 삶의 가장 빛나던 순간들도 혼자 이룬 것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함께 버텨 준 사람들, 좁은 줄기 위에서 서로의 무게를 나누어 가졌던 시간들이 있었다. 혼자였다면 금방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함께였기에 견딜 수 있었고, 아직 꿈꿀 수 있는지도 모른다.
오늘도 무스카리는 땅 가까이에서 조용히 피어 있다.
봄은 늘, 낮은 곳에서 시작된다.